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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알렌 없었다면 <제중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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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알렌 없었다면 <제중원>도 없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6] 알렌과 갑신정변

한국 근대사는 수많은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지만(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그 가운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갑신쿠데타(갑신정변)이다.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 "삼일천하"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으로 조선의 국내외적 정치 지형도가 크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개인들의 삶에도 영욕과 희비가 교차했다.

가장 크게 운명이 바뀐 사람들은 급진 개화파에 의해 목숨을 잃은 민영목, 민태호, 윤태준, 이조연, 조영하, 한규직 등 수구파/온건 개화파 거물 정객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주목을 끌어온 사람은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다. 1874년에 친아들과 함께 암살당한 민승호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비의 친조카가 된 민영익은 불과 스물네 살이지만 실력과 연줄을 겸비해 이미 여러 요직을 지냈고 앞으로도 친청(親淸) 세력을 이끌 재목으로 촉망받고 있었다.

한때 김옥균(金玉均·1851~1894) 등과 노선이 비슷했지만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그들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민영익은 그런 만큼 급진파들의 제거 대상 1호로 떠올랐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청을 축하하는 만찬 자리를 정적 숙청의 기회로 삼았던 급진파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그 자리에서는 민영익 한 사람에게만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 정사(正使) 민영익(오른쪽)과 부사(副使) 홍영식(왼쪽). 1883년 가을 보빙사(報聘使) 일행의 정·부 책임자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 방미 사절단이었다. ⓒ프레시안
그날 밤 그 자리의 또 다른 주인공은 홍영식(洪英植·1855~1884)이었다. 우정국 총판으로 만찬의 호스트인 홍영식은 비록 사흘 동안이지만 쿠데타 세력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우의정을 지낸다. 중상을 입고 "확인 자살(刺殺)" 직전에 몰린 민영익을 구한 것은 홍영식이었다. 이념과 노선은 갈렸지만 짧지 않은 우정 때문이었는지, 어차피 죽을 상태라 더 이상 공격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홍영식이 자객을 제지했던 것이다.

세 번째 등장 인물은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1848~1901)이다. 1882년 리훙장(李鴻章)의 천거로 조선에 온 그는 사건 당시 외아문 협판 겸 총세무사였다. 직책으로든 실권으로든 그 자리에 당연히 참석해야 했던 묄렌도르프가 "만약" 참석하지 않았다면 민영익의 운명은 바뀌었을지 모른다. 리훙장의 천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묄렌도르프는, 국적은 독일이지만, 일본과 미국 등 다른 나라들로부터 청나라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하는 것이 임무였다.

묄렌도르프에게 민영익은 노선과 이해득실을 같이 하는 동반자일 뿐만 아니라 국왕과 왕비의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자 총신이었다. 민영익을 살려내는 것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절체절명의 일이었다. 그는 소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최선을 다하여 나름대로 응급 처치를 하고는 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옮겼다.

사건이 일어난 우정국은 오늘날 '체신기념관' 자리로 지금의 조계사(曹溪寺) 바로 동북쪽이며 묄렌도르프의 집은 서남쪽으로 가까이 있었다. 사실 묄렌도르프 자신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이 가까이 있어 그와 민영익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 묄렌도르프의 집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봉기한 군민에게 타살당한 당시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이었다. (민겸호의 아들이 을사늑약 후 자결로 항거한 민영환이다.) 묄렌도르프의 집은 1906년부터 명신학교(뒤에 숙명여고로 개칭)에서 사용하다 헐렸고, 지금 그 자리에는 코리언리빌딩이 서 있다. 약도에서 보듯이 우정국에서 묄렌도르프 집까지는 불과 200미터 남짓이다. ⓒ프레시안

일단 급한 불을 끈 묄렌도르프는 누구를 부를지 생각했다. 만약 다른 방안이 있었다면 그가 경계하는 미국 공사관 소속의 알렌(요즈음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앨런이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오래 전부터의 관용에 따라 알렌이라고 표기한다. 에비슨 등도 마찬가지다)에게 끝내 연락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일본 공사관 의사 카이로세도 그에게는 마찬가지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알렌이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한의사들이 있었다는 알렌의 일기 기록을 보면 일단은 전의(典醫)들을 청했던 것 같다.

