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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이 고종에게 서울 '소공동'을 요구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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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이 고종에게 서울 '소공동'을 요구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21] <제중원>의 이전 ①

여성 전용 병원의 설치를 의미하는 재동 제중원의 제2차 확장(제19회)이 마무리된 시기는 엘러스가 조선에 도착한 전후일 것이므로 1886년 7월 초쯤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4일에 알렌은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徐相雨)에게 공문을 보내 제중원을 재동에서 남별궁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알렌이 보낸 공문을 흔히 "공립병원(公立病院) 이건(移建) 확장에 대한 건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1967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말~대한제국기의 외교 문서들을 묶어서 <구한국 외교 문서>로 펴낼 때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문서 이름이지, 원래 그 문서들에는 제목이 없었다.

아마도 알렌 측에서 영어 공문에 첨부하는 한문본을 작성하면서 "Government Hospital"을 "공립 병원"이라고 번역했는데, 1년여 전 "공립 의원 규칙"에 한번 등장했을 뿐 그밖에는 쓰이지 않던 단어가 사용된 연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알렌은 이 문서에서 제중원의 이전 이유로 (1) 병원이 너무 좁고(too small), (2) 인구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too far removed from the center of the city's population), (3) 전혀 위생적이지 못해 중요한 수술들을 안전하게 할 수 없다(as the germs of disease collect and poison the atmosphere so that we cannot in safety do important operations)는 점을 제시했다.

▲ 알렌이 1886년 8월 14일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에게 보낸 공문. 알렌은 서상우에게 제중원을 남별궁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프레시안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외아문 독판 서리에게 새 건물을 제공하고 수리비와 운영비를 지급해 줄 것을 요청했고, 나아가 바람직한 곳으로 남별궁(Nam Pell Khun would be a desirable spot)을 지목했다.

알렌이 제중원의 이전 장소로 요청한 남별궁(南別宮)이란 어떤 곳인가? 남별궁은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과 황궁우(皇穹宇) 자리에 있던 큰 저택으로, 대지 면적은 재동 제중원의 다섯 배쯤 되는 약 2만2000제곱미터(6700여 평)에 이른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중구 소공동 87번지에 속한다. 원래 이 집은 태종(太宗)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 부부가 살던 집이었으며, 소공동(小公洞)이라는 지명도 바로 "작은 공주 댁"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별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1580년대 선조(宣祖)가 특히 총애하던 아들 의안군(義安君)이 거주하면서 남별궁이라 불렸다는 얘기도 있고, 임진왜란 때 그곳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국왕 선조가 자주 찾아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언도 있다.

어쨌든 남별궁은 이여송 이래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최고위급 사신이 머물던 곳으로 중국 천자의 권위가 깃든 곳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중국 칙사(勅使)가 머물 때면 조선의 고관대작과 그들이 준비한 선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인솔해 온 우창칭(吳長慶)과 1883년 11월 총판조선상무(總辦朝鮮商務, 공사 격)로 부임한 천서우탕(陳壽棠)도 남별궁에 머물렀다. (소공동 일대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천서우탕이 도착하기 직전에 이미 오늘날 명동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 청나라 공사관(商務公署)이 완공되었지만 천서우탕은 전임자들처럼 남별궁에 주둔했다. 그만큼 남별궁은 청나라가 오래도록 포기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남별궁을 되돌려 준 것은 1884년 7월 지금의 롯데호텔서울 자리(을지로 입구 남서쪽)에 청상회관(淸商會館)을 짓고 나서였다.

