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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이 '명동길'로 옮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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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중원>이 '명동길'로 옮긴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22] <제중원>의 이전 ②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편지로 보고한 내용을 중심으로, 재동에서 구리개로 제중원을 옮긴 과정을 알아보자.

"국왕은 훌륭한 새 병원을 약속했고 그 일을 담당할 관리를 임명했습니다. 저는 어느 날 국왕을 진료하면서 그것을 제안했습니다(The King has promised a new good hospital and has delegated an officer to look it up. I proposed it to him one day while examining him)." (1886년 8월 20일)

알렌이 국왕에게 직접 제안한 시점이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에게 공문을 보낸 1886년 8월 14일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번에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신임하는 국왕의 힘을 빌려 새 병원 이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는 외아문 대신에게 보낼 (새 병원에 관한) 편지를 헤론 의사에게 보여주고 그의 전적이고 자발적인 동의를 받았습니다. (…) 저희는 요청한 장소(남별궁)를 얻지 못했지만, 제가 아는 새로운 장소를 제안 받았습니다(I had written a letter to the Foreign Minister which I showed to Dr. Heron and obtained his full and free consent to it. (…) We failed in obtaining the place asked for but that a new place, on known to me, was proposed)." (1887년 1월 17일자)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남별궁은 조선 국왕과 정부에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라, 알렌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아무리 두텁다 하여도 얻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위의 편지는 발송 시기가 매우 뒤늦은데, 알렌이 새 병원 문제를 둘러싸고 헤론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것을 해명하고자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알렌은 위의 편지에서처럼 처음부터 헤론과 충분히 협의를 해 가며 일을 진행시켰다고 주장했고, 헤론은 알렌이 자신과는 아무 상의 없이 새 병원 이전을 추진했다고 호소했다.

"새 병원은 우리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합니다. 병원 부지는 광대하고, 바로 도시 한 복판의 언덕 위에 있어 도시 전체와 시골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The new hospital is far excelling our highest anticipations. The site is magnificent, right in the heart of the city and on a hill overlooking the whole town and some country)." (1886년 10월 2일자)

"새 병원은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거의 마쳤는데 제 기대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많은 점에서 이 병원은 이 도시에서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건물과 대지 비용 이외에 수리비만 3000 달러 이상 들었습니다. 모든 가구를 외국제로 장만할 것으로 기대합니다(The new hospital is nearly ready for occupation and is far ahead of my highest anticipations, in many respects it is the best house in the town. Beside the buildings and ground the repairs simply have cost over $ 3,000 and I expect an appropriation for foreign furniture throughout)." (1886년 10월 28일자)

새 병원의 위치는 뒤에 언급하듯이,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2가) 일대이다. 알렌은 새 병원을 "이 도시에서 최고의 건축물"이라면서 처음 요청했던 남별궁보다도 더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리비만도 제중원의 1년 예산인 3000달러 이상을 지출했으니, 조선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러면 "한성 최고의 건축물"인 구리개 제중원으로 이사한 시기는 언제일까?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는 기록은 발견된 것이 없다.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알렌은 미국 공사 자격으로 외무대신 유기환(兪箕煥)에게 보낸 1902년 4월 22일자 공문에서는 "1886년"이라고 했으며, 저서 <Korea : Fact and Fancy>(1904년)에는 "1887년"이라고 기록했다. 또 알렌의 "세브란스 병원 정초식 기념사"(1902년 11월 27일)에는 "정해년"(1887년)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 올링거(1886년)와 스크랜튼(1887년)의 언급이 있지만 참고 사항일 뿐이다. 당사자라고 할 알렌의 증언도 엇갈리는 판이다.

그러면 실제 이사를 했을 1886년~87년의 기록은 어떠한가? 일부에서는 "헤론과 언더우드는 알렌이 병원의 이전과 관련해 정부와 협상했다는 사실을 1886년 12월말에 들어서야 외부 소식통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이전하지 않았고 따라서 1887년 1월 이후에 이전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의 헤론의 편지를 그 근거로 들었다. (또 다른 근거 자료라는 언더우드가 같은 날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도 비슷한 내용이다.)

"저는 몇 주 동안 외부의 소식통으로부터 알렌 의사가 새로운 병원과 관련하여 정부와 교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관해 저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습니다(I had known from outside information for a number of weeks that Dr. Allen was in communication with the government concerning the new hospital. He had however said nothing on the subject to me)." (헤론이 1886년 12월 27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언뜻 보면 헤론이 이 편지를 보내기 몇 주 전에 처음으로 병원 이전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지만, 사실 이 편지는 벌써 몇 달 전인 9월초에 표출되었던, 이 문제를 둘러싼 알렌과의 갈등에 대해 헤론이 나중에야 엘린우드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 점은 알렌의 다음 편지를 보면 분명하다.

