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지만,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대통령이 지지한 '오바마 금융개혁안'의 핵심 정신은, 한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해 온 '금융기관 대형화, 겸업화'를 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겸업화는 그 일반적 의미인 '상업은행업(예금업 및 대출업)과 투자은행업(증권업, 자산운용업, M&A 등 자본시장 관련 영업)' 간의 장벽을 허무는 정도가 아니다. 금융업(상업은행업과 투자은행업)과 제조업을 하나의 (재벌)지주회사 내에서 겸업할 수 있다는, 대공황 이전 미국을 떠올리게 하는, 대단히 과격한 정책이었다.
더욱이 한국 경제의 수장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월 24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금융개혁 방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융기관 대형화와 자본시장통합 등 우리만의 갈 길을 계속 갈 것이다"라고 소신을 밝힌 바 있다.
혹시 4일여 동안 한국의 금융정책이 180도 바뀐 것일까. 아니면 '세계적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이른바 국격을 높이기 위해 오바마-사르코지-트리셰-고든 브라운 등 '일류국가'의 지도자들과 스크럼을 짜보신 것일까.
필자는 17세기 초 청의 팔기군이 베이징으로 진공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명에 대한 사대(事大)를 꿋꿋이 지켰던 조선 주자학파들의 풍모를 윤증현 장관께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윤증현 장관의 '길' 혹은 '정도(正道)'인 미국의 금융시스템(지금 오바마가 청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은 어떤 것이었나.
거대한 괴물, 금융투자복합체
미국 금융시스템의 중추는 거대 금융투자복합체(Bulge Bracket)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로 지주회사 형태로 존속해 왔다. 이 금융기관들은 지주회사라는 지붕 밑에 상업은행, 증권업, 자산운용업, 헤지펀드, 사모펀드, M&A 컨설팅 등 다종다양한 금융업이 '겸업화'된 금융복합체였다(이보다 더한 '괴물'은 앞으로 한국에서 탄생할 재벌 산하의 금융-산업복합체 정도일 것이다). 더욱이 이 금융복합체들의 사업규모는 매우 거대했다. 예컨대 2010년 초 현재, 미국엔 자산규모(자기자본 + 채무) 1조 달러 이상인 투자-상업은행이 6개나 있다. 1조 원이 아니라 1조 달러!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제이피모건체이스, 씨티그룹, BOA, 웰스파고 등이다. 그 다음 서열인 PNC나 뱅코프 등도 자산규모가 3천억 달러에 달한다.
그런데 '두'줌도 안 되는 금융회사들(모두 세어보니 8개에 불과하다)이,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금융회사들은 '시장 순응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장 순응자(일반 투자자)는 주식 등 금융자산에 투자한 뒤 그것이 오르면 이익을 내고 내리면 손해를 본다. 그러나 이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정보망으로 자금의 흐름을 휘어잡고,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괴물 같은 존재다. 예컨대, 현물환 거래량이 하루 70억~100억 달러 수준인 한국 외환시장의 경우는 마음만 먹으면 원-달러 가격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금융회사 대형화'를 '규모의 이익' 운운하는 경제이론으로 설명하려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고상한 이야기일 뿐이다. 국내든 국외든, 금융기관의 규모를 키우려는 자들의 목적은 '시장 그 자체'를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이런 금융기업이 무너지면 1개 회사 당 1조 달러가 날아가고, 국가(세계) 전체에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례가 넘치는 생지옥이 현현할 것이다. 이는, 만약 금융복합체가 부도 위기를 맞는 경우, 국가와 사회가 그리고 심지어 세계가 어떻게 해서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이른바 대마불사다. 어떻게 보면, 이런 금융복합체들은 존재 그 자체가 세계의 안녕을 위협하는 행위다.
더욱이 이런 '고질라'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투자은행 지주회사' 혹은 이른바 CSE(Consolidated Supervised Entities)란 요상한 법인체로 지정되어 규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자기자본(금융기업 법인 소유의 재산)의 50~70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도 괜찮고, 말도 안될 만큼 허술한 증권을 발행해도 문제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들은 고수익이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큰 투자를 일삼았다. 헤지펀드 및 사모펀드에 투자하거나 대출하고, 장외파생상품(예컨대 세계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있는 CDO, CDS 등 구조화 상품)을 대거 매입했다.
