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 뭐니 해도 도시의 마천루를 장식하는 것은 법률 상담소, 금융기관, 병원의 간판들이다. 도심의 빌딩들은 지식 집약적인 생산자 서비스업의 간판들로 도배된 채 하늘로 뻗어있다. 00캐피탈, 00금융, 000법무사, 000성형외과까지…. 그러나 낮을 지나 밤으로 들어서면 도시의 경관은 화려한 욕망의 빛을 내뿜는다. 식욕을 자극하는 각종 음식점과 술집들의 간판 뿐 아니라 룸살롱, 안마방, 노래방, 키스방 등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다양한 서비스 업종들의 간판들이 질세라 한판 꽃을 피운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 이론가들은 줄곧 인간의 몸과 감정, 그리고 욕망이 상품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해왔다.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상품화되고 거래되는 것은 도덕적인 타락이라는 것이다. 특히 섹스나 성적인 접촉이 시장에서 거래될 때 사회이론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성의 몸을 쇼핑 진열대의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비판하면서 가정이나 개인적 인간 관계가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침식되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19세기 경제 전문가들은 "가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면서 시장의 팽창이 사적인 연대를 냉혹하게 손상시켰다고 비판하였다. 21세기의 대표적인 비판이론가 위르겐 하버마스 역시 시장의 도구적 합리성이 생활세계의 상호존중의 규범을 침범하는 것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꼬집었다.
반(反)매춘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부장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특히 여성이 착취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장은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몸을 상품화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매춘은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착취의 극단적 형태라는 것이다. 이들의 비판은 모두 사적인 영역은 공적인 영역과 구분되며 서로 대립되는 원리를 가진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아니다, 사랑은 거래되었다
▲ <친밀성의 거래>(비비아나 젤라이저 지음,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프레시안 |
그렇다면 젤라이저가 말하는 "친밀성(intimacy)"이란 무엇인가? 그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우선 친밀성이란 친구나 애인 관계 등에서 기대되는 친근한 감정, 관심, 정서적 지지 등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것은 직접적인 성교를 의미한다. 셋째로 개인의 비밀이나 신체적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친밀성이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법률가나 정신분석자의 노동은 고객의 은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세 번째 의미의 친밀성 거래와 가장 관련되어 있으며 베이비시터나 노인 돌봄이는 대상에게 애정, 감정적인 지지, 신뢰 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의미의 친밀성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와 달리 매춘 노동은 주로 두 번째의 성적 친밀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장 영역에서뿐 아니라 사적인 관계에서도 친밀성은 경제적 거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니, 젤라이저에 따르면 오히려 우리가 가장 숭고하고 도덕적이라고 여겼던 가족 관계 안에서 친밀성의 거래는 가장 확실하게, 특권화된 방식으로 보장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법은 법적 부모가 자식의 양육을 위해 정서적인 관심뿐 아니라 충분한 먹을거리, 교육을 위한 재정적 지원까지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법적인 자식에게 부모의 유산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부부와 같은 친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배려 역시 재정적으로 보장된다. 오직 법적으로 인정된 결혼 관계에서 사람들은 배우자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는다.
다양한 친밀성 거래의 구분
그러나 친밀성이 경제적 거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친밀성 거래가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법은 연애, 약혼, 결혼과 같은 개인적 관계뿐 아니라 돌봄 노동이나 성 노동 등의 상업적 관계에 이르는 다양한 친밀성의 거래를 구분하고 나아가 어떤 친밀성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매개물을 통해 거래될 때에만 허용될 수 있는가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적 관계에서든 시장적 관계에서든 친밀성은 항상 거래의 논리와 함께 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친밀 관계, 매개, 거래를 매치시키고 이를 토대로 친밀성 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하는 데 몰두해 왔으며 그 구분법에 따라 특정한 친밀성의 거래를 인정하거나 비난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법은 성교나 애정과 같은 성적 친밀성이 결혼이나 약혼이라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다이아몬드 반지와 같은 상징적 매개물을 통해 교환될 때는 허용하였다. 그러나 성적 친밀성이 상업적 관계에서 돈을 매개로 이루어질 때에는 비난되었다. 그러나 젤라이저에 따르면 이것 역시 점차 세분화된다.
