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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셰프가 된 '막장' 광부…"한국에서는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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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셰프가 된 '막장' 광부…"한국에서는 불가능"

[권은정의 '아우토반 코리안'] 베를린의 요리사 한상모 씨

지난 2009년 'Social Job'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적 기업가의 감동적인 사연을 전해, 독자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돌아왔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독일 베를린에 머물게 된 권 씨는 5일부터 격주 수요일마다 독일의 '특별한 한국인'을 소개하는 새 인터뷰 연재 '권은정의 아우토반 코리안'을 시작합니다.

독일 내에서 한인 교포는 가장 성공적인 교포 사회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가난한 고국을 떠나서 광부, 간호사로 일하던 제1세대, 아버지·어머니의 고생을 보면서 성장해 독일 사회에서 뿌리를 내린 제2세대의 '특별한' 삶을 통해서 그 이유를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은정 씨는 연재를 시작하며 "드라마 같은 독일 한인의 삶을 통해서 한국에서 그 비중이 커지는 외국인 이주자가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또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런 것을 독자들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편집자>

▲ 독일 베를린의 유명한 레스토랑 '란타우스'의 주방장 한상모 씨. ⓒ한민영

정원 마당에 피었던 자목련 꽃잎이 옆 사과나무의 빨간 꽃봉오리에게 봄의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는 갓이며 깻잎 등 고향 채마밭에서 올라옴직한 여린 잎들이 파랗게 돋아나오고 있었다. 관목 울타리를 돌아다니며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베를린의 유명 일류 요리사 한상모 씨. 그의 토요일 정원은 이렇게 포근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한 그는 주말에는 베를린 외곽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 별장으로 쉬러온다. 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원 테이블에 놓인 커피 머신에 필터를 갈아 끼우며 말한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도 3월이었는데 날씨가 이렇게 좋았어요. 쾰른에 내려서 버스로 이동했는데 그때 길가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었지요."

한 씨는 파독 광부로 1976년에 독일에 왔다. 베를린에 산 지 30여 년이 넘는다. 현재 파독 광부의 모임인 베를린 글릭아우프회 회장도 맡고 있다.

환갑이 지난 그가 현역 요리사로 일하는 식당은 베를린 시내에서도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동네, 그루네발트,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레스토랑 '란타우스'이다. 다들 그를 유명한 '셰프'라고 한다 했더니 그가 겸연쩍어하며 말한다.

"그냥 일하는 사람이지요. 하하하. 제가 일하는 이 식당은 고급 레스토랑 4개를 가진 체인인데 그 중에 제일 좋다고 하는 곳이지요. 주변에 대사관 관저가 많아서 특별한 행사 때 마다 대사가 귀빈을 모시고 많이 와요. 여기서만 일한 지 벌써 6년째 되었네요."

란타우스에 전부 8명의 요리사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그는 근무 조건이나 보수 면에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레스토랑 주인이 '요리사 한'을 보물단지처럼 모시고 있다는 말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요리 솜씨를 가진 '요리사 한'은 어떻게 요리를 배웠을까? 광부로 일하러 왔다가 요리 학교라도 다닌 것인가? 아니다, 그는 요리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다. 경력을 굳이 말하자면 주방에서 딱 1년 접시닦이로 일한 게 전부다.

"그때 우리 파독 광부들 계약이 3년이었잖아요. 계약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싶었지요. 여기 남아서 돈을 더 벌어가야겠다, 결심하고 베를린에 왔다가 카스텔이라는 프랑스 식당에 접시닦이로 들어갔지요. 처음 1년간 접시를 닦다가 주인의 눈에 든 거지요. 여기는 요리사가 레스토랑의 주인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다들 밑바닥에서 부터 배워 요리사가 되고 그다음 자신의 식당을 개업하는 거죠. 그 주인인 요리사가 제게 요리 기술을 전수해 주고 바로 주방을 맡기면서 요리사로 시작했지요."

