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불평등한 것이지만, 187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외교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일본과의 사이에 체결되기 4년 전인 1872년에 이미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거류지인 부산진에 초량관을 설치하였다, 근대 서양 의술을 교육받은 일본인 의사 다카다(高田英策)는 그 무렵 초량관의 고용 의사로 의료 행위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다카다가 우리나라 땅에서 근대 서양 의술을 행한 첫 번째 의사이다. 다카다의 활동이 상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조선인들에게도 '새로운' 의술을 선보였을 것이다.
또한 "1872년에는 이후 <아사히(朝日)신문> 부산 통신원으로 활약한 나카라이(半井桃水)도 왜관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부친 밑에서 급사로 일했다"(<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다카사키 소지 지음,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라는 기록을 보면 일본인 의사가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다.
▲ 1880년 지금의 광복동으로 이전한 뒤의 제생의원. ⓒ프레시안 |
제생의원은,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듯, 당시 일본의 형편에 비추어 볼 때 수준급의 의료 기구와 약품을 구비하고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도 진료하였다. <(제생)의원 규칙>을 보면, 조선인 환자의 약값은 하루 3푼부터 20푼(일본인은 그보다 비싼 일본돈 6전 이상)이었으며, 매달 15일에는 무료로 종두를 접종하였다. 이는 물론 조선인들에게 호감을 사려는 조처였을 것이다.
개원 첫해 제생의원을 이용한 환자는 총 6346명이며 그 가운데 일본인 3813명, 조선인 2533명으로 당시 그 지역의 인구 구성으로 볼 때(1877년말 일본인은 3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인을 위한 병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인들 또한 전체 환자의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꽤 많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지석영이 우두술을 익히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제생의원의 존재는 조선에 제법 알려졌던 것 같다.
1881년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으로 제생의원 원장을 지낸 고이케(小池正直)가 쓴 <계림의사(鷄林醫事)>(1887년)을 보면, 자신이 진료하던 1883년 4월부터 1885년 3월까지 제생의원을 이용한 환자는 아래 표와 같이 조선인 1363명(37퍼센트), 일본인 2313명(63퍼센트)으로 총 3676명이었다.
ⓒ프레시안 |
▲ <계림의사> 하편 목차. ⓒ프레시안 |
부산 이외에도 일본 정부는 1880년 5월 원산에 생생의원(生生醫院), 1883년 6월 한성에 일본공사관 부속 의원인 경성의원(해군 군의관 마에타는 이미 그보다 3년 전인 1880년 11월에 일본공사관 의사로 부임했다), 1883년 11월 인천에 인천일본의원을 개설하였다. 원산의 생생의원을 이용한 환자는 1880년의 경우 일본인 296명, 조선인 1126명으로 오히려 조선인이 많았고, 1881년에는 일본인 1513명, 조선인 695명이었다.
일본의 관립병원들은 이후 거류민단으로 운영권이 넘어가 각각 1885년 부산공립병원, 1886년 원산공립병원, 1888년 인천공립병원이 되었다. 또 인천 지역에서는 1887년 10월 무렵부터 민간인 의사들이 사설 의원을 열었다. 개항장과 한성의 일본 병원은 일차적으로 일본인을 위한 의료 기관이면서 조선인도 대상으로 한 점에서 대체로 비슷한 성격을 띠었다.
일본공사관의 마에타(前田淸則)는 근대 서양 의술을 교육받은 의사 가운데 한성에 온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우두술 등 근대 의술에 관심이 많던 지석영 등과 교류를 가지면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에타를 비롯한 일본인 의사들의 진료 활동에 대해 적어도 갑신쿠데타 이전까지는 조선 정부와 지식인이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한성순보>의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 <한성순보> 1884년 3월 18일자 기사 "일본관의원(日本館醫院)" ⓒ프레시안 |
뿐만 아니라 그 학설이 서양의 과학에 근거한 것이어서 치료를 받으면 신기한 효과를 보는 이가 많으므로 현재도 거의 빈 날 없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처음 개설한 날부터 양력 12월 31일까지 치료 받은 총수가 1200명이며, 또 그 군의가 환자를 잘 보아 조금도 경만한 태도가 없다. (<한성순보> 1884년 3월 18일[음력 2월 21일]자)
또 갑신쿠데타로 조선인 사이에 반일 의식이 극에 달해 있을 무렵 위 기사의 주인공 카이로세는 친일적 쿠데타 세력의 피해자인 민영익의 치료에 동참하고 있다. 즉 독일인으로 외아문 협판(차관)이던 묄렌도르프의 요청으로 미국인 의사 알렌이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할 때 카이로세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해링턴은 <개화기의 한미 관계>(일조각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건 아주 진기한 광경이었으니 그 까닭은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지켜온 총본부 즉 묄렌도르프 집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정치가에게 선교사가 손을 대었고, 또한 반일적 조선인을 일본인 의사가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정부와 의사들은 그들 거류민 거주 지역에 병원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진료를 통한 자국민 보호라는 일차적인 효과를 얻는 동시에 조선의 민중과 지식인, 그리고 조선 정부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우드(Leonard Wood·1860~1927)가 소장으로 진급한 1903년의 모습. 1884년 하바드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군의관이 된 우드는 1899~1902년 쿠바 군정장관, 1921~1927년에는 필리핀 총독을 지냈다. 대통령 클리블랜드와 맥킨리의 주치의도 역임한 우드는 필리핀 모로의 군정장관 재직시(1903~1905년) 그곳의 이슬람 원주민들을 여러 차례 학살한 것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프레시안 |
근대 서양 의료가 일제의 조선 침략에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의료가 일사불란하게 침략과 정복을 위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또 일본인 의사들의 행위를 모두 의료 제국주의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것이다. 미국이 하와이를 병합하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기 전후 그곳에서 활동한 미국인 의사들을 모두 미국 제국주의의 첨병이나 하수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리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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