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에서 김 변호사는 그간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내용을 소개했다. 또 지난 2007년 양심고백 당시 단편적으로만 알렸던 내용들을 자세히 풀어 설명한 부분도 있다.
삼성 비리를 수사했던 조준웅 특별검사를 만나 나눈 이야기,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일가의 모습, 삼성 임원들이 검사들에게 돈 봉투를 건네는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 재판을 앞두고 삼성 구조본이 시나리오에 맞춰 조직적으로 증언 조작을 하는 장면 등은 지난해 말 특별사면을 받은 이건희 전 회장, 그리고 삼성에게서 돈을 받았던 정·관·법조계·언론계 관계자들을 다시 긴장시킬 것으로 보인다. (☞ 책 소개 : 이기는 게 정의'?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 그는 책 출간 직전 <프레시안>과 만나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프레시안(김봉규) |
"실명 거론된 이들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다"
책이 서점에 배포되기 하루 전인 28일,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김 변호사와 만났다. 책이 나오기까지 워낙 다양한 우여곡절을 겪은 탓인지, 이날 김 변호사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소회를 묻는 질문에 김 변호사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책을 내다보니, 불가피하게 실명을 거론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모욕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지적하고, 이를 고치자는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실명을 거론했다."
책을 내는 과정에서 김 변호사가 가장 고민한 것도 삼성 비리에 연루된 이들의 실명을 과연 공개해야하는지 여부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비리 연루자의 가족들이 겪을 피해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책의 2부에 포함된 "1999년 삼성 부도 위기"라는 장에 있는 "연예인 윤락 사건과 삼성 구조본"이라는 절에 있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 부분은 양심선언 직후,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짧게 언급했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한 내용인데 김 변호사는 당시 사건에 연루된 삼성 임원들의 실명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검사의 이름만 적었다.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하며 김 변호사는 "사건에 연루된 임원들의 가족들이 당시 사건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된다. 아무런 죄가 없는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말을 거듭했다.
"책에 이름 없다고, 비리 면죄부 주면 안된다"
실명 언급을 가급적 줄이려한 이유는 또 있다. 김 변호사가 알고 있는 것은 삼성 비리 전체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김 변호사가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도 삼성 비리 연루자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단지 김 변호사의 책에 이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이들이 면죄부를 받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것.
예컨대 검사 출신인 그는 삼성이 법원과 검찰을 상대로 벌인 로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가 검찰을 상대로 한 불법로비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고 해서, 행정부나 언론 등 다른 영역에서는 불법 로비가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칫 하면, 이른바 '떡값검사' 명단 공개가 비리를 저질렀으면서도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2007년 양심선언 당시, 삼성으로부터 검은 돈을 받은 공직자 명단을 최소한만 공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낸 책에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여러 형태로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내 가족에게 피해가 가는 일만큼은 없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 변호사의 가족은 양심선언 이후 쏟아진 온갖 흑색선전으로 큰 고초를 겪었다. 이번 책 출간이 당시의 끔찍했던 경험을 반복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삼성에서 100억 원 받아놓고 왜 '배신'했느냐'는 물음에 답한다"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김봉규) |
이번 책에서 김 변호사는 이런 논리에 대해 차근차근 반박했다. 양심선언을 통해 삼성 비리를 드러낸 것은 이건희 전 회장 일가의 잘못을 공개한 것일 뿐이며, 삼성 그룹에 해를 끼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길게 보면, 기업의 투명성을 높여서 삼성과 한국 경제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 따라서 '배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오히려 배신을 한 쪽은 삼성이다.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찾아낸 검사를 뽑아 비자금 소굴에 배치했으니 말이다. 또, 김 변호사는 삼성 입사 당시 "법률 업무를 맡지 않겠다. 경영 업무를 배우고 싶다"라고 밝혔고, 이에 대해 약속을 받은 상태였다고 밝혔다. 변호사 노릇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삼성 측이 변호사 노릇을 억지로 맡겼으니, 약속을 깬 쪽은 오히려 삼성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삼성 측이 내놓은 반박자료에서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도 바로잡았다. 삼성에서 일하며 받은 돈이 100억 원이 아니라고 했다. 이번 책에서 그는 삼성에서 받은 급여 명세서를 기초로 이런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삼성에서 큰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00억 원에는 훨씬 못 미친다.
"손가락만 보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봐달라"
온갖 흑색선전으로 인해 김 변호사가 입은 상처는 여전히 커보였다. 이번 책에서 충분한 해명과 반박을 담으려 했지만, 어떤 독자들이 보기에는 부족해보일 수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 변호사는 "개인적인 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 갖지 말아 달라"는 말을 거듭했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만 보느냐"는 말도 자주 했다. 서점 배포를 앞두고, 인쇄가 진행되는 내내 김 변호사가 걱정한 것도 이 대목이었다. "이번 책으로 흑색선전에 대한 해명은 할 만큼 했다. 그러니 이제는 제발 문제의 본질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게다.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문제의 본질'은 뭘까.
