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밀어냄과 어울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밀어냄과 어울림

[철학자의 서재] 심광현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숫자 개념도 없고, 문자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의 나이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소유 의식도 없다. 배고프면 여러 명이 떼를 지어 숲이나 강으로 가서 들짐승과 날짐승과 물고기를 잡아온다. 잡아온 짐승이나 물고기는 사냥하러 간 사람이나 가지 않은 사람이나 보이는 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사람 등을 막론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누구도 음식을 개인 소유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사냥을 한 사람이 음식을 나누어 주는 권한을 행사할 뿐이다. 그는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기 위해 고뇌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한 사람이 불만스러워 한다. 이 때 여러 사람들이 불만을 가진 사람에게 가서 간지럼을 태운다. 마침내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이 웃는다. 불만이 해소된다. 그뿐이다.

그들의 표정은 늘 밝다. 자주 웃는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얼굴이 평안하다. 각자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한다. 24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꾸리는 일상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어울림의 지속이다.

이상은 2010년 1월 8일 밤에 방영된 문화방송(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간략하게 스케치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조에(Zeo)족'은 현재 브라질 북부 파라(PAra)주 아마존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원시부족으로 1987년 이후에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기심과 어울림

이 다큐멘터리는 이기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아울러 배타적 경쟁력의 제고를 통해 생산력의 향상과 개인의 자유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에 의해 발생되는 사회적 양극화를 비롯한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비록 (신)자유주의가 사회계약설에 입각하여 최소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제정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법은 개인의 더 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최대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 의식을 통한 평등한 공동체 사회 건설의 측면에 미흡한 편이다.

특히 최근에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에 막대한 자본력이 투입됨으로 인해 고급 정보의 독점 현상인 정보 불평등 문제와 지적 재산권의 강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기심을 근거로 하는 사적 소유 문제가 오늘날도 여전히 사회적 갈등 문제를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공자는 지위의 높낮이, 나이의 많고 적음, 경제적 풍요와 빈곤, 지식의 많고 적음 등에 관계없이 사적 이익에 밝은 사람을 소인(小人)이라 칭하고, 공적 의로움에 밝은 사람을 군자(君子)라 칭하면서 공적 의로움의 실현이 개인에게도 유익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개인의 사적 이익이 팽배할 경우, 이기심과 이기심의 충돌로 인해 병든 욕망에 의한 배타적 경쟁의 강화 때문에 건강한 공동체 사회의 유지가 어렵게 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나라에 바른 도리가 없는데 부자가 되거나 신분이 높아지는 경우를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는 가난함보다 고르지 못함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여, 상대적 박탈감에서 나타나는 소외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에서 나타나는 소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중심적 태도가 아니라 상대를 철저히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자기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한 말이나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줘라"고 한 말 및 "자기가 도달하고 싶으면 남을 도달시켜줘라"고 한 말 등은 자기와 남을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서고 싶을 때 상대를 밀어내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관점과 대척점을 이룬다. 곧 공자에 의하면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이루기 위해 배타적 경쟁이나 획일화의 방법보다 서로의 특성을 인정함과 아울러 잘 발휘하여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어울림의 태도가 중요하다.

다원적 사유와 통섭

▲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 생산과 문화 정치>(심광현 지음, 문화과학사 펴냄). ⓒ프레시안
전통 사회에 형성된 이러한 어울림 사상은 다원적인 사유가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심광현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 생산과 문화 정치>를 통해 새롭게 복원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21세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편재하는 인터넷과 방송과 통신망 등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유전공학(G)과 나노(N)와 로봇공학(R) 등이 발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P2P)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P2M)를 거쳐 기계와 기계의 관계(M2M)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시기는 근대에 형성된 분과 학문들의 따로 따로 연구가 힘을 잃는다. 각 분과 학문의 연구자들이 자기 분야 연구에만 머물러 있거나, 자기 분야 중심주의의 시각으로 다른 분야 학문을 포섭하고자 하는 태도는 닫힌 사고의 반영이다. 그러한 연구 태도는 문자 중심의 선형적인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통시적 자세이기에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을 실제적으로 고찰하는 면에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맥루언의 견해처럼 사유의 총체성으로서 비선형적인 역사의식과 청각과 촉각을 중심으로 하는 복합감각의 결합에 의한 공시적 사고의 지식사회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는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공학 등이 융합되거나 복합되어야 한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는 중심을 가정하는 환원주의적인 수직적 통섭(統攝)이 아니라, 차이들에서 시작하여 차이들로 되돌아옴과 아울러 서로 끌어 주며 함께 도약하는 비환원주의적인 수평적 통섭(通攝)이 필요하다.

특히 저자는 예술과 인문학과 과학기술 사이에 통섭이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들뢰즈가 지적한 감각(예술)과 개념(철학)과 기능(과학) 등의 의미를 차용하여, "개념이 통속적 견해로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창조적 감각의 견인이 필요하며, 반대로 감각이 카오스로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는 창조적 개념의 견인이 필요"하고, "예술과 철학은 감각과 개념의 창조를 통해 카오스/무한을 향해 가속하며, 반대로 과학은 기능의 창조를 통해 코스모스로 감속한다"고 지적한다. 곧 처음부터 강한 결합의 형태인 융합이나 통합을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제 간 교류와 복합 등의 약한 결합을 포함하는 다층적인 통섭이 중요하다.

이 시대에는 두뇌와 몸과 미디어 사회 사이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여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창작자의 감각과 두뇌와 몸과 행위와 반성적 종합을 하는 회로들의 순환적 연결망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자기조직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직관과 상상력과 시각적 패턴 인식 및 패턴 구성 등의 과학적 시각화가 과학적 창조성의 증진에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필요한 욕망의 방향

그런데 이러한 첨단 과학기술 혁명을 등에 입은 지식기반 사회가 우리에게 항상 밝은 미소만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회는 커뮤니케이션과 지식 생산의 차원에서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생산 관계의 내용에 따라 인간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특히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소수는 그들의 의지에 따라 다수의 민중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을 분석하면서 지적한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비록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무형 자산인 지식이 무한히 공급됨으로 인해 공급이 유한하다는 자본주의의 전제와 충돌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했을지라도, 지식과 정보의 독점과 통제로 인해 발생되는 소외에 대한 염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과학기술 혁명을 토대로 하는 문명의 방향에 대해 인문학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소망의 현실화는 자연의 변화와 같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가능하다. 곧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공 지능이 자연 지능을 능가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소외 문제를 극복하려면 "과학기술적인 집단지성을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해방하여 그 힘을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정치적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통제사회와 문화사회의 두 얼굴을 함축하고 있는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기술결정론 아니면 기술거부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윌리엄스가 말한 표의체계로서의 문화 개념과 맥루언이 말한 감각의 확장으로서 미디어 개념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 통시적 표의 체계의 지양과 대안적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 공시적 표의 체계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유비쿼터스 시대로 불리는 21세기에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바람직한 욕망의 방향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이기심을 반영하는 사적 소유의 확대를 위한 배타적인 경쟁의 추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배려함과 아울러 즐겁게 어울리는 평화로운 관계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