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으로 읽히는 물리학 책
철학자가 철학책만 읽으니까 철학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지게 된다. 이 말은 필자의 선생님이 어느 강의 중에 한 말이다. 소위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 외부의 무관심 때문에 밖으로부터 초래된 것이 아니라, 학문 내부의 단절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성적 성찰을 낳았다.
오늘날 철학자가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일상을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시선을 두기에도 따분하고, 과학자들에게는 알 수 없는 문자만 가득한 것이라면 그 책을 읽는 독서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무언가는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담겨 있기에 철학자들도 오랜 시간을 연구하며 활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그 무엇을 계속 찾고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며 세계 속에서 올바른 삶을 실천하는 것, 이것은 철학자들의 오래된 탐구 주제였다. 그런데 이 주제는 철학자들의 전유물인가?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은 명백한 물리학자이며 오로지 물리학적 탐구 방법에 의해 도출된 성과와 과제들에 대해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는 명백한 물리학자의 책이 보다 더 분명한 철학적 저술로 읽혔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적힌 브라이언 그린의 말이 필자로 하여금 이 책에 몰두하게 할 충분한 의미를 던져주었다.
"현대 물리학을 고려하지 않고 존재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알지도 못하는 적을 상대로 씨름을 벌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철학자 칸트의 주장처럼, 철학이 지닌 학문의 고유성은 대상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 있다. 철학자는 마땅히 그 사유 대상과 사유 능력, 그리고 올바른 사유의 가능성에 대해 철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이 사라진 시대에, 칸트가 당시의 철학의 개념이 "학파 개념"으로 되었다고 비판했다면, 오늘날 철학의 개념은 '강단 개념'으로 후퇴했으며, 그럼으로써 고립된 성에 머무르는 외로운 것이 되었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에 대한 흄의 공로에 대해, '형이상학적 독단의 선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한 흄'이라고 언급했지만, 칸트의 후예들은 아직도 낮잠을 자고 있다. 칸트의 시대보다 오늘날 칸트의 후예들은 출판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정보 통신 매체의 발달로 학문 간의 거리가 점점 더 짧아진 시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어쩌면 그 짧은 거리의 속도감에서 생기는 가벼움 때문인지 몰라도-철학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그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은 맹목적인 지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다.
근원 원리에 대한 철학의 고집스러운 집착
▲ <우주의 구조>(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승산 펴냄). ⓒ프레시안 |
서양의 철학에서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이래로 2500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적 물음을 하나로 종합하면, 결국 정말로 시간과 공간에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며,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형성하였다.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이며, 더욱이 참답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있다면 어떻게 있는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의 제목(<우주의 구조-시간과 공간, 그 근원을 찾아서>)과 주제 물음은 철학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물론, 물리학자들의 실험적 탐구 또한 근원에 대한 통일적 체계에 대한 해명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물리학적 실험을 통해 검증된 확실성만을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전통의 존재 물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브라이언 그린이 이 책의 서문에서 던지는 주제 물음은 다음과 같다. ①시간과 공간은 과연 물리적 실체인가? ②아니면 편의를 위해 도입된 개념인가? ③시간과 공간이 실존하는 물리적 실체라면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실체인가? ④아니면 다른 무엇으로부터 파생된 2차적 징후인가? ⑤'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⑥과거에 시간은 시작점이 있었을까? ⑦시간은 우리의 직관처럼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일방통행으로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은가? ⑧우리는 과연 시간과 공간을 과학적 객체로 다룰 수 있을까?
브라이언 그린이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은 지난 300년 동안 과학자들이 쌓아 온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위에 열거한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면서도,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복잡하고 다양한 우주의 구조를 쉽게 설명하고 이해를 돕는 것을 통해 우주의 실체를 가장 최신 버전의 물리학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어쩌면 300년의 실험적 업적이 2500년의 사유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 현대 물리학이 이룬 탐구의 성과
철학자 칸트는 1787년(<순수이성비판>)에 우리의 선천적 인식의 원리로서 감성적 직관의 두 개의 순수 형식을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였다. 시간과 공간은 감각에 대응하는 현실적 대상이 없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감성의 순수한 형식으로서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경험에 앞서 이 두 형식이 감성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에 대해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가능해진다.
이로부터 칸트가 도출하고자 했던 주장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이성 법칙을 탐구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즉, 대상이 우리들의 직관능력의 성질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경험의 모든 대상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오성 개념에 따라 규정되는 사유 방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온 천체가 관찰자의 둘레를 회전한다고 하게 되면 천체의 운동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므로, 이와는 반대로 천체를 정지시키고 관찰자로 하여금 그 둘레를 회전하도록 하는 사유 방식의 전환을 도출해 내었다. 칸트보다 100년 앞서(1687년 <프린키피아>) 뉴턴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불변의 실체이며 이로부터 구성된 세계 또한 절대불변의 견고한 세계라고 생각했다.
