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스포츠 마케팅이라고 하는 것들, 김연아의 금메달 수상으로 국가 브랜드 향상에 몇 조의 효과가 있다는 식의, 급기야 스포츠의 '성과'조차도 돈으로 대칭 짓는 진단 방식은 흥분한 마음에 평상심과 삐딱함을 유발시킨다.
그녀를 광고 모델로 썼다가 대박을 맞은 삼성을 보면 그 삐딱함은 배가된다. 총수의 배임죄, 조세 포탈죄, 납득 불가한 사면의 사유는 김연아의 조그만 얼굴 뒤에 충분히 가려진다. 누구나 좋아하는 김연아가 대기업의 이미지 전도사가 되어 눈과 귀에 피로감을 주는 피사체로 비쳐질 날도 있을 것이다.
독점된 인기가 더 널리 조명해야 할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가능성도 크고 벤쿠버의 승전보가 불행하고 탐욕적인 현실의 뉴스를 덮는데 당분간 기여할 것이다. 이는 김연아나 메달리스트들이 만든 일은 아니다. 자본과 언론의 기획이 대중들의 순진한 감성조차 포식하며 포섭하는 문제제기일 뿐. 그러나 세상은 어찌할 수 없이 흘러가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 김연아의 아름다운 연기 뒤에는 그것을 이용하는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 어찌할 수 없는 탐욕을 어찌 한단 말인가. ⓒ프레시안(손문상) |
용산 참사 장례식이 있던 날, 서울역에서 남일당까지 행렬을 뒤따르며 얼핏 보았다. 마천루 같은 대형 아파트에서 행렬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망루를, 혹은 이 낯선 대열을 쳐다봤을까? 내 마음과 저들의 마음 사이에 있을 간극, 내가 서서 걸어가는 평지와 저들이 바라보는 고층 높이만큼의 높낮이를,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잠깐 생각해보았다.
돌아보면 모두가 인간의 집이고 인간이 만든 흔적들인데, 누군가는 서러워 울고 누군가는 자신의 테라스에서 이 풍경들을 조소할 것을 생각하면, 나의 이분법이든 세상의 단절된 질서이든 다 못마땅하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내가 소수의 발걸음 속에 있다는 외로움은 축제 속 텔레비전 화면을 경청하는 나의 시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별난 유전자가 있어 축제에도 장례에도 몰입하지 못하는가. 외로운 사람들은 정주할 곳 없이 나처럼 세를 살 것인데, 내 집도 내 가게도 없이 도시를 부유하며 심지어 쫓겨나며 살 것인데, 나는 간혹 자주 잊는다.
돌아보면 곳곳에 '용산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어찌할 수 없으나 어찌해봐야 하는 숙명의 농성장이 어찌 용산뿐이랴. 나의 집일 수도 있다. 현수막과 구호로 쓴 글씨가 없을 뿐, 일상의 피로감과 집 한 채 갖기를 꿈꾸는 마음이, 그조차도 절제해야 할 욕망이라는 긴장이 물과 기름처럼 섞여 지탱하고 견뎌가는 삶이, 그러나 그것조차도 패대기쳐지고 배반당할 때 마침내 발화되는 수식어는 '내안의 이명박'이 아니라 '내 안의 용산'이리라.
덩어리로 뭉쳐져 독점되는 것들은 작고 소중한 알갱이들을 파괴시키거나 획일화시킨다. 이름, 명망의 독점도, 몇 대를 걸쳐 대물림되는 자본의 독점도, 작은집들을 부수고 큰 덩어리의 마천루로 양생되는 주거의 독점도, 작은 샛강을 파헤쳐 멋대가리 없는 수로를 만드는 직선의 독점도, 집이 사유재산으로만 인증되는 반상식의 독점도, 억울한 소외와 치유 불능의 상처를 낳는다.
우리는 그 덩어리로부터 빠져나와 각각의 알갱이가 되어야 한다. 모래라는 자갈이라는 물이라는 각각의 고유한 물질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것들이 거대한 괴물로 합체되지 않도록 욕망의 공범으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 내 지분을 거두어 그야말로 건설적으로 재 파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실 공사나 기우뚱한 제도와 탐욕으로 말미암아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과 게딱지같은 모든 집들이 위태롭다. 더불어 먹는 소찬의 상다리라는 두리반이 으스러지고 있다. 걷어찬 자들은 자본에 눈먼 맹목적이고 힘이 세고 묵묵부답이고, 나는 자본에 무관심하거나 좀 아프고 고요하고 새침하다. 그것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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