▲ 정동의 미국 공사관. 알렌의 집은 공사관 바로 동북쪽 옆에 있었다. ⓒ프레시안
이제는 이날 밤의 스타 알렌이 등장할 차례다. 당시 미국 공사관과 관저는 지금의 대사관저와 마찬가지로 덕수궁 뒤 정동에 있었고 알렌의 집도 바로 그 옆에 있었다. 묄렌도르프 집에서는 1킬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이다.

민영익이 자객에게 중상을 입고 민영익의 친아버지(생부)인 민태호 등이 살해당하던 그날 밤(음력 10월 17일)은, 알렌의 일기에 따르면, "날씨가 맑고 달빛은 대낮같이 밝았다. 인적이 드문 거리는 너무나 조용하고 달빛에 비친 거리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 다음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너무나 많이 회자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요컨대 알렌은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하여 회복시켰고, 그 덕에 민영익뿐만 아니라 국왕과 왕비의 높은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중원이 탄생케 되었다. 알렌의 일기대로 갑신쿠데타는 외국인들에게도 작지 않은 사건이었으며, 특히 알렌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되었다.

▲ 갑신쿠데타 첫날(12월 4일) 밤에 대해, 특히 민영익을 치료한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1884년 12월 5일자 알렌 일기의 첫 부분. "어제 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라고 시작된다. ⓒ프레시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중원을 갑신쿠데타가 낳은 산물이며, 또 제중원이 설립되고 그곳에서 서양인 의사들이 진료를 함으로써 근대 서양 의학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비록 외국인(일본인)들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제중원 이전에도 조선에는 이미 근대 서양식 병원이 여럿 세워져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서양 의술을 체험하고 있었다.

다른 문물이나 체제의 수용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의술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민중들의 체험과 반응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용의 주체는 사라진 채, "문명인"이 "미개인"에게 "문명"과 "근대"를 일방적으로 선사한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발상일 뿐이다.

또 조선인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종두술을 도입, 수용하고 있었고 근대 의료에 대한 담론도 점차 확산되는 중이었다. 이렇듯 새로운 의학과 의술의 도입은 여러 경험의 축적으로 점차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리라. 그것도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장(場)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범위를 좁혀서, 갑신쿠데타와 알렌의 성공적인 민영익 치료가 없었다면 제중원이 세워지지 않았을까?

알렌 스스로는 직접적으로 그 사건(쿠데타와 치료)에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았으므로 다른 데에 시선이 가지 않았을 수 있다. 이후의 모든 일을 그 엄청난 사건과 경험에 연결 짓는 것은 인간인 이상, 특히 알렌과 같이 조선의 사정에 밝지 않은 외국인 의사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100년도 더 지난 지금, 냉철하게 역사를 조망하고 성찰해야 할 우리가 알렌처럼 당시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알렌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보배와 같은 존재이다. 그가 남긴 많은 기록들을 선입관을 버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검토해 보면 우리는 더 많은 사실을 얻어낼 수 있다. 알렌은 갑신쿠데타 두 달 전에 제중원 설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미국 공사 푸트 장군은 제가 의사이고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설교나 그 외의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자 저를 극진히 맞아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려고 자원해서 저를 공사관 의사로 정식 임명했습니다. 급여는 없습니다. 그는 본국 정부에 이것을 알렸고, 국왕을 알현하여 제가 온 사실과 부지 구매에 대한 제 의사를 전했습니다. 제가 선교사인지 묻는 국왕의 질문에 '공사관 의사'라고만 답했습니다.

푸트 장군은 곧, 아마 봄에는 기독교 학교와 의료 사업이 허락될 뿐만 아니라 은근히 장려될 것이라는 국왕의 사적인 확언을 받았다는 말도 했습니다. (General Foote also said that he had the private assurance of the King that soon, probably in the spring, mission schools and medical work would not only be allowed, but quietly encouraged.) (알렌이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4년 10월 8일자 편지)


국왕의 언질과 푸트 공사의 전언, 그리고 알렌의 편지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면, 갑신쿠데타나 민영익의 치료와 크게 관계없이 제중원(혹은 다른 이름의 병원)은 이듬해(1885년) 봄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갑신쿠데타 "때문에" 제중원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정변에 따른 반동적(反動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워졌다고 말하는 편이, 또 그만큼 국왕과 조선 정부의 열망이 강했다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까?

그렇다고 국왕의 강한 열망이 그대로 "인정(仁政)"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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