그 식당 카스텔에서 장장 25년간 일했다. 카스텔은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음식이 특별해서 베를린에서 알아주는 식당이었다. 독일 통일 직전까지 베를린에서 유명한 식당들을 몇 개 꼽으면 그 안에 꼭 들었을 정도이다. 당연히 '카스텔 요리사 한상모'라는 이름과 함께 말이다.

석탄을 캐던 광부가 맨손으로 시작해 이름난 요리사가 되었다. 당연히 성공 비결 같은 게 있을 것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프랑스 요리 중에서 몇 가지 특별한 것을 자체적으로 개발했지요. 그래서 식당이 성공한 거죠."

ⓒ한민영
그에게 주방장이 자신 있게 권하는 메뉴를 몇 가지 일러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가지 있어요. 돼지갈비 구이, 이건 벌꿀에다가 독특한 매운 양념을 바른 것인데 손님들이 아주 좋아해서 히트 요리였죠. 지금 우리 레스토랑은 스테이크 전문인데 제가 고기다루는 솜씨가 좀 노련한 편이거든요. 주인이 켐핀스키 호텔 안에 최고급 레스토랑을 개업할 때도 제가 그 요리사들에게 스테이크 요리 시범을 보여주었어요. 그렇게 시범보인 데가 몇 군데 더 있어요. 지금 자랑하는 것 중에는 송아지 간요리가 있는데 똑같은 양념으로 하는데도 손님들이 제가 만든 것만 찾아요. 그 차이란 게 참…. 똑같이 하는 것 같은데 맛이 틀리거든요."

손끝에서 맛이 난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독일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일까? 끈질긴 성실함이 묻어 있는 그의 손 안에 비결이 있을까 궁금했다.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여기 음식을 동양 사람인 내가 만지니 더 특이한 맛이 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 식당의 중요 소스는 전부 제가 만들어요. 중요 소스를 만든다는 것은 요리사들에게는 책임이나 의미가 큰 거죠. 다들 정규 학교를 나온 요리사들인데 그걸 못하고 있어요. 내가 휴가 중일 때 그 요리사들이 소스를 만들어 내면, 손님들이 이집 요리사 언제 바뀌었느냐고 한다네요.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소스 만드는 자리를 내줄 수밖에요. 그들이 못하는 것을 제가 하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마늘을 많이 다루잖아요. 어느 정도, 어느 선에서 한다는 것을 그냥 아는데 여기 사람들은 배운 대로, 교과서에 정해진 대로만 하니까 답답할 때가 있어요. 자신의 육감이나, 손의 느낌이 중요하지요. 일하면서 맛을 알게 되었고 또 응용한 것이지요."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아주 편안하고 자신 있는 표정이 되었다.

"요리가 하나의 예술이다 싶을 때가 있어요. 내가 만든 음식을 접시에 놓고 보면 정말 작품으로 보이죠. 웨이터들이 고맙다고 하면서 멋들어지게 테이블로 들고 나갈 때 기분이 좋지요. 또 싹 비워진 접시, 그것처럼 기분 좋은 게 없어요. 카스텔에서 일할 때는 손님이 빈 접시에서 남긴 것이 뭔지 일일이 체크했어요. 원인을 살피려고요. 독일 사람들은 맛이 없으면 그대로 바로 이야기해줍니다. 체면 차리거나 그런 거 없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 요리 드시고 투정한 손님은 없었어요. 하하하…."

그의 요리를 먹고 전혀 투정을 안 한 손님 중에는 작년에 베를린에 다니러온 고르바초프도 있다. 독일 현직 대통령인 호르스트 쾰러도 가족들을 데리고 이 식당으로 온다.

"뭐, 그분들이 제 요리를 먹으러 일부러 온 것은 아니고요, 그때 제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지요. 하하하."

요리사 한은 정말 겸손한 사람이다. 그의 근무시간은 평일 저녁 디너타임이다. 4시에 시작해서 11시까지 대부분 손님들이 식당에 오는 시간에 주방을 지키게 된다. 프라임 타임에 요리를 내게 된 것은 순전히 손님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 이 레스토랑에는 요리사만 전부 8명이다. 오전오후 각 4명씩 순번제로 근무시간이 돌아가니까 요일이 일정할 수 없다. 처음엔 그도 그랬다.

