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삼성에게 챔피언 자리를 줬던 전자 산업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변화를 주도한 것은 아이폰 바람을 불러일으킨 애플과 스티브 잡스다. 누구나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와 콘탠츠를 앱스토어에 올릴 수 있다. 이걸 내려 받아 아이폰에 설치한 소비자가 낸 가격 가운데 70%는 개발자 몫이다.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판매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독립 개발자 시대가 열렸다. 아이폰의 성공은 하드웨어 품질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개발자들의 자유로운 열정을 끌어내고,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는 제도가 만든 것이다.
반면,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의 맞수로 내놓은 옴니아2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지나친 아이폰 열기에 눌린 결과일까. 삼성은 그렇게 보는 듯하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극성스런 네티즌에 의한 반짝 인기"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지난달 29일,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책을 냈다.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라는 책에는 그가 삼성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자세히 담겨있다. 삼성 수뇌부에게는 부사장의 자살이나 아이폰 열풍보다 더 큰 악재로 여겨질 수 있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오기까지)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판단이 달라진다. 총수 일가가 아니라 평범한 삼성 직원들의 입장에 서면, <삼성을 생각한다>에 담긴 내용은 삼성이 지금 부딪힌 문제를 푸는 힌트가 될 수 있다. 아이폰을 내놓은 애플처럼 시장 자체를 뒤흔드는 창조적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문제 말이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삼성 경영에 던지는 시사점을 정리했다. <편집자>
"'추격자 전략', 1등 된 뒤에는 안 통한다"
삼성 그룹 내부 언론인 <미디어 삼성>에는 최근 "1등 기업의 함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1등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성공적이었던 전략이 1등이 된 뒤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른바 '추격자 전략'이 가진 한계다.
이 기사에서 '추격자 전략'의 실패로 꼽힌 사례가 바로 스마트폰이다. 기사에 등장한 한 직원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출시할 A플랫폼 기반제품은 훨씬 빨리 내놓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A플랫폼 회사가 우리 쪽에 먼저 제안을 해 왔다"고 말했다. 여기서 A플랫폼이란 구글이 만든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가리킨다. 윈도 모바일 기반 스마트폰 개발에 주력하던 삼성에게 구글이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 개발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삼성은 이런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구글은 대만 업체와 손잡고 첫 번째 안드로이드폰을 내놓았다.
기사 속 직원은 "(삼성은) 뒤늦게 A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왜 우리는 꼭 성공모델이 있어야 도전하는 것인지, 과연 우리가 진정한 1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허수아비 사장들, 경영 실력 쌓을 기회가 없다"
▲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씀, 사회평론 펴냄. ⓒ프레시안 |
이 책에 따르면, 삼성 계열사에는 모두 '관리담당'이라 불리는 임원이 있다. 정식 명칭은 경영지원팀장 등으로 다양하지만, 하는 일은 같다. 구조본의 직접 지시를 받으면서, 계열사 경영을 감시하는 것이다. 계열사에 있는 '관리담당'과 짝을 이루는 게 구조본 재무팀에 있는 '운영담당'이다. 관리담당과 운영담당은 서로 지시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계열사를 통제한다. 그래서 계열사 사장이 아래직급인 관리담당의 눈치를 보곤 했다.
삼성 사장들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 직원들에게 오후 휴가를 주는 일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투자와 인사에 관한 결정은 말할 것도 없다. 아주 시시콜콜한 결정까지 구조본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구조본에 유능한 인재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계열사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구조본 임원이 계열사를 제대로 이끌기란 쉽지 않다. 외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찾아서 그대로 적용하는 경영 방식은 이런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구조본이 모든 결정을 도맡는, 원격경영 구조에서는 권위 있는 매뉴얼을 구해서 계열사가 따르도록 하는 게 가장 편한 선택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더 이상 따라할 대상이 없어진 지금, 삼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게 삼성 경영진의 역할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중요한 결정을 맡기려 해도, 훈련된 경영인이 없다는 것. 유능한 경영인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경영인의 소양을 닦을 수 있다. 모든 결정이 구조본에서 이뤄지고, 구조본은 오로지 총수의 눈치만을 살피는 삼성 식 경영구조에서는 계열사 경영진이 독자적으로 판단하면서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다. 삼성 그룹이 오랜 역사와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스타급 전문경영인은 많이 배출하지 못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재무팀의 전횡, '세일즈 머신' 된 삼성전자
"재무팀이 작성한 보고서 끝에 의견란이 있는데, 모든 임원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쓰도록 돼 있다. '임원 누구누구는 즉시 조치함이 상당하다, 사장은 연말에 재평가함이 상당하다'라는 식으로 쓴다. 여기서 조치나 재평가란 해고를 뜻한다. 구조본 재무팀은 그룹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에 대해 목을 쥐고 있는 자리인 것이다.