돈을 매개로 하는 상업적 관계에서도 매춘과 같이 직접적인 성교를 거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간단한 터치나 흥분의 제공은 허용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성교를 포함하는 경우라도 그것이 돈을 매개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허용되기도 한다.
20세기 초에 미국에 등장했던 "향응(treating)"을 보자. 당시 미국 노동계급의 여성은 애인뿐 아니라 초면인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성적 행위에 대한 대가로 재정적인 보조와 증여를 받았다고 한다. 젤라이저에 따르면 향응 역시 결혼 관계 밖에서 진행되는 성적 친밀성의 거래였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받는 대가가 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을 구분해 내었고 이를 강조함으로써 향응을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고 한다.
젤라이저가 돌아보게 하는 것
물론 친밀성과 경제적 거래가 항상 우리의 삶을 함께 구성했다는 젤라이저의 주장은 역으로 친밀성의 거래를 반대하는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 이 입장에서는 "그래, 그러니까 가부장제, 자본주의 혹은 남근중심주의가 여성의 숭고한 친밀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거래를 해왔다는 걸 낱낱이 폭로하고 이를 해체해야 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를 반복하거나 기존의 주장을 확고히 하면서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오기보다 젤라이저의 관점이 우리에게 무엇을 되돌아보게 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다른" 관점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우선 젤라이저의 관점은 친밀성 거래의 허용 여부를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철학적 규범보다 제도화된 구분법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라고 묻는 물음에 "어떻게"를 통해 대답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친밀성을 사고파는 일의 허용 여부를 판단할 때 친밀성 자체에 대한 규범적 의미보다는 그와 관련되어 파생되었지만 그 자체가 이유가 되어버린 제도적 구분법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돌봄 노동과 매춘을 평가할 때 그것이 모두 인격적인 관계나 감정 혹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고 있다는 규범적 이유에 집중하기보다는 제도나 관습의 구분법에 따라 돌봄 노동이 매춘과 달리 성적 친밀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토대로 돌봄 노동을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에로틱 댄서나 매춘과 같이 성적 친밀성의 거래가 주가 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구분 방식을 끌어들인다. 에로틱 댄서가 최소한 "거기"까지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에로틱 댄서와 매춘 여성을 구분하는 핵심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친밀성이 거래되어왔다는 사실 그리고 친밀성 거래의 현실적 정당성이 관계, 매개, 거래의 다양한 구분을 통해 규정되어 왔다는 인식은 소위 우리가 가장 숭고하다고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가장 천박하고 더럽다고 여기는 "매춘"과 질적인 규범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모든 종류의 친밀성 거래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태도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관점에 따르면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전업주부나 고객의 화대로 생활을 유지하는 매춘 여성이나 친밀성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오직 제도에 의해 반복되어 온 관습적인 구분에 의해 분리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젤라이저의 관점은 사람들이 다양한 친밀성 거래의 방식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시장적 원리뿐 아니라 친밀성의 의미 자체도 변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규범적으로 양자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양자를 매치시키는 가운데 변화, 협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물과 같은 증여 경제와 함께 이루어지는 남녀의 데이트 관계의 등장은 혼외 관계에서의 친밀성 거래를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아이를 베이비시터의 돌봄에 맡기게 되는 상황이 빈번해지면서 사람들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 혈연이나 법적 관계를 넘어선 사람들에 의해서도 제공될 수 있다고 믿게 된 점은 이에 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친밀성과 거래의 협상
그러나 우리 사회의 담론들은 친밀성에 대한 전통적 규범과 현대적 제도에 의해 반복되어온 방법적 구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특히 성적 친밀성의 거래가 화두가 될 때면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는다. 한편으로는 룸살롱, 대딸방, 키스방 등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친밀성 거래 방식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이를 사회적 악으로 규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왜 그러한 친밀성 거래만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규범적 질문에는 제대로 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론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친밀성의 거래가 원천적으로 도덕적인 타락이라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론가들은 전통적 규범이 현실적인 거래의 분화 속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 협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거래관계가 친밀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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