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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천사의 손'일까, '악마의 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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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천사의 손'일까, '악마의 손'일까?

[망국 100년] 자본 체제의 탄생

지난 번 글에서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라는 내 의견을 밝혔다.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9세기 중엽까지 자본 체제에 대한 일반적 생각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라 하는 기술적(descriptive) 접근이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 하는 규정적(normative) 태도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념으로서 규정적 태도는 19세기 말에 형성되어 20세기에 들어와 널리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자본의 힘을 사회 질서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 설정을 뒷받침하는 도그마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 하는 믿음이다.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에 대한 믿음이므로 '도그마'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보는 관점은 애덤 스미스 이래 고전경제학의 핵심 명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인간이 이기적 특성을 보편적으로 가진다는 가설적인 명제이지,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기만 하다는 믿음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믿음의 형태 자체가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특이한 현상이었다. 19세기 말 기술만능주의가 풍미하는 세태가 아니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처럼 편협한 도그마가 그토록 널리 유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근대 자본 체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오랫동안 발전해 왔다. 황런위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재정 옮김, 이산 펴냄) 4장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에서 시작해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제임스 해링턴의 <오세아나 공화국>(1656), 존 로크의 <통치 2론>(1689)을 거쳐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 이르기까지 이 흐름이 개관되어 있다. 이 장 제목을 "자본주의 사상 체계의 형성"이라 한 것을 보면 황런위는 이 흐름이 자본주의 사상의 발전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20세기에 자본주의 이념이 맹위를 떨친 결과에 비춰보면 이 과정이 연속적인 인과관계 속에 진행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를 기준으로 과정을 재단하는 비역사적 관점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과정 전개의 매 단계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음미해보면 이 과정의 흐름이 그리 연속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다. 자본 체제 발전의 각 단계에서 주어진 과제에 대한 개별적 대응인 것이다.

<군주론>부터 살펴보자. '현실주의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정치를 도덕적 주제 아닌 기술적 주제로 다뤘다. 황런위가 마키아벨리를 자본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지목한 것은 이 책 속에 "중산층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는 의도가 보인다거나, "이미 자본주의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자유도시를 이상적인 도시로 내세웠다거나, 유물론을 주장했다거나 하는 이유인데, 그리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과에 맞춰 해석을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군주론>의 의미는 이상주의 정치론에서 현실주의 정치론으로의 전환에 있다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장-자크 루소나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군주들의 통치 수법을 까발림으로써 군주제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 이 책의 숨은 목적이라고 본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냉소적 필치로 일관한 책이다. 그런 성격의 책에서 미래의 가치 체계에 대한 능동적 비전을 찾는다는 것부터 무리한 일 같다. 이 책에 선구적 의미가 있다면 정치의 도덕적 의미가 약화되는 근대 유럽의 변화를 앞서서 보여줬다는 데 있으며, 이것은 마키아벨리 시대 이탈리아의 혼란에 빠진 정치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에 나온 홉스, 해링턴, 로크의 저술은 당연히 잉글랜드 내전(1641~51)에서 명예혁명(1688)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를 배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변화는 기본적으로 왕권의 제한을 향한 것이었다. 왕의 전제권력을 탈피하는 변화라 하여 민주주의 발전으로 찬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역시 후세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류가 다분히 개재된 것이다. 왕이 이 때 권력을 양보한 상대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과 유산계층, 즉 중간 권력 담당자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가 1603년 엘리자베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열렸다. 큰 나라의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 강화를 꾀하면서 신흥 유산 계층만이 아니라 다수 귀족의 불만을 샀고, 1625년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 재위중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찰스 1세가 1629년부터 11년간 의회 소집을 거부, 의회 세력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있다가 1640년 부득이한 필요로 의회를 열자 의회가 왕권에 대항하는 조치를 확대해 나간 끝에 내전에 이르게 되었다.

1646년 찰스 1세가 체포되고 1649년 처형된 후 9년간 크롬웰의 군사 독재를 겪은 후에 1660년 의회가 찰스 2세를 불러들여 왕정이 복고되었다. 크롬웰의 극단 노선에 환멸을 느낀 의회 세력이 타협책을 찾은 것이었다. 1685년까지 이 타협책은 불안하게라도 유지되었으나 제임스 2세 즉위 후 왕의 가톨릭 비호 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반대 세력이 네덜란드에서 오랑쥬 공 빌렘을 영입해 윌리엄 3세로 즉위시킴으로써 명예혁명이 진행되었다.