그러다가 이런 위험한 투자부문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먼저 헤지펀드가 파산하고, 이에 자금을 제공한 대형 금융복합체의 도산 위기로 이어진 것이 2008년 가을의 세계금융위기다. 물론, 미국 정부는 금융복합체 파산의 사회적 여파가 두려워 구제금융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초대형 금융복합체들이 이토록 위험한 투자를 오랫동안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금융업은 일반적으로 '남의 돈'을 위탁받아 장사하는 업종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 간 큰 금융복합체라도 '남의 돈'으로 모험을 즐길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도록 한 장치가 있었다. 바로 '자기계정 투자'(proprietary trading)다. '남의 돈'이 아니라 '금융기관 자신의 돈(=자기계정)'을 만들어 위험투자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융복합체들이 '자신의 돈'을 만들 수 있었던 계기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지배구조를 기존의 '파트너십'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이다. 아무튼 미국 금융기관은 이런 '자기 돈'으로 직접 헤지-사모펀드를 운영하거나 아니면 이런 펀드에 대출 및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법 등으로 엄청난 수익을 거둬 왔다. 2006년 말 현재 미국 5대 금융기관의 총수익 중 70%가 자기계정 투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자기계정 투자'는 미국 금융기관들이 대규모로 고수익-고리스크 영업을 벌일 수 있었던 구조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구제금융은 받고, 대출은 줄이고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그는 지난 1월 24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금융개혁 방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융기관 대형화와 자본시장통합 등 우리만의 갈 길을 계속 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뉴시스 |
오바마 행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미국 은행들의 행태를 한번 보자. 납세자의 돈으로 겨우 명줄을 이은 이들은 가계 및 기업 등 생산적 부문에 대한 대출을 오히려 크게 줄였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2009년 12월 발표한 자료(Flow of Funds Accounts of the United States)에 따르면, 미국 은행들의 가계대출은 2008년 3분기 -621억 달러, 4분기 -2533억 달러를 기록했다.
2009년에도 1, 2, 3 분기에 각각 -1607억 달러, -2140억 달러, -351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는 미국 은행이 '가계에 대출한 자금'보다 '가계로부터 상환 받은 자금'이 2008년 3분기엔 621억 달러, 4분기엔 2533억 달러, 2009년 2분기엔 2140억 달러 더 많았다는 이야기다. 가계에 대출하기는커녕 상환을 강행하면서 미국 시민들의 목을 죄었던 것이다. 기업대출 역시 2009년 들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2분기 -2480억 달러, 3분기 -283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은행들이 금융위기 이후 열심히 한 일은, 첫째 가계와 기업으로부터 예전에 빌려줬던 돈을 받아내는 것, 둘째 자기계정을 통한 위험투자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금융기관이 본업인 중개업(예금 및 대출)을 열심히 하면, 실물경제에 대한 지원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자기계정 투자를 열심히 하는 경우, 해당 기관이 떼돈을 벌지는 몰라도 실물경제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자기계정 투자는 문자 그대로 금융기관이 '자신의 돈'과 '자신의 책임'을 기반으로 투기 활동을 벌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4분기, 순이익 49억500만 달러라는 '어닝 서프라이즈'을 기록한 골드만삭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미국의 '금융기관 부활'은 가계 및 기업에 대한 대출을 회수하면서 실물경제를 오히려 압박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금융독점체들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열심히 한 다른 일도 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을 경영진과 직원들에게 거액의 보너스로 배분하는 행위이다. '구제금융도 갚지 못한 주제에'라고 시민들이 욕설을 퍼부어도 꿋꿋하게 버텼다. 미국 금융독점체들에게도 '제 갈 길'이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단테의 금언,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을 따르는 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토록 많다.
오바마 금융개혁안의 핵심
이에 따라 오바마는 '은행' 혹은 '은행을 자회사로 보유한 금융기관(금융지주회사)'들이 헤지펀드 및 사모펀드를 보유하거나 이런 펀드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금융개혁의 핵심적 방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자기계정 투자'도 금지할 계획이다. 안정성이 중요한 상업은행 부문을 투기성이 농후한 '투자은행' 부문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미다.
다른 한편, 초대형 은행들의 규모와 영업범위를 제한하는, 상당히 반시장주의적으로 보이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연두 국정연설에서는 '은행세'를 신설해서 금융기관의 지나친 비대화를 억제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정도 되면, '막 가자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기존 금융시스템의 수정이 아니라 전복 수준이다. 한국의 금융화론자들이 지난 1997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해온 '금융기관 대형화, 겸업화' 역시 철 지난 구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07년 이후 이뤄낸 자본시장통합법, 금융지주회사법, 공정거래법 등의 재개정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열심히 좇아왔는데, 앞서 가던 미국이 갑자기 뒤로 돌아 역주해오는 바람에 정면충돌의 가능성도 있다.
더욱이 오바마 대통령의 금융개혁 제안에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 유럽중앙은행 트리세 총재, 심지어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까지 동의하는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국제금융 질서가 다시 한편 재편될 가능성이 점점 더 농후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월 27일 연두 국정연설에서 "이미 대형은행의 로비스트들이 금융개혁 법안을 죽이기(kill) 위해 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최대 은행 바클레이, 독일의 최대 은행 도이치방크, 글로벌 금융기업인 스탠더드 차터드 등의 최고경영자들은 세계경제포럼에서 오바마의 금융개혁안을 '인기를 끌기 위한 정치 전술'로 몰아 붙였다.
한편, 금융개혁이라는 '전장'은 금융권/정치권, 선진국/개도국, 영미/EU 등 너무나 다양한 전선으로 찢어져 있어, 어디로 튈지 감히 예측하기 힘들다. 더욱이 최근 세계증시의 추락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구적 차원의 금융구조 개혁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악재를 낳으며, 세계 각국의 주식 투자자들을 적으로 만들 것이다. 현재로서 확실한 것은 '금융개혁'을 둘러싼 세계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 외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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