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제국이 성립하는 것은 기술 조건의 불균형으로 인해 중요한 기술의 수혜 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규모에 따르는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라고 한다. 예컨대 어느 시점에서 철기 사용 기술을 독점적으로 획득한 집단이 생산력과 전투력의 우위를 근거로 거대한 권력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생산 기술과 전쟁 기술의 격차가 이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이고, 더 생각해 보면 조직 기술도 비슷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기술이란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 획기적인 기술 발전이 처음에는 좁은 범위의 집단에게 독점적 혜택을 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부로 퍼져나가 '기술의 특혜'가 사라진다. 그러면 권력 집단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제국은 와해되어 분열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러다가 어느 부문에서 다시 획기적 기술 발전이 일어나면 그 수혜 집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제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안에서 권력 구조의 변동에도 이와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조선 초기 강력한 왕권이 세워질 때는 상당히 좁은 범위의 집단이 성리학적 조직 기술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 집단이 왕을 중심으로 관료층을 형성해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지방의 토호 세력을 억눌렀다. 이 단계에서는 관료 집단의 권력과 위신이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관료층을 지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지방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 잡고 관료층과 균질화된 양반층이 널리 형성되면서 거대한 왕권의 규모에 따르는 비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절대군주는 권한 위임을 적게 하고 많은 신하들을 손수 통제해야 하는데, 신하들을 압도할 이데올로기도 새로 없을 뿐 아니라 상벌로 농락할 자원도 모자라게 되었다. 세종이 초인적 중노동에 시달린 것은 미비한 여건을 몸으로 때워야 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태종처럼 마음대로 권병을 휘두를 수 있던 상황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문종 때는 이 부담 때문에 군신 공치(共治)의 길이 모색된 것이고, 세조는 이에 반발해 절대왕권을 지키려 한 것이었다. 나는 세조의 찬탈이 조선의 왕권을 크게 손상시킨 일이라 생각하지만, 찬탈을 하지 않았을 경우 더 좋은 결과를 보았으리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왕권의 퇴화는 어차피 불가피한 일이었고, 찬탈은 차악의 선택이었다는 기본 인식이다.
세조의 찬탈은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에 균열을 일으켰다.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에야 사육신의 복권으로 최소한의 땜질이라도 이뤄지게 되는 깊은 균열이었다. 조정이 내세우는 명분과 별개의 의리를 사림에서 추구하는 풍조도 이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년)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의 단초가 되면서 사림은 왕권과 별도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림의 권위를 확고히 세운 인물이 조광조(1482~1519)였다. 그가 도학(道學)을 내세운 것은 사장(詞章) 단계에 머물러 있던 성리학적 질서의 업그레이딩 시도라 할 수 있다. 그가 도학 정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왕권의 쇄신을 꾀하다가 기묘사화로 좌절된 이후 그의 뒤를 잇는 정치 이념 탐구는 재야 사림의 당당한 과제가 되었다.
선조(1567~1608) 초 조광조의 신원(伸寃) 이후 조선은 성리학 연구의 전성기를 맞았다. 재야 학자들의 정치 이념 탐구가 허용을 넘어 권장되는 분위기 덕분이었다. 이 시기 사림은 조광조의 자세를 본받아 왕권 쇄신을 보좌하는 데 연구 목적을 두었다. 학문적 권위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스스로 정치적 권력을 지향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성리학 도입 때부터 중시된 주자학에 큰 비중이 있었지만 성리학의 다른 분야도 꽤 고르게 연구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1592~98), 광해군 축출(1623, "인조 반정"이란 말은 쓰고 싶지 않다.)과 두 차례 호란(1627, 1636)을 겪으며 왕과 조정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사림의 권위가 크게 올라가면서 권력화 추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숙종(1674~1720) 즉위 무렵에는 송시열(1607~89)을 중심으로 사림의 일각이 권력화돼 있는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숙종은 즉위 직후 선왕인 현종(1659~74)의 능지(陵誌)를 송시열에게 쓰도록 명했다. 송시열은 현종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현종은 즉위하던 해의 기해예송에서 송시열의 주장에 넘어갔던 것을 분하게 여겨 15년 후 갑인예송으로 반전을 꾀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송시열이 군주로서 현종의 자질을 멸시해서 그의 조정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런데 숙종이 그에게 굳이 현종의 능지를 맡기려 한 것은 그가 당대 사림의 태두이자 예학의 대가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기해예송에 관한 그의 입장을 추궁하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이 몇 차례 사양하자 능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겼지만, 능지 다음으로 중요한 행장(行狀) 짓는 일을 송시열의 제자인 대제학 이단하에게 맡기고 그 내용을 엄격히 따진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예송의 핵심 쟁점은 효종을 인조의 적자(嫡子)로 보느냐 여부에 있었다. 소현세자가 세자 신분을 가진 채로 죽었기 때문에 계승의 원칙은 그 자손에게로 가야 하는 것인데 인조가 억지로 효종을 세자로 세운 데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죽었을 때 적자의 자격으로 복상해야 한다는 주장은 순조롭게 재위한 임금인 만큼 사소한 흠결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에 반대했고, 그의 주장이 관철된 데는 그 추종자들의 세력이 컸던 까닭도 있었다.
