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모두 '영화진흥위원회의 2010년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운영자 선정 결과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참석중이었다. 전국 각지의 미디어 및 영상집단을 아우르는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와 '언론사유화저지 및 미디어공공성확대를 위한 사회행동'이 함께 주최한 자리였다. 기자회견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영진위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 25일 영진위가 미디어센터 사업운영자 공모 결과를 발표한 뒤, 미디액트 스탭들은 물론 미디액트 수강생과 이용자들, 독립영화 감독들이 27일 오전 영진위 건물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 |
영진위가 홈페이지에 25일자로 독립영화전용관과 미디어센터의 사업자 선정 결과를 발표하고 난 뒤, 독립영화인들 사이에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선정결과를 확인한 기자는 26일 오전부터 이곳저곳에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모두들 오히려 기자에게 한목소리로 물어댔다. "시민영상문화기구가 대체 어떤 단체인지 아느냐." 미디액트 대신 미디어센터 사업자로 선정된 (사)시민영상문화기구의 정체와 인적구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정사업자 없음'으로 발표가 났던 1차 공모 당시에는 지원하지 않았던 단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영진위에 확인한 결과, 시민영상문화기구는 재공모 공지가 나기 불과 6일 전인 올해 1월 6일 설립된 신생 법인으로 드러났다. (▶관련기사 참조 : 인디스페이스에 이어 미디액트도 사라지나.) 즉, 이 단체는 출범한 지 불과 일주일여 만에 지원사업 공모에 응해 사업자로 선정된 것이다. 단체를 설립해 사업자로 선정되기까지 20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디어센터를 운영할 능력과 자질이 검증되기는커녕, 단체가 제대로 구성이나 돼 있는지 확인되지도 않은 상태다.
8년간 착실하게 미디액트를 운영해오며 성과와 노하우를 축적해오고 있던 미디액트 측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영상문화기구의 구성원 명단을 포함한 프레시안의 기사가 나간 뒤에 그 당황은 분노와 어이없음으로 바뀌었다. 애초 미디어센터를 건립하고 운영하면서 영진위에 제안을 해 지원을 받아오며 8년간 눈부신 성과를 내온 미디액트는 졸지에 자신들의 사업을 중단하고 정체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단체에 공간을 뺏겨야 하는 셈이 됐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충격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들은 그간 이곳에서 수업을 받고 이곳의 장비들을 사용해온 미디액트의 수강생들과 이용자들이었다.
▲ 기자회견에서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이 발언을 하는 도중 조경자 감독이 문정현 감독 옆에 서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문정현 감독은 그간 미디액트에서 노인, 지적장애인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해 왔으며, 조경자 감독은 서울노인복지센터와 미디액트가 함께 주관한 영상미디어아카데미를 통해 문정현 감독에게 영화를 배웠다. 82세의 나이에 연출한 조경자 감독의 <꼬마 사장님과 키다리 조수>는 2009년 여성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벌, 시네마디지털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프레시안 |
77세의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한 조경자 감독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미디어가 뭔지도 몰랐던" 조경자 감독이 처음 카메라를 잡게 된 것은 2005년 서울노인복지센터와 미디액트가 함께 주관한 영상미디어아카데미에서였다. 그의 세 번째 다큐멘터리 단편 <꼬마 사장님과 키다리 조수>가 2009년 여성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되면서 조경자 감독은 영화제에 출품한 최고령 감독(당시 82세)으로 조명을 받았다. 이 영화는 작년 인디다큐페스티벌과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에도 초청돼 상영됐다. 노인, 이주여성, 장애인 등 사회 소외계층에 '찾아가는 미디어 교육'을 하며 미디어 공공성을 추구했던 미디액트의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해 마이크를 잡은 조경자 감독은 "노년에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꼬마 사장님과 키다리 조수>로 작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비롯해 일년 동안 온갖 영화제를 다니며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며 내 운명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뻐하던 와중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너무 슬프고 충격적이다.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이런 기쁨을 나뿐 아니라 다른 노인들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영진위 비판에 한목소리를 냈다. 그의 '영화 스승'이기도 한 문정현 감독이 앞에 나와 발언할 때에는 "우리 사제지간이에요"라며 문정현 감독의 팔짱을 끼고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잡아주기도 했다.
<후회하지 않아>, <탈주>의 감독이자 인디포럼작가회의의 의장을 맡고 있는 이송희일 감독은 "요즘 영진위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화진흥위원회가 아니라 '유령진흥위원회'라는 생각이 든다"며 말문을 뗐다. "시민영상문화기구나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자로 선정된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나, 17년간 독립영화를 해왔지만 생전 처음 보는 단체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이 독립영화를 위해 무얼 해왔단 말인가. 그런 사람들에게 인디스페이스도 미디액트도 뺏기는 것이 너무도 분노스럽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이송희일 감독은 영진위가 작년 별다른 근거 없이 단체지원 사업에서 인권영화제와 인디포럼, 노동영화제 등을 탈락시켰던 것과 관련, "인디포럼과 인권영화제가 함께 영진위를 대상으로 내일부터 소송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 <후회하지 않아>를 연출하며 한국 독립영화의 힘을 보여준 바 있는 이송희일 감독이 기자회견 중 발언대에 나와 영진위 규탄에 목소리를 보탰다. 그는 "영화진흥위원회는 '유령진흥위원회'냐"며 수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프레시안 |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은 이번 영진위의 결정이 상식적인 정책집행과정의 원칙을 무시한 기관임을 스스로 증명했다며 강도높게 영진위를 비판했다.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의 성과를 하루아침에 폐기하고,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운영자를 심사할 역량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낸 결정이라는 것. 또한 시민들의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훼손했다며 비판했다. 이들은 영진위에 사업운영자 선정결과를 전면 백지화하고 이런 비합리적이고 몰상석적인 선정 과정에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의 정상화 대책을 마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발언을 마치고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이들은 사업자 선정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질문을 담은 공개질의서를 영진위에 제출했다.
시네마디지털영화제 신은실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는 이 상황에 대해 "아쉽고 걱정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특히나 디지털은 필름과 달리 영화 창작자의 접근성이 훨씬 쉬운 매체고, 미디액트의 공로가 그만큼 크다. 기자회견에서 발언하신 조경자 감독님만 해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됐다. 물론 감독님 본인이 감수성과 창작 욕구가 풍부하신 분이셨지만, 과연 미디액트가 없었다면 그런 분이 미디어 교육을 받고 자력으로 영화를 만들어 결국 영화제에 상영까지 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평범한 할머니가 감독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곳이 바로 미디액트다. 우리같은 디지털영화제에서는 그런 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영화제 상영작 중 미디액트 작업작도 많았다. 꼭 상영작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애인, 소수자 미디어 교육에서도 독보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며칠만에 급조된 단체가 과연 그런 두터운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영진위의 선정의 변을 보았지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해외의 미디액트 팬이 페이스북에 미디액트 팬페이지를 만드는가 하면 온라인 탄원서 페이지를 만들고 이 사태를 전하면서, 미디액트와 영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국경을 넘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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