절대불변의 견고한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기준으로 모든 세계의 운동을 정확한 수학적 법칙으로 정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과학적 사유가 싹튼 시점은 바로,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끝에 모종의 규칙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규칙이 모든 천체에 필연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이 증명됨으로부터이다. 이 점에서 뉴턴은 모든 자연현상들을 하나의 이론 체계로 통합한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가 등장하면서 1905년에서 1915년까지 10년 동안 혁명기에 접어들었으며, 그 사이에 아인슈타인에 의해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새롭게 탄생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전기와 자기, 그리고 빛의 성질을 연구하던 중 고전물리학의 주춧돌 역할을 해 왔던 뉴턴의 시간과 공간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1905년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서로 무관하지도 않다. 이들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으며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실험적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후에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이론마저 상대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고전물리학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의 새로운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한 객체인 '시공간'의 부분적 특성에 불과하며, 우주의 진화 과정은 시간과 공간의 비틀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영원불변의 절대량으로 여겨졌던 고정적 시간, 공간의 개념이 상대성이론의 출현과 함께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는 역동적 개념으로 수정된 것이다.
또 하나의 혁명적 계기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이라는 전혀 새로운 물리학을 도입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생겨났다. 원자적 크기의 작은 영역에서 얻어진 실험 데이터들을 올바르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의 법칙들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면 어떤 물체의 지금 상태를 제아무리 정확하게 측정한다 해도 그 물체의 과거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물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운동의 필연적 법칙성이 부정된다.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나 미래에 그 물체가 처했을 때나 또는 처하게 될 때의 물리적 상태를 확률적으로 짐작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적 우주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순간에 각인되어 있지 않으며 일종의 확률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근원 물음에 대한 철학적 반성
위와 같이 물리학에서 이룬 성과들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존재의 근원 물음에 대한 전통 철학의 해답 또한 물리학자들의 실험 보고서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성되고 운동한다는 전체적 세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전통 철학이 찾고자 하는 진리 내용을 이루었다.
그 근원의 근거로서 '하나'를 찾아서 올바로 확립한다는 것은 제1의 학문으로서 철학이 품은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현대 물리학이 이룬 성과를 볼 때 의심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이로부터 어떠한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철학의 반성적 성찰을 우리는 과학적인 실험의 성과들을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왔다.
서양의 전통 철학에서 인류의 역사 서술을 위한 근원적 출발점을 찾기 위해 대부분은 종교에 의존하였다. 전 세계의 모든 역사 서술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틀을 형성한, 서양의 역사 서술은 그 출발점을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에서 숫자로 표시하고 있는 연도는 기독교의 시간의식이 탄생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기독교의 시간의식은 성서에 기반을 둔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창세기의 첫 구절은 신에 의한 시간의 질서가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간의 질서가 창조되면서 공간 또한 생겨났다. 신은 태초의 말씀 이후 자신이 만든 시간의 질서에 따라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안식을 취하셨다.' 이는 곧 시간의 질서에 의해서 모든 공간 속에 존재하는 창조물들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시간의 질서 속에서 구약은 창조의 시간이며, 신약은 구원의 시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근원적 출발점을 찾고자 하는 서양의 역사 서술은 그리스의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을 의미하는 신인 크로노스는 우라노스를 거세함으로써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을 생성케 하였다. 우라노스를 거세한 크로노스의 낫은 시간을 자르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하늘과 땅 사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다. 시간의 질서가 생겨나고 공간이 펼쳐짐으로써 그 위에 세상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크로노스의 낫이 우라노스를 거세함으로써 세상의 코스모스, 즉 시간의 질서가 생겨났다. 신화 속에서 크로노스의 낫이 상징하는 바는 시간의 신에 의해서 시간의 질서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종교·신화적 서술이 철학적 사유의 원천을 이루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는 시간의 질서를 미리부터 규정함으로써 지배적인 도덕의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시간은 인간이 종교적 지배 질서 하에 종속되도록 하였으며, 신탁에 의해 설명되는 신화적 시간은 인간이란 결코 신들이 만들어 놓은 예정된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간의 의식 속에 강하게 뿌리박아 놓는다. 현대에 이르러 첨예해진 이데올로기는 시간의 질서를 지배적인 정치권력의 질서에 부합하도록 왜곡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새로운 시대에 놓인 철학자의 과제
칸트가 순수한 이성의 비판 철학을 정립할 때 주된 목적으로 여겼던 것은 종래의 형이상학의 전면적인 혁신과 변혁을 시도하고자 함이었다. 이 시도를 위해 그는 전승된 철학자의 저술뿐만 아니라 기하학자나 자연과학자의 탐구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당 시대의 사유의 대상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하였다. 철학이 자기모순에 의한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해석과 실천이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탐구했다.
칸트의 비판 철학 이후에도 아직껏 우리가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또 감각적 경향성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이데올로기에 의해 쉽게 침투 당한다.
21세기에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소위 '새로움'이 시대적 화두로 대두된 시점에서도 철학자들만 여전히 낡은 것에 머무르고 있다면, 철학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퇴보하고 있음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요즈음 문화의 저변 여러 곳에서 다시 인문학으로의 관심이 생겨나고 있는 징후들이 감지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헤겔의 말처럼, 새로움의 시대적 계기가 무르익어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개 짓을 펼칠 때라면, 철학자들은 이제 자신의 간지러운 겨드랑이를 긁으며 굳었던 날개를 펴야만 한다. 철학에서 멀어진 철학자가 철학에 다가가기 위해서도, 거친 조야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학책 '안'보다는 오히려 '밖'을 경험해야 한다. 형식 없는 직관이 맹목적일 수 있지만, '밖'을 경험하지 않은 철학자는 공허함만 낳는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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