"손님 중에 자기가 먹던 음식과 차이가 나면, 오늘 요리사가 누구인가 물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는 요리사 한이 있는지 물어보고 제가 있다고 하면 먹고 가고, 아니면 그냥 가버린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자 주인이 제게 일하고 싶은 시간대를 고르라고 하더군요."

레스토랑 주인은 요리사 한이 자신의 식당에 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면서 손님 앞에 자랑스럽게 인사를 시키곤 한단다.

"현재 일하는 조건에 저는 만족하고 있어요. 마음껏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니까 좋고 또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서 좋지요."

ⓒ한민영

한상모 씨는 베를린에서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1960~70년대 파독 광부로 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독일 땅을 밟을 당시 굳은 결심이란 마치 철벽같은 것이었다.

"그때 파독 광부는 분명히 하나의 기회였어요. 제가 그걸 잡은 거지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기적이었어요. 시험 볼 때 20대 1, 전부 벌떼처럼 몰려왔었지요. 저는 턱걸이로 겨우 통과되었어요. 몸무게 58킬로, 키 1미터60센티미터 이상이라야 했는데 제가 키는 괜찮았지만 체중이 항상 미달이었거든요. 그 때 몸무게 늘일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했었죠. 합격! 그 소리 들으니 장원급제한 거 같았어요. 그저 탄 캐러 오는 것일 뿐이었는데 말이지요."

그때 파독 광부로 온 이들 대부분이 체중 검사에서 가장 애를 먹었다는 사실이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 과체중이 아니라 체중 미달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살던 모든 이들의 제일 큰 소원은 한 번 배불리 먹어보는 것, 그게 바로 현실이었다.

한상모 씨는 루르 탄전 2광구 오버하우젠 탄광으로 배치되었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단하나, 돈 버는 것이었잖아요. 저 굉장히 지독하게 했어요. 정말 지독하게 했어요. 첫 탄광 들어가서 일해서 1800마르크 받았는데, 그때 1마르크에 180~90원 했어요. 방세 90마르크 내고 나머지 돈은 거의 몽땅 한국으로 보냈지요. 그때 집사람이 그걸 받아보고 보통 월급쟁이 7~8개월 치라고 하더군요. 6개월 딱 지나니까 1백만 원 적금을 탔다는 소식을 전해왔는데 얼마나 좋던지, 부자 된 거 같았어요! 그때 그 정도면 아주 큰돈이었잖아요."

체격이 작은 한상모 씨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일이 돌아왔는데 탄광에서는 일하는 부분에 따라 급여차이가 많이 났다. 탄을 캐러 들어가야 임금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정을 해서 막장에 들어갔다.

"막장요? 캄캄하지요.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더 어려운 일도 했는데, 기계로 하는 일, 까짓 거 하는 마음으로 일했어요. 시설이 잘되어 있었어요. 낙반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제가 겁을 먹은 것이지 한국에서 노동일 하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노동 강도가 얼마나 셉니까? 여기는 그렇게 일 안해요. 자기의 힘에 맞게 하도록 하지, 그렇게 일 안 시켜요. 노동자들이 잘 살 수 있는 사회지요."

그의 뺨에 난 보조개는 지하 1000미터 막장이 무너지면서 다친 흉터다. 의식을 잃고 지하에서 실려 나온 다음부터 그는 갱도로 내려가는 일이 정말 두렵고 싫었다. 낙반 사고는 그가 결정적으로 다른 직업을 구해야겠다는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독일 온 지 10년 못되었을 때 가족 전부가 옮겨왔다. 삼남매 모두 한창 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교육비가 엄청 들어가야 할 시기였지만 그는 이곳에 살면서 국가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았다고 인정한다.

"국가가 다 해 줬으니까요. 당시 저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사는 집도 그랬고, 아이들 교육도 그랬고…. 독일 사회가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요."