"그(헤론)가 저를 비난하는 유일한 점은 제가 자기 도움 없이 새 병원을 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는 어느 날 밤 외아문 저녁식사 자리에서 처음으로 어느 외국인에게서 우리가 새 병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 앞에서 언급한 저녁식사가 있던 날 오후에 새 병원을 선정할 관리가 임명되었습니다(The only thing he could accuse me of was in getting the new hospital without his assistance. (…) Then he said that at the Foreign Office dinner the other night he first heard that we had a new hospital from another foreigner. (…) An officer had been appointed to select a new hospital, the afternoon of the dinner mentioned)." (1886년 9월 7일)

요컨대, 헤론이 다른 외국인한테 병원 이전을 들은 것은 외아문에서 저녁식사가 있었던 8월 20일(새 병원 이전 담당 관리가 임명된 날) 무렵이었고, 그 문제에서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알렌을 비난한 것은 9월 7일쯤이었다. 따라서 12월 27일자 헤론의 편지는 1886년에 병원을 이전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비슷한 내용의 언더우드 편지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한 10월 28일자 알렌의 편지로 되돌아가보자. 알렌은 "새 병원은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거의 마쳤다"라고 했다. 따라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곧 이사를 했을 것이다. 혹시 무슨 사정이 생겨서 뒤로 미루어졌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에서 별 문제가 생겼다는 근거가 없는 이상, 이때 즉 10월말 또는 11월초에 이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번에는 "구리개 제중원"의 위치와 넓이 등에 대해 알아보자. 에비슨은 <신동아> 1933년 1월호에서 구리개 제중원이 황금정 동양척식주식회사(지금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의 서쪽 부분)의 바로 옆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선교사 알렌 클라크도 <에비슨 전기>에서 1934년 에비슨이 동양척식회사 앞에 서서 그 근처가 제중원 자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기록했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구리개 제중원의 위치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더 구체적인 사항은 연세대학교 왕현종 교수 등의 연구에 의해 상당 부분 밝혀졌다. 지금으로서는 관련 문헌, 지적도, 지적 목록, 사진 등을 활용한 그 연구에 추가하거나 보완할 사항이 별로 없다. 왕 교수 팀이 구리개 제중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언급한 곳은 아래 [도면 1]에서 (1)과 (2)이다. 병원 부분인 (1)은 황금정 2정목 193번지로 면적이 1100평이며, 에비슨의 집이 있었던 (2)는 명치정 1정목 3번지로 710평이다. 이 두 부분을 합치면 1810평이다.

[도면 1]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경성부 지적도 "일필매(壹筆每)"(1929년 발행)에 구리개 제중원 관련 사항을 표시했다. 구리개 제중원에 근무한 여의사 에바 필드의 집(지금 한국YWCA연합회 빌딩)은 제중원 바깥이었는데, 1905년 "제중원 환수" 때 조선 정부가 사들였다. ⓒ프레시안

(1)은 1905년 "제중원 환수" 이후 대동구락부, 광무기관 관방(鑛務技官官房), 농상공부를 거쳐 귀족회관이 되었으며, 지금은 외환은행 본점 건물의 동쪽 부분과 주차장이 있다. (1)의 서쪽에는 1908년부터 일제의 대표적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가 있었으며, 지금은 외환은행 본점 건물의 서쪽 부분이 서 있다. (2) 자리에는 현재 YWCA 건물이 있다.

[도면 1]에서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부분은 왕 교수 팀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구리개 제중원 부지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기는 곳이다. 이곳들과 위의 (1), (2) 부분을 합치면 면적이 5046평에 이른다. 조선정부에 남별궁(6700평)을 요청했고, 그에 앞서 청나라 측으로부터 제중원을 청국 공사관(6405평)으로 옮길 것을 제의받았던(제21회) 알렌이 "병원 부지는 광대하다"라고 표현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파란색 사각형 부분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면 2] 1907년에 발행된 최신경성전도 중 구리개 제중원 터와 그 주변. "제중원 전(前)" 바로 아래에 "헌병 의무실"이 표시되어 있다. 구리개 제중원 주변은 1880년대 중반부터 청나라의 프랜차이즈였다. 구리개 제중원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청상회관(롯데호텔서울 자리), 동쪽에는 청국군 병영(을지로 2가 네거리 남동쪽), 남서쪽에는 청국 공사관(중국 대사관 자리)이 있었으며 소공동, 북창동, 명동, 관수동에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청국군 병영을 일본수비대가 사용하는 등 일본인들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프레시안

필자는 그밖에 (A) (B) (C) (D) 구역(약 600평)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면 2]는 1907년에 발행된 최신경성전도(最新京城全圖)의 구리개 제중원 터와 그 주변이다. 이 도면에 "헌병 의무실"로 표시된 부분이 그 구역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헌병대가 제중원 바깥 구역에 의무실을 설치했을 수도 있지만, 기왕에 병원으로 썼던 곳을 의무실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1886년 늦가을, 이미 중국인들의 거점 지역이 된 구리개로 제중원을 이전한 이유를 확실하게 말해주는 자료는 없지만, 알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가 되지는 않을까?

"제가 병원과 제 영향력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병원에 대한 완전한 지원과 저에게 만족스러운 봉급이 보장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I am assured of full support for the hospital and a good salary for myself if I will turn the institution and my influence over to China). (알렌이 1887년 6월 15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도면 3](왼쪽) 구리개 제중원은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의 동쪽 부분, 전국은행연합회, 서울로얄호텔, 서울YWCA 빌딩, 신영증권, 동양종합금융증권 등을 포함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파란색 원은 현재 "구리개 제중원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고, 빨간색 원은 그 표석이 옮겨져야 할 위치이다. 외환은행 본점 건물 서쪽 끝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 (구리개) 제중원 터 표석(오른쪽). 재동 제중원 터 표석과 마찬가지로 위치와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프레시안

마지막으로 "구리개 제중원 터 표석"에 대해 살펴보자. 그 표석은 외환은행 본점 건물 서쪽 끝 근처에 설치되어 있는데, 동쪽 구역의 "명동 우당(友堂)길" 입구 근처로 옮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내용도 "제중원은 1885년 4월 14일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으로 1886년 늦가을 재동에서 옮겨왔다"로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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