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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추도한 지석영의 속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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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추도한 지석영의 속내는…

[근대 의료의 풍경·2] 지석영의 두 얼굴

많은 사람들이 20일 가까이 텔레비전 앞에서 열광하였다. 나 역시 이름도 몰랐던 이상화의 눈물에 콧등이 시큰거렸고, 김연아가 연기를 끝냈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만이 아니라 (얄미운 언행을 보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국적과 피부색과 성적에 관계없이 모두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참 이렇게 아름답고 늠름한 인류가 왜 수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엘리트 스포츠와 스포츠 정치에 대한 비판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자.)

과거와 달리 이제는, 김연아보다 아사다 마오를 응원한다고 친일파 매국노 소리를 듣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2월 26일자)는 "한국의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철저히 무찔러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에 앙갚음했다"라고 보도했다. 그 기자의 눈에는 여전히 한국인들은 피겨 스케이팅 경기조차도 전쟁 치르듯 한다고 보였던 모양이다. 기자의 관점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지만, 식민 지배를 당한 상흔은 그리도 깊고 오래 남는 것이리라.

나는 왜 일본이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면서도 그들이 침략하고 지배했던 나라 사람들에게 진솔한 사죄를 하지 않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 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선진국'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또 이것은 주로 피해만 내세울 뿐 국내외적으로 남에게 가한 가해는 생각지 않으려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돌려야 할 질문이다.

일제의 한국 침략과 한국인 수탈의 주범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다. 또 몇몇 나라가 공범의 역할을 했거나 범죄를 방조하였다. 그와 더불어 종범 노릇을 한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죄상의 종류와 정도는 여러 가지지만 우리는 그들을 대체로 친일파라고 부른다. 물론 친일파의 기준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도 여태껏 논의를 기피해 문제를 더 까다롭게 만들었다.

국가와 민족의 차원만이 아니라 인류와 개개인이 평화로운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탈과 침략의 역사를 청산해야만 한다. 우리로서는 무엇보다 친일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 해결은 친일의 모습을 제대로 규명하고 그것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것이다. 친일은 공적인 행위이므로 당연히 사회적으로 규명하고 평가해야 한다.

지석영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종두술 보급에 매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흔히 얘기되는 것과는 달리 가장 먼저 종두를 시술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1899년 설립 때부터 1907년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될 때까지 의학교의 교장을 지내며 최초의 의사들을 배출했다. 나는 1876년 문호 개방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근대 서양 의료 도입에 가장 공적이 큰 우리나라 사람을 들라면 망설이지 않고 지석영을 꼽는다. 그러나 지석영은 친일 행적으로 여러 차례 거론되기도 하였다.

다음의 기사를 보자. 지석영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한 행위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과 '부산을 빛낸 인물' 선정에서 제외되었다는 기사이다.

지석영은 친일 행각 때문에 최근 한국과학문화재단이 마련한 과학기술자 명예의 전당 등재나 부산을 빛낸 인물 선정 등에서 배제됐다.

부산시사편찬실의 홍연진 상임위원은 "지석영은 1909년 일본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이를 추도하는 모임의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친일파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며 "구한말 왜곡된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 이런 경우를 두고 지식인들이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부산대 이종봉(사학과) 교수는 "지석영의 친일행각은 용서할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을 천연두란 고질적인 질병으로부터 구해낸 그의 헌신적인 과학업적은 별도로 인정해야 하며 알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부산일보> 2005년 10월 5일자)


▲ 지석영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문을 낭독했다는 <황성신문> 1909년 12월 14일자 기사. ⓒ프레시안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4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애도와 추모 행사가 끊일 줄 몰랐다. 당시 신문들은 관련 기사를 매일 같이 쏟아내었다. 애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듯, 10월 29일 대한제국 순종 황제는 "메이지 천황"에게 "吾國의 兇手에게 死", 즉 우리나라 악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을 쓰며 이토의 "훙서(薨逝)"에 애통해 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지석영이 낭독한 추도문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순종 황제의 것과 비슷했을 터이다.

지석영은 그 3년 전인 1906년 11월 30일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기 위하여 흥화학교에서 열린 1주기 추도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약 보름 뒤에는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한 사건에 연루된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 이완용 습격 사건 관련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1일자 기사. ⓒ프레시안
3년 사이에 정반대 성격의 추모회에서 연설하거나 추도문을 읽었던 지석영. 일제에 우호적인 행위를 했음에도 한 달도 안 되어 반일 혐의를 받았던 지석영.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세월이었지만, 그것이 지석영의 친일적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변명해주지는 못한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특히 역사 앞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음 회에서 한 번 더 같은 주제를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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