그런데 알렌은 1885년 12월, 청나라 공사관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제의를 받았다. 이때는 얼마 전인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에 부임한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기세등등한 직함을 가지고 이미 "총독"처럼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중국인들은 자기네 공사관을 구궁(舊宮)으로 옮기기를 기대하며, 내게 지금의 (공사관) 자리를 병원과 학교로 쓸 것을 제의했다(The Chinese expect to move their Legation to the old Palace and offered me their present place for a hospital and school)." (알렌의 일기 1885년 12월 20일자)

이 문장에서 구궁은 남별궁, 병원은 제중원을 가리킴이 틀림없을 것이다. 달리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세워지기 전이지만 학교 역시 제중원 학당일 것이다. 즉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구궁"이었던 남별궁으로 공사관을 옮겨가고 싶어 했으며, 명동에 있던 청나라 공사관 자리에는 제중원을 유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바로 위에서 보듯이, 알렌 일기의 원문에는 위안스카이가 그러한 제안을 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안스카이가 알렌에게 직접 제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원문을 오독했거나 잘못 번역된 것을 보아서 그럴 것이다. 물론 중국인(공사관원)들이 그런 제의를 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았거나 적어도 승낙을 얻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청나라 공사관측이 그런 제의를 한 구체적 의도가 무엇인지, 또 그 제의에 대해 알렌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나 자료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어쨌든 청나라 측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사관을 남별궁으로 이전하는 일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서우탕의 재임 시절 조선에 돌려주었던 남별궁을 다시 차지하려 한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남별궁을 지키려는 조선 국왕과 정부의 바람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대신 조선 쪽에 크게 손해나는 거래를 했을지도 모른다.)

▲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 전의 원구단(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1897년 10월 12일 이곳에서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이에 앞서 10월 3일 고종은 아홉 차례의 사양 끝에 신하들의 황제 즉위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절차"를 거쳤다. ⓒ프레시안
그 뒤의 일을 보아도 그러한 점을 잘 알 수 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남별궁 자리에 새로 지은 원구단(圓丘壇)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나라 이름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청나라로부터 되찾은 남별궁은 그만큼 국왕과 국가의 위엄과 자존을 뜻하는 곳이었다. 또 그러했기에 일제가 1913년 원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지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원구단뿐만 아니라 남별궁의 각별한 의미도 훼손시켰다.

알렌은 그러한 내력을 지닌 남별궁으로 제중원을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남별궁이 조선 국왕과 정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렌이 몰랐을 것 같지 않다. 이미 여덟 달 전에 청나라 측으로부터 남별궁과 관련되는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이 어떻게 이행되지 않았는지를 보았던 알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렌은 자신의 힘을 확인하거나 과시하고 싶어 그러한 요청을 했을까? 아니면 협상용 카드였을까?

▲ 조선철도국이 1913년부터 남별궁 자리의 원구단을 헐고 1914년에 완공한 조선철도호텔(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보통 조선호텔로 불렸다. 위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호텔 건물 왼쪽의 황궁우와 왼쪽 아래의 정문은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새 건물의 위용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이것 이외에 나머지 부속 건물들은 철거되거나 이전되었다. "고종황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02년에 세워진 석고각은 나중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다)의 종루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1939년 10월 15일 안중근의 아들 준생은 박문사를 방문하여 참배했고 그 다음날 조선철도호텔에서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했다. 모진 세월, 가혹한 운명이었다. ⓒ프레시안
당연히 조선 정부(외아문)는 알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위한 의료 사업에 항상 자비롭고 적극적이신" 국왕도 알렌의 이 청원은 들어줄 수 없었던 것 같다. 대신 국왕은 알렌에게는 여러 모로 남별궁에 못지않은 새 병원("구리개 제중원")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이 글의 앞머리에서 언급한, 알렌이 제시한 병원 이전 이유들에 대해 순서대로 생각해 보자.