ⓒ한민영
아이들 교육 이야기를 하던 그는 목이 메는 듯했다. 초등학교 마치면서 독일에 온 아들이 말 때문에 학교 생활이나 공부에서 겪는 어려움이 컸다. 그때 학교에서 구청을 통해 가정 교사를 보내준 덕분에 아들은 독일어 과외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공부한 아들이 올 6월이면 의학 박사 학위를 받는 의사가 된다.

"정말 그때는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요. 독일에 왔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그런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배운 것 없고, 배경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제가 스물아홉 살에 와서 오늘날 누리는 이 모든 게 한국에서라면 가능했을까요. 한국에서 막노동자가 이만큼 인간 대접을 받으면서 자식 교육 잘 시킬 수 있었을까요? 여기 사회를 보면서 제가 사회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요리사로 일하는 동안 그의 주방에 접시 닦으러 오는 한국 유학생이 종종 있었다. 베를린 유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신의 사회의식도 점점 높아진 것 같다고 한다.

"그들에게 얻은 게 많지요. 제가 노동자로 왔잖아요. 일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 진보적인 성향의 학생들이 많았어요."

특히 1980년 광주항쟁 실상을 담은 비디오가 독일 TV를 통해 방송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방송 내용을 전부 녹화해서 비디오를 만들어 한국으로 보낸 것만 해도 수십 개 됩니다. 또 미국 등지로도 보냈어요. 그 과정에서 고국의 현실을 생각하게 되고 노동자가 대우받고 사는 사회,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된 거지요."

고국의 노동자들을 위해 한상모 씨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녔다. 당시 베를린에 '노동 교실'이 만들어져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 자연스레 모일 수 있었다. 처음엔 몇 사람 안 되는 힘으로 시작했지만 베를린 시청 앞에서 중고품을 모아서 판매하고, 성탄절 무렵에는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해서 수익금을 한국 노동단체 등으로 보냈다. 꾸준히 활동하는 동안 주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 주었다. 또 그는 유학생, 교포와 함께 '기층민중연합모임'을 만들어 고국의 현실에 동참하고자 애썼다. 아직도 젊었던 그 당시를 한상모 씨는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에 자신을 바칠 용기가 있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회 지회 베를린 글뤽아우프회(회원 122명) 회장 일은 2009년부터 시작했다. (글뤽아우프 : 행운을 빈다는 뜻으로, 광부들 사이에 '지하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지상으로 잘 올라오라'고 주고받던 인사) 노령이 된 동료 회원 중에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생겨난다. 한상모 씨는 동료의 마지막 길을 글뤽아우프회 이름으로 지켜주는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 빈소를 지키고 묘지 운구까지 도맡아 한다. 젊은 날 이국땅에서 힘겨운 탄광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다. 인생에서 탄광에서 일한 시간은 딱 3년. 그들에게 광부로서의 정체성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처음부터 광부였지요. 지금도 우리는 광부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려는 사람은 없어요. 부정할 생각조차 없지요."

ⓒ한민영

한상모 씨에게 수 십 년 겪어본 독일 사람들을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했다.

"철두철미한 사람들이지요. 같이 일해 보면 와, 저렇게 까지 하는구나 싶지요. 저는 독일 사회가 고마워요. 독일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제가 완전 귀국해야한다면 공항에서 독일 땅을 향해 큰절을 할 거라고, 그런 이야기 늘 해요. 내가 천대받으며 어렵게 산 곳은 한국 땅이었고, 노동자로 발길에 채이며 산 데는 한국 사회였지 독일이 아니었거든요. 한국에서라면 노동자가 어떻게 자식을 의사로 만들 수 있겠어요?"

파독 광부로 일하던 시절 그에게 오버하우젠 막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갱도는 막다른 길이 아니라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탄가루가 날리는 어둠속에서 번득이던 그 램프는 한상모, 그의 인생에 대한 기대와 투지, 용기를 지피는 커다란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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