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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탈을 쓴 '망령'이 출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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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탈을 쓴 '망령'이 출몰하고 있다"

[화제의 책] <리얼 진보 : 19개 진보 프레임으로 보는 진짜 세상>

한국에서 진보를 상징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노무현, 유시민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 지난 5년간 대통령, 장관으로서 그들이 구상, 실천한 실제 정책에 '진보' 딱지를 붙이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착시 현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실패한 대통령의 퇴임 후 성찰을 모아 놓은 <진보의 미래>(노무현 지음, 동녘 펴냄)는 한 가지 답을 준다. 그의 비극적인 최후와 겹치면서 주목을 받았던 이 책에는 '진보'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한 정치인의 회한이 서려 있다. 대중은 추모 열기 속에서 이런 회한과 공명하면서 '현실에 없었던' 하지만 '가지고 싶었던' 진보 정치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서적 '추모'가 역사적 '평가'를 대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구나 '현실에 없었던' 진보 정치인 노무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세태를 염두에 두면 이런 상황은 더욱더 우려스럽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좌파' 지식인 열아홉 명이 <리얼 진보>(강수돌 외 18인 지음, 레디앙 펴냄)를 서둘러 펴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짜' 전쟁을 외면한 노무현

▲ <리얼 진보 : 19개 진보 프레임으로 보는 진짜 세상>(강수돌 외 18인 지음, 레디앙 펴냄). ⓒ프레시안
<리얼 진보>는 표지에 써놓았듯이 "노무현이 실패한 곳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곳곳에서 노무현과 그 후예들이 '진보'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이 보인다. 노무현과 그 후예들의 지지자들이 보기에는 불편할지 모르지만, 이런 반발은 대부분 정확하다. 예를 들면 이대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그렇다.

"노무현 정부를 진보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로 고통 받았던 서민들을 희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적인 개혁을 포기하고, 그로 인한 실망이 깊어져 보수 헤게모니가 확산되게 기여해 놓고 퇴임 이후 진보주의를 연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서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대근)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리얼 진보>가 내놓는 답은 '자본과의 대결'이다. 노무현과 그 후예는 '분배', '복지'를 얘기하면서도, '자본과의 대결'은 회피한다. '진보'이기를 갈망했던 노무현이 실패한 이유도, 또 그를 진보로 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진짜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이른바 진보와 개혁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이다. 이른바 민주당이든 노무현 지지층에서 갈려 나온 다양한 정파든, 자본주의를 침범할 수 없는 질서로 긍정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당이든 한나라당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김상봉)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이 관철되는 그 영역, 즉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강조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역시 노무현이 강조한) 분배와 복지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전쟁의 진짜 이름은 '자본과의 대결'이다. 그러나 '대결'은 어디에 있었던가?" (장석준)

불의 시대, 대위기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런 '자본과의 대결'을 강조하는 <리얼 진보>의 글을 읽으면서 혀를 찰 이들이 많으리라. 굳이 자신을 보수로 규정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노무현과 그 후예를 진짜 진보로 보는 이들까지 한목소리로 이렇게 지청구를 퍼부을 것이다. '그렇게 꿈속에서 사니 항상 그 모양 그 꼴이지!' <리얼 진보>의 대답을 들어보자.

"오늘날 누구도 현재의 자본주의를 일거에 외부로부터 즉 한 번의 혁명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사회를 인본주의적 원리에 따라 재건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과제는 자본의 절대적 권력을 해체하여 그것을 노동하는 인간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다." (김상봉)

"(보수의 목표가 불평등한 현실을 현상 유지하는 것이라면) 좌파는 이 세상에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평등과 평화와 같은) 가치들을 이 세상에 이식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미 신석기 말기부터 불평등해지고 전쟁을 다반사로 만들기 시작한 이 세상을 '아주 근본적으로' 바꾸어 보자는 게 좌파의 궁극적 이상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분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이겠지만, 기독교가 쇠퇴한 유럽 같으면, '거대한 꿈'이 남아 있는 게 좌파 말고 또 있나? 이 꿈은 신석기 후기 이후의 인류사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기에 내 살아생전에 이루어질 리도 없을 것이다. 한데, 이와 같은 꿈이 있기에 원래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잠깐의 봄 꿈 같은 인생에 그 어떤 '뜻'이 부여되는 것이다. (박노자)


이런 답에도 고개를 흔드는 이들이라면 시대의 변화를 주목하자. 노무현이 뒤늦게 포착했듯이 2008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세상이 변했다. 그는 소박하게 세상이 좋아지리라고, 즉 '보수의 시대'에서 '진보의 시대'로 바뀌리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우리 앞에는 경제 위기, 전쟁 위협, 환경 재앙 등 온갖 문제가 산적했다. 살아남으려면 어쨌든 변해야 하는 것이다.

