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영등포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으나 버스 안은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신도림으로 가니 온통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김 씨는 "한두 번도 아니고, 올해 들어 유독 지하철 사고가 잦은 것 같다. 출퇴근길 스트레스가 크다"고 한숨을 쉬었다. 평소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던 퇴근길이 이날 두 배로 늘어났다.
▲화재 사고가 발생했던 24일 오전 서울 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 구내. ⓒ뉴시스 |
눈 오면, 비 내리면 멎는 지하철
'시민의 발' 지하철 운행사고가 잇따른다. 올해 초 폭설로 서울~경기 구간을 운행하던 지하철 1호선이 번번이 고장을 일으키더니 겨울비가 내렸던 지난 20일에는 지하철 2호선이 퇴근 시간에 멎어 홍대입구역에서 서울대입구역까지 11개 역구간이 전부 멈췄다. 이 때문에 주요 혼잡구간인 신도림역을 비롯해 서울 서부권 직장인들의 퇴근길이 큰 혼잡을 빚었다.
22일에는 사다리차가 전철 선로 위로 쓰러져 부천-인천 구간 지하철 운행이 3시간 가까이 전면 중단됐다. 24일 오전에는 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에서 불이 붙은 전동차가 20분이 넘게 운행하다 소방서 출동 뒤에야 운행을 중단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사고 거듭되는 지하철…3호선 또 운행 중단). 26일 오전에는 지하철 5호선이 차량정비 문제로 잠시 운행을 멈추기도 했다.
올해 들어 유난히 지하철 사고가 잦지만, 이는 결국 오래된 문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지연되는 설비투자가 그것이다.
지하철이 적자를 보는 사업이라서 그렇다. 관련 공사가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재정이 더 투입되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하다. 재정 투입 증가는 곧 관련 부문 세금투입 증가를 뜻한다.
15년 수명인 장비로 25년간 운행 지속
20일 사태의 경우, 고장의 근본 원인은 노후화된 설비였다. 서울 메트로에 따르면 이날 사고는 신도림역의 선로전환기(레일 방향 변환기)에서 발생했다. 이 장비는 내구연한이 15년에 불과하지만, 신도림역에 설치된 장비는 25년이 넘게 사용했다. 예고된 사고라는 얘기다.
서울메트로가 운영하는 지하철 1~4호선에 설치된 선로전환기는 총 491개. 이 중 내구연한이 지난 선로변환기는 전체의 52%인 255개에 달한다. 비슷한 사고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불이 붙은 채로 아찔한 운행을 한 3호선도 기본적으로는 노후화된 장비가 문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하철 터널 천장에 붙은 흡음재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 장비는 최근에 건설되는 지하철에는 쓰이지 않는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흡음재는 불연재(불이 붙지 않는 물질)가 아니라 난연재(불이 붙지만 연소는 방지하는 물질)인데, 열차 운행이 지속되다보니 천장에 쌓인 먼지가 발화물질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은 지하철 1, 3, 4호선 일부 구간을 운영한다. 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의 운영구간은 지상 노출 여부(지하 구간인 서울역~청량리는 서울메트로, 나머지 구간은 코레일)와 서울/경기 구분 지역(남태령~오이도는 코레일, 서울 시내는 서울메트로)으로 나뉜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코레일과 서울메트로, 도시철도공사(지하철 5~8호선)를 대상으로 정보공개청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초부터 작년 11월 말 사이 발생한 지하철 운행중단 사례는 서울도시철도공사가 0건, 서울메트로가 2건인데 비해 코레일은 24건으로 훨씬 많았다.
코레일은 구간 길이 375㎞, 운행횟수 2200회로 지하철 3개 공사 중 가장 넓은 구간을 담당하고 있다. 또 지상에 노출된 공간이 많아 눈 등 자연재해에 취약하다. 1월 초 집중적으로 코레일 운영 구간에서 사고가 잦았던 이유도 전동차 출입문에 내린 눈이 얼어붙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서울메트로 전동차량의 운행사고는 1건이었다.
선로교체 등 작업이 더뎌지는 이유다. 서울메트로(1~4호선)는 134.9㎞ 구간에 전동차를 2537회 운행한다. 서울도시철도공사(5~8호선)는 152㎞·1522회다.
