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진보'라는 단어를 쓰는 의미도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원고를 모아낸 책의 제목이 『진보의 미래』이지만, 스스로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진보'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처럼 '진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진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진보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6.2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광주시장에 출마하는 윤난실씨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다.
윤난실씨는 이번에 10명의 지식인·활동가들을 찾아다니며 대화한 기록을 모은 『진보콘서트』라는 책을 내 놓았다.
▲ 윤난실 씨의 새 책 진보콘서트 표지 ⓒ프레시안 |
이 책에서 윤난실은 10명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한다. 마치 구도자처럼 묻고 다닌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홍세화, 손호철, 정태인, 김상봉, 진중권, 이범, 박병규, 오관영, 박래군, 한재각... 모두가 우리사회에서 진정성 있는 활동과 발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윤난실은 이 사람들을 찾아다닌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2008년 촛불을 보니까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각각의 조직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그 판에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소외감도 들었고,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중략) 지금의 진보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보세력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이더라는 자기 인식은 진보의 현실을 보여준다. 윤난실은 "국민들이 물신숭배와 무한경쟁의 늪에서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진보가 비전이나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묻는다. 진보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상대방에게 던진다.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인권과 광주, 비정규직, 청년실업, 기후변화와 에너지.... 등등 다양한 주제들을 넘나들지만, 그 핵심에는 진보의 현재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모색이 깔려 있다.
진보에 대해 던지는 쓴소리들
치열하게 활동하고 발언하는 사람들인 만큼, 대화의 상대방들은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진보운동 또는 진보정당에 대한 쓴 소리들이 쏟아진다.
"우리의 진보는 그 수가 많지도 않은데,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절대적 진리를 가진 양 오만하고 학습을 안 합니다. (홍세화)"
"환원론적 비판만 하고 구체적·실천적 대안은 고민하지 않는다. (이범)"
"진보진영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관념성이라고 생각해요. 관념적인 맑스주의 원론에서 똑같이 원론적인 사회민주주의 원론으로 움직여 간 겁니다. (손호철)"
"우리가 무상교육·무상의료 얘기를 하지만 진전이 있으려면 내부 구성원부터 동의와 합의과정과 실천이 필요한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죠. (박병규)"
이런 쓴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진보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진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제안들이 쏟아진다.
"진보는 자신의 미성숙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지런히 학습해야 합니다. (홍세화)"
"선동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공감과 소통의 자세로 다가서야 합니다. (박병규)"
"무조건 안 된다는 계몽적 방식으로는 절대 설득되지 않거든요. 작은 실천을 만들어내면서 그분들의 욕망을 다른 방법으로 채울 수 있는 대안을 보여줘야 합니다. (오관영)"
"진보운동 진영이 우리의 힘없음, 실력 없음을 인정하고 바닥에서부터 기초를 튼튼히 쌓는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박래군)"
진보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해서는 일단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그러고 나서 경쟁을 하더라도 하자는 그런 청사진을 제시하며 현실적 믿음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홍세화)"
주목을 끄는 것은 '믿음', '신뢰'라는 단어를 많은 대화자들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이 시기에 진보가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기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내 이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는 박병규씨는 신뢰를 강조한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10명의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눈 윤난실씨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 명쾌하다. 진보는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윤난실씨의 인생이력을 보면, 늘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할 일을 고민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광주교대에 입학했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고 다시 진보정당운동을 하게 된 것. 2002년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 광주시의원으로 들어가 의정활동을 통해 지역정치의 현실과 몸으로 부딪혀 온 것이 증명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진보의 미래를 위해서는 진보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 사람들은 진보의 이야기를 믿을 지 말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말만 듣고 믿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고 실천이 중요하다. 『진보콘서트』를 덮으면서, 진보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모색하는 윤난실씨가 자신의 삶을 통해 '진보의 미래'를 계속 개척해 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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