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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혹시 '쓰레기' 아닙니까?

[여기가 용산이다] 생산 유발 효과를 따지는 사회

보건복지가족부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은 <출산이 일자리 창출과 생산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보며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신생아 1명은 12억2000만 원의 생산 유발 효과를 내고, 1.15명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핵심 골자이다.

보건복지가족부가 2009년 12월말에 발표한 이 보고서를 보며 나 자신이 쓴웃음을 지은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취임사에서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고 밝힌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 본질이란 '돈을 섬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자명하게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보고서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이명박 정부의 정책적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기념비적 문헌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생각하는 백성'(함석헌)이라고 자처한다면, 지금 당장(right now!) 보건복지가족부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 보고서를 내려 받고 '열공'하시기를 바란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事人如天)"고 했던 수운과 해월의 위대한 가르침을 구현하는 경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거룩한 가르침을 깨우친 위정자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면, 나를 비롯한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지금의 대통령 이름 석 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생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나라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태평성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의 보고서가 증명하듯이, 이명박 정부는 사람의 출생과 같은 생명의 기적 현상은 안중에도 없고 생산 유발 효과 몇억 원, 이런 식으로 숫자로 계량화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이른바 국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출산 파업을 일삼는 전국의 청춘남녀를 '불법파업죄'로 엄히 그 죄를 묻겠다는 내용이 빠진 것에 우리는 차라리 감읍해야 하는 걸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돈의 신 맘몬을 숭배하는 사회는 자멸한다. 이런 막가파식 자멸을 막기 위해 도입된 최소한의 민주주의 원리가 보상의 원칙이고, 최약자 보호 원칙이다. 그러나 용산 참사는 '이것이 국가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들을 우리에게 던져준 채 우리 모두의 뜨거운 상처(trauma)가 되고 말았다. 보상의 원칙은 무한정 지연되었고, 최약자 보호 원칙은 법 조항에 불과했다.

남일당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쳤지만, 그들의 말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고 말았다. 5명의 철거민들이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그들의 목숨 값보다 뉴타운 개발에서 얻는 생산 유발 효과가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아아아 모음뿐인 외침과 절규"(김해자)는 묵살된 것 아닐까.

우리는 용산 참사에서 경제적 생산 유발 효과가 없는 사람이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 불과하다는 무서운 교훈을 제대로 배운 셈이랄까.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런 나라에서 역설하는 국격(國格)이라는 말이 불쾌하다. 이 언어도단의 사태 앞에서 나 자신은 물론 모국어가 모욕을 당한 듯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나라의 품격이란 자신이 강변한다고 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다양한 사회 구성원은 물론 이웃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품격 있는 나라로 인정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말이 '더 큰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패를 이루어 아마도 11월 'G20 정상 회의'가 끝날 때까지 우리들의 눈과 귀를 엄습할 것 같다는 점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더 큰 대한민국 TV 캠페인 광고를 시행한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아마도 이 TV 캠페인 광고 영상에는 남대문 화재도, 촛불 집회도, 용산 참사 같은 장면도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셋 다 불(火)과 관련된 사건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번제'의 희생자들을 '철(鐵)의 성장 동맹'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이 이 희생자들의 목록에 오를 때에도 나와 당신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도 안 되는 자기 위안을 토로할 수 있는 것일까.

▲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 식당은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누구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의미하는 두리반을 걷어찰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 식당은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곳에 있다'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그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소설가 카프카의 말을 전적으로 나는 지지한다. 누구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의미하는 두리반을 걷어찰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상가 분양 추첨권과 영업 손실금 보상은 물론 권리금에 대한 보상의 원칙과 최약자 보호 원칙은 지금 당장 실현되어야 한다. "사회 따위란 없다"는 식으로 막개발을 일삼는 부동산 투기 자본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유감스럽지만 '정부' 외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우리 시민사회의 한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우리 시대와 장소에 대한 정직한 목격자를 자처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생산유발 효과는 얼마입니까?" 이런 모욕적인 질문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 대해 '선물'이 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꾸고 투쟁하는 일은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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