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적용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전제조건이 치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급하더라도 일단 치료계획을 세우고 나서, 발생하는 총 진료비에서 보험회사가 얼마를 부담할지가 결정되면 환자의 본인부담금이 얼마나 되는지를 미리 알려줘야 한다. 또 보험회사마다 매년 상품의 종류와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전산화가 되어 있지만 그것이 바로바로 전산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전화나 문서로 사전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긴 접수절차를 마치고 진료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환자가 이직 등의 사유로 의료보험 상품을 바꾸었다면 그 환자 진료비의 어디까지를 어느 회사에 청구해야 하는지 아주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 미국 민간의료보험 영화를 다큐멘터리 '식코'. ⓒ프레시안 |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우리나라 병의원에서는 환자의 주민번호 하나로 모든 접수가 끝난다. 치과에서 많이 쓰는 건강보험 관련 청구 프로그램 중에 '두 번에' 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클릭 두 번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회사의 선전문구가 반영된 것이다. 마우스만 잘 누르면 한 번에 끝나는 경우도 많은데, 환자가 치과에 들어와서 이름이나 주민번호를 말하면 그것으로 접수는 끝이다. 주민번호에 따라 이 환자가 건강보장제도 내의 어떤 급여대상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미국과 달리, 보험자가 국가 하나인 셈이니 뭐 특별히 어려운 선별절차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곧바로 진료실에서 검진을 하고 치료계획을 세울 수 있다.
환자의 질환과 치료행위가 건강보험 혜택이 되는지 여부는 거의 모든 치과의사와 치과위생사들이 숙지하고 있는데, 이는 매년 발간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안내책자에 모두 안내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큰 틀과 원칙에서 변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자를 보면 건강보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질환과 치료행위, 약제와 재료가 모두 수록되어 있고, 진료비 청구에 필요한 진료행위의 절차까지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이 100 페이지 정도 되고, 매년 큰 수정 없이 발간되기 때문에 노력이 별로 필요 없다. 필자가 있는 병원에서도 모든 접수와 보험청구 업무는 한 명의 치과위생사가 담당하고 있는데, 이 직원이 보험 관련 업무에 할애하는 시간은 하루 20~30분 정도다. 이 업무를 맡은 지 아직 얼마 안 돼 익숙하지 않음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보험급여 혜택 여부를 가지고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병의원을 종종거리며 오가는 일은 거의 없다. 혹시나 내가 약속받은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 상품에 하자가 있을까 맘 졸이는 일도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민간의료보험 체계와는 정반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동네의 조그마한 의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나라 전체로 보면 천 개가 넘는 보험회사가 수만 개의 상품을 팔고, 수많은 국민들과 회사들이 각자 알아서 보험회사에 가입해 있다. 또한, 의료인들과 의료기관들도 이들 보험회사들과 각각 계약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의 민간보험 주도 의료제도 하에서 미국인들은 유럽 국가들보다 2~3배, 우리나라보다 5배나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고도 건강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인 평균수명, 영아사망률은 OECD 평균에도 못 미치고,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못하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매년 강화되고 있다.
미국인들이 최고의 가치, 절대 선(善)으로 여기는 '개인의 자유 선택권'은 의료보장 분야에서도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가 미국 국민들의 의료이용과 건강보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국민들은 편의성과 효율성이 검증된 보편적인 의료보장인 '전국민 의료보험'이라는 선택지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정답만 제외하고 답을 써야 하는 시험과 같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의료비와 최하위권의 건강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뒤늦게 이를 개혁하고자 나선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법안도 전문가가 아니면 그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고,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무엇이 개혁이라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미국의 자본주도 민간의료체계는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제도이기에 집념에 가득 찬 정권 차원의 개혁의지로도 손쓰기 어려운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보다 훨씬 적은 의료비로 높은 건강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건강보험제도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건강보험이 필요 없는 극소수 부유층에게도 똑같이 보험혜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못마땅해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대다수의 국민들의 건강을 지키고 나라 전체적으로는 비용 대비 성과가 꽤 좋은 효율적인 제도임에 분명하다. 이는 행정관리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미국의 경우 줄줄 새는 의료비가 결국에는 보험회사 경영진의 성과급으로 흘러가고 직원들의 파티에 쓰여도 그 회사의 주주가 아닌 이상 하등의 발언권이 없으나, 우리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의 복리후생비까지도 감시의 대상이 되는 공적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건강보험제도의 개혁을 위한 노력도 국민적 공감대와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훨씬 간결한 것이다. 이렇듯 보편적 복지는 복지의 효과는 물론이요, 관리의 측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과적이고 우월하다.
의료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보편적 복지가 필요한 교육 분야에서 최근 무상급식 이야기가 뜨겁다. 초등학생인 아이의 학교 운영위원인 아내에게 얼마 전에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생업을 팽개치고 달려간 평일 낮의 학교운영위원회 회의에서 회의시간의 절반 이상을 급식비 지원 대상자를 선정하는 데 보내더란다. 법적 의무지원 대상자 외에 담임 추천을 통해서 대상자를 선정하기도 하는데, 각 학급의 선생님들이 추천한 학생들에 대해서 과연 이 학생의 '가난'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서류가 있는지를 검토하고, 혹시나 가난이 더 잘 증명된 아이들은 없는지를 살펴서 공정하고 투명하게 그들의 '가난'을 판단해주는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학교의 운영에 관해 훨씬 발전적인 구상과 논의에 쓰여야할 역량들이 어떤 학생에게 월 5만 원 가량의 급식비를 지원할 것인가, 누가 더 가난하고 불쌍한가를 판단하고 선별하는 일에 대부분 매몰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무상급식과 관련해서 많은 논의들이 일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에 대한 논쟁, 교육의 본질적 내용에 관한 논쟁이 있고, 일부 정치인과 보수신문들의 좌파니 포퓰리즘이니 하는 철없는 소리도 있지만,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떤 복지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고민을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여 반갑다. 선별적, 시혜적으로 행해지는 제도가 얼마나 낭비적이고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불완전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당장 미국 의료보험의 사례가 엄청난 실패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싶다. 선별주의 일색의 프로그램들만이 아니라 보편주의 프로그램도 선택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정답만 빼고 모든 답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시험지를 더 이상 들이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민들 또한 어처구니없는 시험지를 받아든다면 시험 출제위원을 바꿔버려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는 그럴 권리와 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번 지방선거가 그 좋은 기회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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