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제중원'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제중원'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근대 의료의 풍경·5] 국립병원 제중원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중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조선에는 근대 서양 의술을 시술하는 병원과 의사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들은 어째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그 병원들이 아니라 제중원을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으로 꼽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는 제중원 이전의 일본 병원들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주된 진료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조선인들도 그곳에서 진료를 받았고 조선인 환자가 더 많은 적도 있었지만, 원천적으로 그 병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중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한 병원이라는 점에서 일본 병원들과 달랐다.

두 번째로 생각할 측면은 병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련된 것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국왕 고종(高宗)의 재가(윤허)를 얻어 1885년 4월에 설립한 병원이다. 외국인들은 제중원을 왕립병원(Royal Hospital)이나 정부병원(Government Hospital)이라고 불렀다.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과 헤론(John W Heron·1856·1890)이 첫 1년 동안 자신들이 제중원에서 활동한 내용을 정리한 영문 보고서의 명칭도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였다.

외국인들이 제중원을 왕립병원이나 정부병원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조선 정부의 문서에는 그런 표현이 없으며 일반 사람들도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중원을 나라(국가, 국왕)에서 설립, 운영하는 병원으로 받아들였다. 이전의 혜민서(惠民署)에 해당하지만 혜민서와는 달리 주로 서양인 의사들이 서양 의술을 행하는 곳으로 여겼다.

'공립의원(公立醫院)'이라는 명칭이 제중원 설립 과정에서 등장하지만 이것은 <병원 규칙>의 초안('공립의원 규칙')으로 한번 나타났을 뿐 실제 쓰인 것은 아니다. ('공립의원 규칙'에 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서술할 것이다.) 국가에서 설립, 운영한 제중원은 조금 뒤인 1890년대 후반 이후의 표현으로는 '관립병원(官立病院)'이며, 오늘날의 용어로는 '국립병원(國立病院)'에 해당한다.

태학(太學)을 고구려 시대의 국립 교육 기관, 국자감(國子監)을 고려 시대의 국립대학이라고 하듯이 국가에서 설립한 제중원을 국립병원이라고 일컫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제중원이 국립병원이었다는 사실과, 일부에서 주장하거나 우려하는 것과 같이 제중원을 서울대학교병원의 모체나 전신이라고 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현재의 병원들과 제중원의 연결, 승계 문제에 대해서는 1905년 4월의 "제중원 환수(반환)"와 1906년 5월의 "제중원 찬성금"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본 뒤에 언급하는 편이 순서에 맞을 것이다.

▲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 제중원뿐만 아니라 종두 업무도 외아문에서 관장했다. ⓒ프레시안
제중원은 오늘날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간략하게 외아문(外衙門)) 소속이었다. 지금은 보건의료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보건복지(가족)부지만 그것은 세계적으로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대체로 내무부(행정자치부)가 보건의료 업무를 담당했으며 우리나라도 1894년의 갑오개혁 때부터 그러했다. (제중원은 갑오개혁 시기인 1894년 8월 18일 내무아문(內務衙門)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제중원이 설립된 1885년 무렵에는 외교와 통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근대 문물을 도입, 시행하는 업무를 대체로 외아문이 관장했으므로 제중원이 외아문에 소속된 기관이라는 사실이 이상할 것은 없다. 조선 정부가 1880년대 중·후반 보건의료와 관련하여 가장 큰 힘을 기울였던 종두(種痘) 업무도 외아문 소관이었다.

외아문의 독판(督辦·장관)이나 협판(協辦·차관)이 제중원의 책임자(당상(堂上))를 겸했고, 그 휘하의 관리(낭청(郎廳))들이 제중원을 운영했다. 관리들의 직급과 직책은 다양했지만 대부분 주사(主事)로 불렸다. 제중원에서 근무한 외국인 의사들이 주사들의 무능과 부도덕성을 비난한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주사들이 병원 운영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을 터이다.

병원 업무에서 중심적인 기능인 환자 진료는 외국인 의사들과 조수격인 조선인 학도(學徒· 학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직책)들이 도맡았다. 전문적인 진료 기능은 의사들이 수행했지만 환자들을 24시간 간호, 구료한 것은 학도들의 몫이었을 터인데 그들의 이름은 주사들과는 달리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학도들도 주사로 총칭했기 때문일 수 있다.

