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학교법 재개정 없이는 다른 현안 처리도 협조 못한다"는 한나라당의 방침으로 인해 27일 법사위를 비롯한 모든 국회 상임위의 입법 활동이 '올 스톱'됐다. 사학법 재개정을 둘러싼 여야 간의 협상도 사실상 결렬돼 4월 임시국회의 막판 공전이 불가피해졌다.
김한길-이재오 "'등'자 추가 논란"
무조건적인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권의 비난은 따갑다. 한나라당의 '고집'으로 인해 독도 문제를 다루는 동북아역사재단법, 론스타 과세 문제와 연계된 국제조세조정법, 금산법, 3.30부동산 대책 후속법, 통합성폭력법 등 여야가 이미 처리키로 합의한 주요 법안들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학교운영위원회와 대학평의회에 부여된 개방형 이사 추천권한을 동창회와 종교재단 등에 부여 ▲중, 고교의 경우 개방형이사 도입의 자율화 등을 요구하며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학에는 개방형이사제를 허용하되 재단 입맛에 맞는 이사를 고를 수 있도록 하고, 중고교는 사실상 도입되기 힘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재오 원내대표는 27일 '개방형이사를 학교운영위원회와 대학평의회가 추천한다'는 규정을 '학교운영위원회와 대학평의회 등이 추천한다'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등'자가 하나 추가된 것이지만 재단의 입김이 들어갈 여지를 크게 열어둔 것이나 다름없다.
진수희 공보부대표는 "우리 요구가 하나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남은 국회일정에 참여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대해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이 '등'자 하나 넣는데 뭐가 어렵냐고 말하지만 '독도 주권은 대한민국 등에 있다'고 한다고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절대 아니다"고 반박했다.
김 대표는 또한 "현행 사학법은 7월부터 시행될 예정으로 아직 시작도 안 해 본 법인데 한나라당이 또 개정안을 내놓고 억지를 쓰고 있다"면서 "특히 개방형 이사제는 사학법의 근간이자 핵심으로 이에 대한 후퇴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사학법 무효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원내대표는 이와 함께 "오늘 중으로 정동영, 김한길, 박근혜, 이재오 간 4자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4자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진수희 공보부대표는 "박 대표는 이재오 원내대표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황"이라면서 "양당 원내대표-정책위의장 4자 회담이면 몰라도 대표가 나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우리 인식이고 이재오 원내대표도 같은 생각"이라고 사실상 거절의사를 밝혔다.
우리당 내부논란도 가열
한편 우리당도 한나라당 주장의 수용 정도를 두고 자중지란을 노출했다. 핵심인 '개방형이사제'를 손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원칙론'과 다른 주요 법안 처리를 위해선 일정부분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협상론'의 대립이었다.
'협상론'은 당초 김한길 원내대표가 ▲개방형 이사 자격을 정관에 규정하고 ▲시행령에 규정된 개방형 이사에 대한 규정 가운데 '건학이념에 맞는 자'란 대목을 사학법에 포함시키는 것 등을 골자로 한 양보안을 내놓으면서 촉발됐다.
여기에 강봉균 정책위 의장이 ▲이사장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의 학교장 취임금지 조항 삭제 ▲초중고교 개방형 이사 자격의 정관 규정 허용 ▲학교법인 이사의 겸직금지조항 삭제 ▲감사자격 요건 완화 등을 담은 대폭적 양보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봉주 의원 등 교육위 의원들을 중심으로 "지금 사학법조차 누더기 신세인데 더 이상 어떻게 양보한다는 말이냐"는 반발이 터져 나왔고, 다수 의원들도 "그동안 사학법 개정을 최고 성과로 내세워 왔는데 이게 뭐냐"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논란이 커지면서 대폭적인 양보안을 제안했던 강봉균 정책위의장도 "사학재단의 투명성에 관련된 근본적 문제를 고쳐달라면서 법안을 보류하라는 한나라당의 자세는 온당치 않다"고 말해 일단 당내 분란은 봉합됐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등은 "그렇지 않아도 누더기 법안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고, 열린우리당은 사학법이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라고까지 말해 왔으면서 지금 와서 재개정을 운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4자 협의를 제안한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사학법 쓰나미 덕에 뒷전으로 밀린 비정규법
민노당이 여당의 강경대응을 재촉하는 배경에는 사학법 자체가 훼손될 것에 대한 우려와 함께 사학법 대립 국면으로 인해 비정규직 관련법 처리도 덩달아 미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그동안 비정규직 관련법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필요한 만큼 처리를 늦출 것을 주장해왔다.
사학법 갈등으로 인한 국회 공전 상태는 마땅히 비판하지만,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관련법 처리가 연기될 가능성이 커진 점에는 내심 싫지 않은 기색이라는 것이다.
민노당의 한 핵심당직자는 "국회 공전으로 인해 비정규직 관련법 처리가 미뤄진 것에 대해 우리가 나서서 뭐라 하긴 힘들다"면서도 "어떻든 이번 국회는 (비정규법이 법사위에 계류된 채로) 넘어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는 "우리당이 한나라당과 사학법 후퇴안에 합의하고 그 여세를 몰아 비정규법을 처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진짜 후폭풍이 거세질 텐데 선거을 앞두고 그런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고 풀이했다.
그의 지적대로 4월 회기 이후에는 바로 후반기 원구성 문제가 기다리고 있어 비정규직 관련법 처리는 상당기간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우리가 반대하면 아무 것도 처리할 수 없다"는 한나라당의 실력행사 앞에 우리당은 발만 동동 구르며 '원칙이냐 타협이냐'를 둘러싼 내부논란이 가열됐고, 한발 빠진 민노당은 '비정규법 연기'라는 어부지리를 노리는 국면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4월 국회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지만 현재로선 별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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