효종을 적자로 인정하지 않은 기해예송의 결과는 그 자손인 현종과 숙종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특히 왕위에 앉자마자 눈 뜨고 불리한 결정을 감수해야 했던 현종은 매우 분했을 것이다. 효종이 송시열을 파격적으로 우대한 사실에 비춰보면 배신감까지 느꼈을 것이다. 송시열이 현종의 조정에 들어오기 꺼린 데는 이런 앙금을 의식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현종이 치밀한 준비로 갑인예송을 통해 기해예송을 뒤집고 그 책임으로 당시 조정 안에 있었던 영의정 김수흥을 귀양 보내고 책임을 더욱 확대해 나가려던 참에 갑자기 죽었다. 7월 6일에 예송이 시작되었는데 8월 10일에 왕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현종의 예송 준비에는 14세의 세자도 참여했었던지, 즉위하자마자 기해예송 추궁을 다시 시작했다.
이단하가 작성한 행장에서 김수흥 처벌 이유를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것을 숙종은 몇 번씩 명확하게 고쳐오라고 요구했다. 결국 기해년에 예송을 이끈 인물로 송시열의 이름이 현종 행장에 드러나게 되고, 마지막으로 "송시열이 인용한 예법(宋時烈所引禮)"이란 구절을 "송시열이 잘못 인용한 예법(宋時烈誤引禮)"으로 고치는 단계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단하가 올린 상소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신은 송시열에게 사제지의가 있는 몸입니다. 행장을 고쳐 지으며 엄하신 명령 때문에 그분의 함자를 이미 드러냈고, 가르치심에 따라 함자 밑에 오(誤)자를 넣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된 도리로 마땅히 인피(引避)해서 다른 사람에게 명하시도록 해야 할 일이었는데,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습니다."
이 말에 숙종이 화내며 이단하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에서 추방했다.
"사표(師表)가 있음만을 알고 군명(君命)이 있음을 알지 못하다니, 신하로서 임금 섬기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 이번에는 장희빈이 아니라 최숙빈이다. 숙종의 후궁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새 드라마 <동이>에는 숙종대의 당쟁이 어떤 각도로 배경에 깔릴까? 영특하고 기운넘치는 임금이었지만 '무위(無爲)'의 의미를 너무나 몰랐던 것이 문제였을까? 후궁까지 휩쓴 치열한 당쟁은 그의 재위 중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프레시안 |
공자도 맹자도 도(道)를 펼치고 싶었다. 좋은 정치를 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기네가 좋은 정치의 내용물을 내놓을 수 있더라도, 그것이 행해지려면 그릇이 필요했다. 그릇 노릇을 해줄 임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 제대로 하게 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임금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의 조선에는 임금이라는 그릇을 통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는 풍조가 사림에 만연해 있었다. 훌륭한 인재가 조정에 부름 받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정에서 높은 자리를 줘도 도도하게 뿌리치는 '큰 선비'의 기개를 떠받드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현종 연간에 50~60대 나이의 송시열이 대표적인 시범을 보였다. 재야 사림에 있다 해서 허울 좋은 권위만 높은 것이 아니었다. 붕당과 사제 관계를 통해 현직에 있는 것 못지않은 권력도 운영할 수 있었다.
선조 이전의 당쟁은 신하들 사이의 경쟁이고, 왕은 심판을 맡았다. 아직까지는 모든 위복(威福)이 왕으로부터 말미암고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대북 일파에게 너무 권력을 편중시키고 그 결과 왕위에서 축출당하면서는 왕도 선수로 뛰게 된 셈이다. 이 파워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는 왕을 적대하는 작전까지도 구사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작전을 실제로 구사할 수 있던 것은 압도적 전력을 가진 서인-노론 세력 뿐이었지만.
물론 왕에게는 다른 선수들이 못 가진 큰 무기가 있었다. 숙종과 노론 세력 사이의 투쟁은 도끼 가진 사람과 바늘 가진 사람의 싸움과 같은 양상이었다. 도끼를 휘두르기도 했다. 노론을 몽땅 조정에서 내쫓고 83세의 송시열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도끼 한 자루로 궁극적 승리를 확보할 길은 없었다.
지배 집단이 권력 투쟁에 매몰되면서 정치와 학문이 모두 선명성 경쟁에 매달리게 되었다. 숙종 초년 청남과 탁남의 분화, 그에 뒤이은 노론과 소론의 분화는 이념보다 정략에 의거한 것이었다. 학문에서도 실용적 경세론보다 시비에 집착하는 정통론이 일세를 풍미했다. 당파에서 찍어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은 임금의 형벌 못지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당파의 추대는 임금의 지우 못지않은 명예와 신분 보장을 가져왔다. 당쟁 완화를 제창하려면 자기 당파에서 사문난적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현실 정책에 힘을 쏟는 사람은 당파에서 충성심을 인정받아 추대 받을 기회를 가지기 힘들었다.
숙종의 행적을 보면 보통 넘는 능력의 소유자였고, 보통 넘는 노력을 기울인 임금 같다. 그런데도 정치를 바로잡는 데 성공하기는커녕 사태를 악화시켜 놓기만 한 것은 문제의 성격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외투를 벗기겠다고 바람으로 몰아치기만 하면 오히려 옷깃을 더 꽁꽁 여미게 되는 이치 아니겠는가. 영조가 노론에게 정권을 맡겨놓고 서서히 당쟁의 양상을 바꿔 나가는 소위 완론(緩論) 탕평을 꾀한 것은 도끼질 몇 차례로 통쾌하게 해결될 사태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은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두 주일 더 화요일 게재를 거르겠습니다. 다음 회를 3월 26일 올리고, 그 다음 회를 4월 2일, 그 이후로는 다시 화, 금 연재로 돌아가겠습니다.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들께 미안합니다. 숨을 잘 고루어 더 좋은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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