내전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비하면 약소국이었고, 네덜란드에 비하면 후진국이었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을 따라가고 싶어 한 반면 반대파에서는 자유도시들이 주도권을 쥔 네덜란드를 흠모했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란 으리으리한 이름을 붙인 것은 극도로 미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네덜란드의 잉글랜드 정복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시각도 유력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일부 세력이 오랑쥬 공과 합작해 정변을 일으킨 것임은 아무리 미화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윌리엄 3세 즉위 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긴밀한 관계 속에 경제 활동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옮겨지고 네덜란드 해군력도 쇠퇴해 잉글랜드가 경제적-군사적 약진의 계기를 가지게 된 결과를 보면 의회 세력의 '매국' 행위로 볼 수는 없겠다. 아무튼 명예혁명을 계기로 잉글랜드의 자본 체제 지향이 확정되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고 크롬웰의 군사 독재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를 비유한 '리바이어던'은 미증유의 괴수의 모습이다. 전에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나타나는 것을 홉스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류는 일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는 권력 추구욕이다. 이는 인간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강렬한 쾌락을 바라거나, 보통의 권력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수단과 힘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1장, 황런위 책 241쪽에서 재인용)

인간성을 일의적으로 규정하려는 태도는 전통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안정된 질서 속의 인간에게는 여러 특성이 균형을 이루고 나타나는 데 반해 혼란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은 한 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회와 왕권 사이의 무장투쟁, 그리고 왕권을 굴복시킨 후 동지들까지 숙청한 크롬웰의 철권통치를 보며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홉스의 노력이 <리바이어던>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로크의 <통치 2론 제2논문>이 나온 것은 의회 세력과 윌리엄 3세 사이의 '계약'으로 반세기를 끌던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변이 비로소 안정된 틀을 짜고 있던 시점이었다. 홉스가 불안한 눈길로 내다보던 새로운 국가 체제를 로크는 신뢰감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로크가 사유재산권에 대한 안정된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상에 기여한 것으로 황런위가 간주했지만, 로크는 이론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확고한 중상주의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중상주의 체제도 자본 체제와 공유하는 요소가 있지만, 대혁명 전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에서 보는 것처럼 중상주의는 질서의 근거를 시장에게 내맡기지 않는다는 본질적 차이를 가진 것이다.

마키아벨리에서 로크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전개는 경제 사상보다 정치 사상의 발전이었다. 봉건체제에서 정치 권력은 현상 유지에 기본 목적을 둔 치안의 주체였다. 농업 사회의 생산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 상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권력의 목적이 경쟁과 변화로 옮겨간다. 하나의 국가 사회 안에서도 여러 요소들이 권력을 놓고 경쟁하게 되면서 정치 참여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정치의 새로운 구조와 원리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 애덤 스미스(왼쪽)의 낙관적 <국부론>(1776)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1826)이다. 미시적 효율성에 도취된 낙관론의 홍수에 맞서 거시적 지속가능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맬서스가 제기한 문제에 200년간 효과적 대응이 없었다는 데서 '근대성'의 구조적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천사의 손일까, 악마의 손일까? ⓒ프레시안

명예혁명을 통해 경제 선진국 네덜란드를 발전 모델로 확정하고 네덜란드와 경제-군사 양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은 잉글랜드는 18세기 전반을 통해 압도적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의 국력을 추격해 가고, 1756~63년의 '7년전쟁'을 계기로 우월한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은 한 세기에 걸친 국력 성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시장을 질서의 주체로 삼는 자본 체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고전경제학이 <국부론>에서 출발했다고 할 만큼 이 책에는 중요한 경제 개념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경제 현상에는 자체의 원리가 내재해 있으므로 외부 권력의 개입이 필요 없고, 개입이 적을수록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고대 이래 정치 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 있던 경제 현상을 해방시키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완전 자유방임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 당시까지 영국의 경제 정책이 프랑스에 비해서는 자유방임적인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개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 노선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스미스는 개입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지금 '네트워크 산업'이라 부르는 분야처럼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이 필요한 공공 영역의 존재를 스미스도 인정했다.

시장 원리에 대한 스미스의 믿음은 계몽사상의 자연법 관념과 결합해 자유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무렵 궤도에 오른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과 유통이 대량화 되는 상황에서 시장 원리의 유효성이 폭넓게 확인되면서 '경제 자유주의'가 19세기 유럽을 풍미했다. 그 결과 시장에서 만들어진 자본 권력이 자유주의의 다른 측면(사회와 정치)을 압박하기에 이르자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자유주의의 억제 내지 수정 제안이 나오게 된다.

자본 권력이 공산주의와 제도학파 등의 도전에 반동적인 대응으로 시장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이념이 나타났다. 자본체제의 타당성을 넘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파국을 겪으면서 이 이념은 힘을 잃었지만 냉전의 압력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1970년대의 경제 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라는 간판 아래 다시 모습을 나타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음 회에는 산업혁명의 성과와 경제 자유주의가 상승 효과를 일으켜 자본 체제를 심화하는 19세기 상황을 얘기하겠습니다. (☞블로그 바로 가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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