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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의 비밀…'반야바라밀'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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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의 비밀…'반야바라밀'의 진실은?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오래된 지혜

사람들이 수천 년 전에 태동한 부처, 예수에게 여전히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지혜'에서 답을 찾고 싶다. 부처의 가르침이든, 예수의 가르침이든 그 안에는 인간사를 꿰뚫는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한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런 지혜를 따르지는 못하는 법이다.

한의학자의 입장에서, 이런 수많은 지혜 중에서 늘 되씹어 보는 것이 있다. 바로 불교의 지혜 중 하나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반야바라밀에 담긴 지혜를 헤아려보면, 그것이 전통 의학의 핵심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하긴, 전통 의학 역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유산이니 둘이 통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나씩 따져보자.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인데, 그 본래 뜻은 '지혜'이다. 그런데 그 한자를 따져 봐도 원래 뜻과 통한다. 돌아올 '반(般)', 같을 '야(若)'는 모두 동그라미를 상징한다. 동그라미, 원은 자연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도형이다. 즉, 동그라미는 다양성 속에 자리 잡은 단순성을 상징한다.

재벌이나 서민의 삶이 서로 달라보여도 먹고, 자고, 싸는 모습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에서 단순한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미혹(迷惑)을 끊고 지혜를 얻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지혜를 뜻하는 반야를 상징하는 도형이 동그라미인 것은 이 때문이다.

▲ 현대인이 수천 년이 된 부처의 가르침에서 삶의 좌표를 찾으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뉴시스

동그라미는 순환을 상징한다. 순환은 세상을 설명하는 또 다른 지혜다. 곰곰이 따져보면 모든 것이 순환한다. 생명 원리의 핵심은 순환이다. 얼핏 보면 생명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직선의 과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보면 한 생명의 죽음은 곧 다른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동그라미는 항상 내부와 외부로 나뉜다. 생명 원리 역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짓는 데서 시작한다. 또 외부와 내부는 서로에게 의존한다. 생명 역시 외부와 내부의 물질 교환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되,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 즉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동그라미는 또 '공(空)'과도 통한다. 공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뜻하는, 즉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공의 핵심은 '중용'이다. 우리 몸의 생명 현상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넘치거나 부족하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이 때문에 생명은 정교한 신호, 관리 체계를 통해서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런 '중용'을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넘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욕심을 버리려면 시쳇말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 '공'이 '중용'과 통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라밀(波羅蜜)' 역시 수행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이다. 이 말 역시 한자를 뜯어보면, 생물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누에가 실을 뽑아서 실타래를 완성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런 과정 역시 수행이라는 본래 뜻과 일맥상통해서 눈길을 끈다.

더구나 이런 비유는 생명 현상과도 비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몸의 근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서 실타래를 완성하는 것과 흡사하다. 생명 현상 하나하나가 지혜를 찾아서 떠나는 수행의 과정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바라밀은 곧 생명 현상 자체다.

지혜를 찾는 수행을 뜻하는 '반야바라밀'을 나름대로 넓게 해석해 보았다. 반야는 생명 자체를, 바라밀은 그 생명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이라고. 이처럼 수천 년을 견딘 부처의 분명한 가르침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다. 어쭙잖은 지식에 의지하는 우리는 옛사람보다도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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