바로 '부패'다. 온갖 인맥으로 끈끈하게 얽혀 있는 탓에 다들 그 심각성에 대해 둔감해져 있는 부패구조다. 그의 말은 이렇다.
"부패에 너무 둔감해져 있는 세태가 안타까웠다. 책을 낸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렇다. 삼성에서 내가 겪은 일들은 이런 부패 구조의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내가 공개한 내용이 부패 구조의 전체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다만 이번 책 출간이 전체 부패 구조에 대한 각성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금 제대로 내고, 자식을 군대 보내야 '진짜 보수'"
김 변호사는 이른바 '보수 세력'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의 양심선언은 결국 법을 제대로 지키자는 취지였는데,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오히려 비난하고 나섰다는 게다. "세상에 법을 무시하자는 보수 세력도 있느냐"는 한탄이다. 이 책에서도 그는 "납세와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보수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보수 세력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자는 쪽인데,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지적이다.
이건희 전 회장은 세금을 탈루했을 뿐 아니라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보수 세력이 먼저 이 전 회장을 비판하고 나서야 마땅한데 현실은 달랐다.
"나도 어쩌면 보수 세력일 수 있다. 사회에서 누린 게 많으니 말이다. 내가 이야기 한 것도 주로 보수적인 가치였다. 법을 지키자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런데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나를 비난하고 나섰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보수 세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단지 부패 세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덜 부패한 세력이 이들과 맞서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부패 세력은 상대적으로 덜 부패한 세력에게 종종 '좌익,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우스운 일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그저 부패한 정도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만약 통일이 되면, 부패 세력이 어떤 빌미로 덜 부패한 세력을 공격할지 궁금하다."
"이건희 사면, 왜 주범만 풀어주고 종범은 빠뜨리나"
▲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씀, 사회평론 펴냄. ⓒ프레시안 |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조치는 책 출간 작업이 대부분 마무리된 시점에 이뤄졌다. 그에게 이 전 회장 사면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법원 판결을 무효로 만드는 일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의 은사'라는 말이다. 이런 특별한 일이 이 전 회장 단 한 명을 위해 이뤄졌다. 체육대회 유치 로비에 나서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나라꼴이 우스워졌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말은, 기왕 은사를 베풀려면 다 풀어줄 것이지 왜 종범(從犯)은 빠뜨렸느냐는 것이다. 주범(主犯)인 이건희만 풀어줬으니, 지시에 따라 움직인 종범들이 억울해 할 것 같다."
기자와 만날 때면 김 변호사는 작가 이병주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과거사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내가 한 이야기는 역사도, 신화도 아니고 야사에만 남게 됐다"고 덧붙이곤 했다. 이번 책도 그래서 정사가 아닌 야사의 기록이라고 했다. 조준웅 특검이 삼성 비리 의혹의 몸통에 대해서는 사실상 덮어주다시피 했고, 그나마 기소된 내용도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나왔으며, 일부 유죄가 확정된 것도 대통령이 나서서 사면했으니 말이다.
"거악과 한몸이 된 검찰, 거악에 맞서려면 검찰과 싸우란 말인가"
오랫동안 검사로 지냈던 그는 모든 일이 법과 제도를 통해 풀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가 직접 겪은 일들이 법과 제도에 따른 공적 절차를 거치는 동안 깡그리 무시됐다. 그의 심경을 들었다.
"검찰만 제 구실을 하면, 큰 문제는 없다. 법을 어긴 자들에게 적절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법과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 검찰은 그렇지 않다. '살아있는 권력', 또는 재벌처럼 '죽지 않을 권력'에 대해서는 그저 눈치만 볼 뿐이다.
이와 비교되는 게 일본 검찰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마냥 깨끗하기만 할까. 그들이 유난히 한국 검사들보다 똑똑하고 유능할까. 그렇지 않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요한 역사적 고비에서 일본 검찰은 '거악'과 맞서는 모습을 보였고, 한국 검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고 본다.
이대로 가면, 법에 따른 공적 수사 절차를 아무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후진국이 된다는 이야기다. 한국 검찰이 '거악'과 싸우기는커녕 '거악'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거악'에 맞서려는 이들은, 결과적으로 검찰과 싸우게 된다. 검찰과 '거악'이 한 몸이 된 상태니 말이다. 이게 정상일까. 그렇지 않다. 정의를 좇는 이들이 국가기구를 적으로 돌리는 상황은 혁명 시기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이 법과 제도에 따라 풀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이런 상황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책이 나오는 이 시점까지도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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