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처럼 물증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와중에 보수언론들은 북한의 공격에 의한 어뢰 피격 가능성에 대한 심증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 동안 공식적으로는 중립자적 모습을 취했던 이명박 대통령마저 '대세'에 몸을 맡기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북한 공격'의 심증만 남긴 채 정확한 원인 규명은 되지 않는 시나리오는 현 정권과 보수 언론에는 최상의 결과다.
'원인 미상' 기자회견, "어뢰 공격" 보수 언론
생존자 기자회견에서 밝혀진 사실은 결국 여지껏 제기된 어떤 의혹도 완벽하게 천안함 침몰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암초에 의한 충돌 가능성은 소리가 달라 떨어진다. 내부 폭발 가능성도 생존자들은 "정비를 충실히 했다"며 부인했다.
외부 피격설 또한 화약냄새가 없었고, 화재도 없었으며, 화재로 인한 큰 부상자가 없었고, 물기둥을 봤다는 증언도 없음에 따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생존한 최원일 함장마저 "사고 원인은 나도 궁금하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함선 인양 후 실시되는 정밀조사에서 새로운 물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천안함 침몰의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군이 천안함 인양 후에도 침몰 단면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원인 조사와 진상 규명 전반의 과정에 가림막을 칠 가능성이 높다. 진실이 갖은 억측과 설의 갑론을박 속에 가둬지는 게 군에게는 나쁘지 않다. 우리측 '실수'이건 북한의 '도발'이건, 명쾌한 결론은 그에 따른 감당하기 어려운 후폭풍을 몰고오기 때문이다.
진실과는 별개로, 여론은 북한 도발로 기울어지는 쪽이 군과 정권에 이롭다. 생존자 기자회견을 보도한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북한의 공격에 의한 피격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몰이를 강화했다. 8일 <조선일보>는 1면 톱에 올린 "쿵…쾅… 1~2초 간격 두 번 폭발음"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어뢰가 만든) 버블제트에 의한 침몰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배에 두 차례 큰 충격이 왔다"는 생존자 증언이 어뢰(또는 기뢰)가 수중에서 폭발했음을 간접 증명한다는 이유다. 생존자들이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으나 <조선일보>는 "당시 외부 견시 근무를 서던 장병 2명은 기본적으로 전방을 주시한다"는 생존자 김덕령 소령의 말을 인용해 반박했다.
순간적으로 배가 기운 긴급한 상황이라 견시근무자들이 최대 150여m까지 치솟는다는 물기둥이 바로 뒤에서 생겼음에도 못 봤다는 말이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이 신문은 "생존자들이 물과 접촉하지 않아 화약 냄새를 맡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어뢰충격설에 힘이 실린다"고 전했다. 이번 기자회견을 계기로 '북한 연루설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다.
▲북풍을 매개로 군과 여권은 동반자가 됐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달 30일 오후 천안함 수색 진행 상황 점검차 사고 해상에 있는 독도함을 찾았다. ⓒ청와대 제공 |
'원인 미상' 나쁘지 않다?
기자회견 후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적당하게 원인을 조사해서 발표하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인정 안 할지도 모른다"며 "누구도 조사결과를 부인할 수 없도록 조사하고 정부는 단호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죄를 지은 사람들"이란 표현을 써가며 '미지의 가해자'를 지목한 점, "단호한 조치"를 언급함으로써 '액션'을 예고한 점 등은 나름대로 차분하고 엄정했던 그간의 태도와는 다소 달라진 것이었다. <조선일보>로부터 대통령이 너무 G20 정상회의에만 사활을 거는 게 아니냐고 지청구를 받았던 때의 이 대통령이 아니다.
대통령의 그러한 발언은 여론이 북한 연루설에 심증을 굳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사고의 원인이 군 쪽에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을 경우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최종 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란 강한 표현을 쓰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8일자 1면 톱기사로 북한 연계설을 쓰고 그 밑에 대통령의 발언을 배치한 것은 그 말을 북한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겠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이런 상황 전개가 어디로 귀결될지는 사고 원인이 함선 인양 후에야 최종 발표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함선 인양이 한 달 정도 걸리면 최종 발표 시기도 그만큼 늦어지는데, 그 기간이면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북한 연루설의 심증이 보수 진영에 단단히 뿌리박히기 충분하다.
이는 보수세력을 결집시킴으로써 지방선거는 물론 이명박 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고수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북한이 했다는 물증이 남지 않는 이상 북한에 대한 액션을 하지 않는 대신, 심증만 퍼뜨린다면 악화된 대북 여론을 발판 삼아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까지, 천안함 사건의 전개는 군과 현 정부의 책임을 최소화 하는 시나리오에 맞춰 흘러가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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