대대적 구조조정도 악영향 미쳐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 효율화 등 구조조정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구조조정이 무조건적 비용절감 논리로만 이어지면서, 사고 발생 순간 대처에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 이는 운행중단 사태를 더욱 지연시키기 마련이다.
전동차 뒤편에서 선로 상황·승객 탑승 상황·난방 상황 등을 점검하는 차장이 없는 차량을 타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비상사태에 신속히 대응하도록 하는 차량관리원도 구조조정으로 인해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백남희 철도노조 선전국장은 "문산~서울역 구간에 차량관리원이 한 명도 없다"며 "비상사태 시 대응속도가 느려져 연착 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설비가 더 노후화된 코레일과 서울메트로에 차량정비인원이 많아야 마땅하지만 이들 공사에 적자가 더 심하다보니 오히려 인력은 적다.
▲예방못지 않게 중요한 게 비상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처다. 지하철은 시민의 '발'이다. 전쟁터가 아니라. ⓒ뉴시스 |
코레일이 지난해 준비한 '인력운영관련 노사협의 요청'에 따르면 코레일은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 따라 앞으로 5115명의 인력을 줄일 방침이다. 이는 코레일 정원 3만2000여 명의 16%에 달한다. 세부내역을 보면 장비현대화로 인해 2411명, 사업최적화로 인해 987명, 업무위탁, 즉 아웃소싱으로 1717명을 줄이도록 돼 있다.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현재 364개 시설반에 2334명의 정원은 앞으로 215개·1934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자동화 추진은 당연히 이뤄져야 하지만 안전점검마저 줄어드는 게 구조조정의 폐해다. 철도노조가 시설기술단의 점검 내역을 바탕으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1년만 해도 주요선로의 경우 2일 1회(시설관리원), 1주 1회(선임장)가 원칙이었던 도보순회는 지난 2008년 5월 개선 후 전구간 주1회 순회로 변경됐다. 그만큼 안전점검 수준이 떨어졌다. 결국 비용절감 논리에 따른 구조조정이 지하철 오작동 위협 수준을 높였다.
해결방안 없나…재정 지원 늘려야
공사 측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메트로는 "내구연한이 지난 장비를 교체하는 데만 1조2000억 원가량의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며 "대규모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실제 노후화된 지하철 설비 교체 소요는 많다. 승객안전을 높이기 위한 스크린도어 전 구간 설치, 신도림역·서울역 등은 승객 수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 역사 확장 공사를 추진 중이다.
법적으로 무조건 교체해야 하는 전동차와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발생한 대대적 내장재 설치 등에 밀려 부속품 교체는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는 지하철 이동비가 싸서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 서울메트로에 따르면 지난해 승객 1인당 평균운임은 727원이었다. 반면 수송원가는 1095원이다. 승객 한 명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공사는 약 368원씩 적자를 보게 된다. 이 적자분은 지하철 공사에 전가된다. 재정이 급격히 늘어나지 않는 이상, 지금의 공사 운영방식으론 해소가 불가능하다.
해법의 하나로 일단 사업다각화가 거론된다. 서울메트로는 "인력 구조조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일자리 창출 문제도 걸려 있다"며 "신사업개발단에서 사업다각화를 통한 수익창출·일자리 문제 해소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이 공사는 지난해 12월 28일 내년 4월 개통 예정인 부산~김해간 경전철 운영권을 따냈다. 보름 전에는 김포국제공항~한강신도시간 22㎞에 건설돼 2013년 완공될 예정인 김포 경전철 건설사업 관리자로도 선정됐다. 지하철 9호선을 민간사업자가 운영하는 것처럼 안정적인 수익을 낼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공사에만 해결방안을 맡기는 건 무책임한 대응일 수 있다. 지하철은 결국 '뚜벅이족' 서민의 발로 만들어진 운송수단이기 때문이다. 적자 문제를 개별 기업에 책임을 떠넘기기만 하면 결국 구조조정 외에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 철도의 사회적 가치를 감안해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경제적 가치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다.
세금이 대표적이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많이 내는 구조인 세금은 결국 부의 재분배 효과를 어느 정도 지닌다. 공사에 대한 세금투입 증대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세금을 보다 더 많이 지하철에 투입해 지하철 승객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다. '효율화'를 부르짖는 정부 아래서 증세는 어려운 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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