외국인 의사들의 역할은 의당 환자 진료였지만 그들의 가장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은 기독교 선교였다. 그들은 의사이기에 앞서 선교사로 자임했다. 제중원에서 5년 남짓 일한 헤론은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단지 저의 의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의사(예수)를 전해야 하는 저의 사명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돌아가신 진실한 구세주를 전파하기를 갈망합니다." (헤론이 미국북장로교 선교본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1885년 6월 26일자 편지)

"이 땅의 사람들이 영생을 모른 채 죽어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매일 만나는 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가엽습니다." (헤론의 1889년 12월 18일자 편지)

▲ 1885년 5월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시병원을 열었던 스크랜튼. ⓒ프레시안
이들 선교 의사들은 제중원이 선교의 거점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그들의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제중원에서 선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점차 선교를 인정하거나 묵인하는 추세였지만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이상 국가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제중원에서 선교를 허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스스로 운영하는 시병원(施病院)에서 상당한 정도로 선교의 자유를 누리는 감리교 선교 의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1856~1922) 등과 비교했을 때 그들이 느끼는 불만은 작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을 헤론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9년 4월 28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정부병원 일을 가능하면 오래 잘하려고 합니다만, 우리 자신의 병원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정부병원에서보다 환자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고 기독교에 대한 교육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조선정부 및 제중원의 조선인 관리들과 외국인 의사 사이에 종종 갈등이 불거졌으며, 빈튼(Charles C Vinton·1856~1936)이 제중원 의사로 재직할 때에 특히 심해 제중원에서 해임될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1891년 4월 3일부터 제중원에서 일한 빈튼은 한 달 남짓 뒤인 5월 11일 제중원 운영비의 사용권을 요구하며 근무를 거부했다. 제중원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6월 27일 외아문 독판 민종묵(閔種默)은 미국 공사 허드(Augustine Heard)에게 "제중원은 본디 정부에서 설치한 것이므로 함부로 그 정한 규칙을 바꿀 수 없다. 그(빈튼)가 다시 올 뜻이 없다면 다른 의사를 고용하고 면직시키는 편이 좋겠다(該院係是朝家設置凡屬定章不可擅改 如或無意再來須卽確明是否以便延他醫師免致休曠可也)"라는 내용의 경고성 공문을 보냈다.

▲ 1889~1891년 외아문 독판을 지낸 민종묵(1835~1916). <조선귀족열전>(1910년)에 실린 사진이다. 민종묵은 강제병탄 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고종실록>(1905년 11월 23일자)에 의하면 을사늑약 체결 직후에는 관련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주(上奏)하기도 하였다. ⓒ프레시안
조선 정부의 원칙적이고 강경한 대응에 대해 미국 공사 허드는 즉시 6월 29일자 공문을 통해 "빈튼 의사는 병원의 규칙을 기꺼이 따를 것이며, 그의 요구는 단지 약품 구입에 한정되는 것(Dr. Vinton is perfectly willing to abide by the regulations of the Hospital, and only desires contract of a sufficient part of the funds for medical purposes)"이라고 해명하였고 빈튼이 7월 4일 근무를 재개함으로써 빈튼의 항명 파동은 일단 진정되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민종묵과 허드 사이에 오간 공문은 제중원의 성격과 운영권의 소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허드의 공문에서 외국인 의사가 약품 구입에 대해서도 온전한 권한을 갖지 못했던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제중원의 운영비 사용 문제를 제기했다가 곤욕을 치른 빈튼은 이번에는 제중원 구내에 교회를 세우려 했지만 이 또한 조선정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빈튼은 병원 근무에 더욱 소홀했고, 9월 1일부터는 아예 조선 정부가 마련해준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차리고 환자 진료를 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당시 다른 곳에서의 선교 활동은 묵인하거나 허용했지만 제중원에서의 선교는 엄격히 금지한 데에서도 제중원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 1890~1893년 미국 공사를 지낸 허드. 알렌에 의하면 허드는 빈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아문에서 꼬박 이틀 반을 보냈다. ⓒ프레시안
요컨대 제중원은 1894년 9월 에비슨(Oliver R Avison·1860~1956)에게 모든 운영권이 이관될 때까지 전적으로 조선 정부의 의료 기관이었고 그 운영권은 조선 정부에게 있었다.

운영권 이관 이전의 제중원을 선교 병원이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외국인 의사들이 자신들의 제중원 진료 활동 자체를 선교 사업이라고 여기는 것과 제중원이 선교 병원이라는 것은 차원이 크게 다른 이야기이다.

제중원이 국립병원이라고 해서 선교 의사들의 진료 활동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헌신성이 더욱 돋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