(1) 우선, 알렌은 재동 제중원이 너무 좁다고 했다. 좁고 넓은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재동 제중원이 남별궁이나 구리개 제중원보다 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넓이가 약 2000제곱미터(600여 평)이었고, 두 차례의 확장으로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제중원 학당을 제외하고도 50퍼센트 가량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 단순히 면적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멋진 새 건물이 하사됐다" "설비가 잘 된 학교도 새 병원의 한 면모"라면서 크게 반겼던 알렌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수의 증감이다. 환자가 계속 늘어났다면 병원도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환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첫 1년 동안 진료한 외래환자는 모두 1만460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첫 6개월 동안은 7234명이었다. 따라서 나중 6개월의 환자는 3226명으로 처음 6개월의 절반 미만(45퍼센트)으로 줄어들었다. 오히려 구조 조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지난 번(제18회)에 살펴보았듯이 헤론은 이미 1885년 10월에 의사 두 사람이 근무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실제로 1886년 1월부터는 알렌과 헤론이 격주로 번갈아 병원에 출근했다. 알렌이 외아문에 "이건 확장"을 제의한 8월에도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격주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 병원으로 막 떠나려는데 국왕이 사람을 보내 저를 불렀습니다. 이번 주는 제 (근무) 주라서 헤론에게 대신 병원에 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저는 환자가 많지 않아서 병원 일은 2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886년 8월 23일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2) 둘째, 재동이 인구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들었다. 재동은 당시 양반들이 살던 북촌(北村) 마을의 어귀이며, 그 남쪽의 중인 및 서민 거주지에서 멀지도 않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재동 제중원 자리에는 1900년부터 1908년까지 7년이 넘게 대한제국기의 국립병원 광제원(廣濟院)이 설치되어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이렇듯 재동은 당시 한성에 사는 조선인을 위한 병원의 위치로 최적지 가운데 하나였다.

알렌과 엘러스가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경복궁도 남별궁이나 구리개보다 재동에서 훨씬 가깝다. 또 재동 제중원은 외아문과 바로 붙어 있는 장점도 있다. 아니, 거꾸로 그 점이 알렌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이전 이유였는지 모른다.

남별궁이나 구리개의 지리적 특징은 알렌을 비롯한 서양인이 주로 살던 정동에서 가깝다는 점이다. 청나라 사람들의 거주지와는 더욱 가깝다. 일본인들도 1885년 무렵부터 구리개 제중원의 남쪽에서 남산 아래쪽에 걸쳐 밀집해 살기 시작했다.

▲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기초로 펜으로 필사한 지도로, 1892년 무렵 제작되었으며 미국인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재동 제중원(재동) (2) 구리개 제중원(을지로 2가) (3) 남별궁(소공동) (A) 경복궁(세종로 1가) (B) 미국 공사관(정동) (C) 청국 공사관(명동) (D) 일본 공사관(예장동) ⓒ프레시안

(3) 셋째, 알렌은 재동 제중원이 비위생적이라는 점을 이전의 이유로 꼽았다. 알렌이 이전 요청을 할 때까지 조선 정부가 제중원의 수리, 개조에 비용을 지출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1년 4개월 사이에 위생적인 병원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면, 정치적 행정적 책임은 조선정부에게 있겠지만 기술적 실무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알렌의 소원대로 구리개로 이전해서 그러한 점이 개선되었는가? 구리개 제중원에 근무한 여의사 에바 필드가 남긴 다음의 기록(<미국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제63차 연례보고서> 1900년, 169쪽)을 보면, 심지어 에비슨이 운영권을 이관 받고 5년이 지난 뒤에도 제중원의 위생 환경 문제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선교부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다. 한 여성을 수술하기 위해 높이가 다른 마당을 두 번 지나야 남자 환자들이 훤히 보이는 수술방 문에 이르게 된다. 수술이 끝나면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 높이가 다른 마당을 두 번 지나 깨끗하게 소독된 침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질환으로 또 얼마나 많은 환자가 누웠는지도 모르는 종이 바닥에 누워야 한다." (<제중원>, 박형우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010년, 246쪽에서 재인용)

실제 이전의 이유가 무엇이든, 제중원은 재동 시절을 마감하고 새로운 구리개 시대로 접어든다. 다음 회에서는 제중원을 이전한 시기 등을 검토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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