예컨대 그룹 내 어느 화학 계열사 사장이 명절에도 출근해서 안전점검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고 하자. 그런데 재무팀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재무팀에서 ''계장급 사장'이며, 리더십이 부족하다'라고 적어 보고하면 그만이다. 꼼꼼하게 실무를 챙긴다는 점을 거꾸로 비난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반대로, 사장이 굵직한 일만 챙기고 실무는 아랫사람에게 위임한다면? 역시 트집 잡을 방법은 많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의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온 셈이다.
내가 재무팀에서 일하던 시절, 궁금한 게 있어서 소환하면 누구든지 바로 왔다. 이렇게 불려온 사람들은 사장에 대한 고자질을 밥 먹듯 했다 '어차피 사장은 회장이 파견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므로 사장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리 없다.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오직 회장뿐인 것이다."
구조본의 옛 이름은 회장 비서실이다. 비서실의 약자인 '실'이라는 표현은 삼성 그룹 안에서 권력의 상징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여긴 실입니다"라는 한마디면, 계열사 사장이 긴장하는 게 확 느껴졌다고 한다. 비서실은 구조본, 전략기획실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특검 수사를 거친 뒤 공식적으로는 해체됐다. 그러나 삼성 그룹에서 비서실 기능이 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이런 기능 중에서 핵심은 자금 관리다.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김봉규) |
그런데 재무 부서가 이토록 큰 힘을 휘두르는 구조가 정상일까. 부작용이 필연적이다. 이런 구조에선 당장의 수익성과 거리가 먼 지표를 개선하는 일에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혁신을 주도하는 기술 리더십이 망가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매출과 수익을 거뒀다는 발표가 나올 무렵,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삼성전자를 가리켜 '세일즈 머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기존 기술을 활용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아이폰을 내놓은 애플처럼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제품을 생산할 능력은 없다는 평가다.
이 신문은 "삼성이 최근 수년 간 거둔 성공은 기술 리더십(technology leadership)에 기반한 게 아니라 신속한 대응(speed and agility) 덕분이었다"며 "그러나 결국에는 진정한 혁신의 부족이 수익성을 해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업통으로 알려진 최지성 사장이 삼성전자 경영의 전권을 쥔 것을 놓고도 비슷한 전망이 나온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공포, 상사 지시 없으면 머리 안 쓰는 문화"
이에 대해 삼성 측은 "통상 삼성전자의 연구개발비는 매출의 10% 수준이다. 이 정도면 결코 적은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런 반박에서도 '혁신'을 '연구개발비 지출'이라는 재무 지표로만 이해하는 태도는 반복된다. 충분한 연구개발비 투자는 혁신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연구개발비를 많이 쓴 기업이 꼭 혁신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혁신을 위한 또 한 가지 조건을 빠뜨릴 수 없다. 바로 '문화'와 '제도'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삼성 내부 임직원도 공감한다. 앞서 소개한 <미디어 삼성>에 실린 "1등 기업의 함정"이라는 기사에 소개된 한 개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뭔가 창조적 제품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만들어서도 안됐다. 과거 다른 기업들의 성공 사례들을 좇는데 익숙하다보니 후발주자로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사에 소개된 다른 연구원은 "개발하다 보면 가끔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내면 '뜬구름 잡지 말고 다른 걸 생각해 봐! 바로 시장에 낼 수 있는 걸로…'라는 반응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심사까지만 1년이 넘게 걸렸다"면서 "잘 만들면 획기적 상품이 될 수 있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신규사업 개발 담당 전무 출신으로 <삼성과 인텔>이라는 책을 냈던 신용인 박사는 "윗사람 지시 없으면 머리 안 쓰는 문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관리와 통제 문화가 창의적인 혁신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혁신의 기풍 사라지고, 숫자에 맞춰 쥐어짜는 일만 남았다"
삼성 휴대폰에 쓰이는 천지인 자판 발명가인 최인철 삼성전자 차장은 제도의 문제도 함께 지적한다. 직원의 창의성이 낳은 결과물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천지인 자판 발명으로 회사에 천문학적 수익을 안겨줬지만, 삼성 측은 그에게 고작 10만 원 조금 넘는 상여금을 줬을 뿐이다. 불법 로비, 비자금 조성 등에 가담한 이들이 누리는 혜택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금액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반도체 기술자 위에 비자금 기술자가 있는 구조"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발명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한 뒤였다. 직무발명 보상에 대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삼성이 그에게 돈을 줬던 것. 직원이 직무를 통해 얻은 발명특허로 회사가 이익을 얻었을 경우, 이익 가운데 일정 비율은 직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법원 판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관련 기사: "'삼성 식 경영'을 고발한다")
최 차장은 "과거의 삼성전자는 지금보다는 혁신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재무부서가 전권을 쥐면서, 모든 게 변했다. 철저하게 재무적인 지표로만 평가하는 문화가 일반화됐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자산은 설 자리를 잃는다. 기술과 서비스의 혁신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혁신의 기풍은 사라지고, 위에서 할당한 재무적인 목표에 맞춰 쥐어짜는 일만 남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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