"노무현의 시대 예감은 절반 정도만 맞았다. '보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진단은 정확하다. 하지만 이를 대신해서 '진보의 시대'가 동트고 있는 것 아니냐는 기대에는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막 발을 내딛으려 하는 미지의 시간대는 '보수'도, '진보'도 용광로 속에서 다시 제련되어야 하는 '불의 시대', 대위기의 시대다." (장석준)

"무능한 진보여, 리더를 키워라!"

물론, <리얼 진보>의 시선이 외부로만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은 자신을 진짜 진보라 칭하는 이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 정당의 한계를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박상훈의 '강한 리더십'에 대한 강조는 진보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경청해야 할 지적이다. 그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보자.

"정당은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어떤 정당은 자신이 대표하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위계적인 조직 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이념을 중시하며 집단 지도 체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가능한 민주적 원리가 당내에서 발전해야겠지만 그것이 조직으로서 정당 내지 리더십의 발전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물신화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한 것이며, 거꾸로 민중이 그러한 이념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당 역시 추상화된 원리나 가치에 맹목적으로 종속되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권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붕당이 지배하게 된다.

(…) 한국의 진보 정당은 보수 정당과 달리 '인치의 과잉'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대중의 열망을 응집시킬 수 있는 '인치의 부족' 즉, 리더의 부재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 브란트의 독일 사회민주당, 맥도널드의 영국노동당, 미테랑의 프랑스 사회당, 베를링구에르의 이탈리아 공산당을 (보라).

먼저 리더가 조직을 통치할 수 있게 한 뒤에 그 결과에 사후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가는 것 없이 어느 조직도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야말로 리더가 조직을 통치하기도 전에 과도한 견제부터 하면서 조직을 통치 불능으로 만들어 온 한국 사회의 진보파에게 가장 부족한 일이다." (박상훈)


진짜 진보의 '공백들'

<리얼 진보>를 읽는 또 다른 방법은, 이 책의 공백을 살피는 일이다. 이 책에 실린 공백이야말로 한국의 진짜 진보 세력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석준은 '대위기의 시대'를 앞둔 상황에서, 진보는 경제 성장, 과학기술과 같은 근대의 성취에 의문을 던질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의문을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라고 곡해해서는 안 된다. (경제 성장, 기술 발전 등 근대의 성취를)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게 아니다. 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다시금 인간이 주인이 되어 근대화의 질주를 중단시킬 수도 있고, 그 방향을 바꿀 수도 있어야 한다.

근대의 성취를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가령 화석 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 대신 재생 가능 에너지 중심의 새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것.) 문명의 새 방향을 설계하기 위해서 근대의 삶의 요소들(가령 도시 문명)과 그 이전의 삶의 요소들(가령 농촌 공동체)을 자유롭게 서로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장석준)


그러나 책 전체에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아주 제한적이다. 한재각이 지적하듯이 이 책에서 "환경, 생태 논의는 다른 논의들과 분리된 채 고립된 '섬'처럼 간주되고" 있어서, 마치 "이명박 정부가 자신의 개발 정치를 녹색으로 분칠해서 해결하려 하듯이, '진보 진영'도 욕먹지 않을 정도의 녹색 치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심을 부른다.

과학기술에 대한 고민이 아예 빠진 것도 아쉽다. 마르크스가 정확히 간파했듯이, 자본은 끊임없는 '혁신'을 추동한다. 노무현과 그 후예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자본에 투항하면서 내세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진짜 진보는 자본이 강요하는 혁신과는 다른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바로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다.

노무현의 그늘이 짙다

<리얼 진보>는 2010년 현재 한국 진보의 수준을 파악하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든, 견제하기 위해서든 말이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씁쓸했던 대목이 있다. 이 책이 시종 '가짜' 진보 정치인이라고 겨냥했던 노무현과 그 후예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 기사도 마찬가지고!)

이것은 지금 한국의 '리얼 진보'가 처한 어려운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왜 그들이 한목소리로 수십 년간 반복된 다음과 같은 목소리("다시 한 번 과거의 '비판적 지지'의 늪에 빠지는 것보다, 미래를 지향해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이 이제 '노무현'의 탈을 쓰고 출몰하고 있다. 노무현의 그늘이 너무나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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