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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만국박람회, 20세기 백화점, 21세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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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만국박람회, 20세기 백화점, 21세기에는?"

[키워드 가이드를 만나다] 백화점 전문가 김인호 씨

대개 그렇듯 시작은 소박했다. 맡은 일을 조금 더 잘해볼 마음에 공부를 했는데, 그 결과를 남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썼다. 직장에서 실무자로 한창 물이 올랐던 대리 시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낸 책이 삶을 바꿨다. 책의 저자로 언론에 소개되자, 그는 살짝 부담스러워졌다. 언론의 관심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지식을 더 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그러다보니 하는 일에도 신명이 붙었다. 하는 일에 대해 공부하고, 그 결과를 다시 일에 반영하는 선순환 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일곱 권의 책을 냈고, 숱한 글을 썼다. 모두 그가 직접 하는 일에 관한 책이다.

그는 백화점 전문가다. 현대백화점에서 17년 동안 일했다. 자신의 직장을 평생의 키워드로 삼은 것이다. 처음에는 눈앞의 실무가 관심사였지만, 조금씩 폭이 넓어졌다. 실무에서 산업 동향으로, 그리고 역사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으로. 처음에 그는 경영학의 눈으로 백화점을 바라봤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그는 여러 개의 눈을 갖게 됐다. 건축학의 눈, 사회학의 눈, 역사학의 눈…등. 물론, 이런 다양한 눈으로 바라보는 곳은 늘 한결같다. 백화점 키워드 가이드 김인호 씨를 만났다.

"백화점 업의 본질?"

프레시안 : 많은 샐러리맨들이 자신의 일을 그저 밥벌이 수단 정도로만 여긴다. 진지한 관심을 쏟는 경우에도 '산업'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예컨대 휴대폰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휴대폰의 사회학, 휴대폰의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일은 흔치 않다. 백화점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돋보인 것도 그래서다.

김인호 : 현대백화점에 다니던 시절, 회사 부설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후배들에게 강의할 일이 많았다. 백화점 일에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후배들을 만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역사와 문화라는 틀로 백화점을 설명하는 일은 이런 자부심을 심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내가 책을 읽고 연구한 게 꼭 이런 목적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백화점을 너무 좋아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좋아하면 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 백화점 키워드 가이드 김인호 씨.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백화점 업의 본질은 부동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규정에 동의하는지 궁금하다. 만약 아니라면, 당신이 생각하는 '백화점 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김인호 : 이 전 회장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몇몇 백화점들이 부동산 가치가 매우 큰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이기도 할 게다. 또 백화점이 들어서면 근처 부동산 시장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백화점 업의 본질'이라고까지 보지는 않는다.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이래, 백화점은 시기마다 기능을 달리 해 왔다. 때로는 대자본의 '욕망환기 장치'였고, 때로는 도시의 '전인교육장'이었다. 여러 가지 규정이 가능하지만, 나는 '도시의 오아시스', '입장료 없는 생활 유원지'라는 규정이 지금의 백화점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다.

프레시안 : 아름다운 규정이기는 한데, 현실을 보면 또 다르다. 백화점이 낳은 폐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허영심과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점 외에도 지나치게 높은 입점 수수료 등 구조적인 문제도 크다.

김인호 : 한국의 백화점을 향해 쏟아졌던 비판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게 '바겐세일'을 남발한 것이었는데 이 점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정했다. 입점 수수료 문제는 분명 큰 숙제다. 현재의 수수료 수준보다 더 높일 수는 없는 상황이다. 백화점들이 해외 명품 업체에 대해서는 입점 수수료 혜택을 주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다른 입점 업체들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입점 업체와 백화점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백화점이 풀어야 할 숙제는 이밖에도 많다. 대형 할인 마트의 약진 등 유통 환경 변화가 대표적이다. 이런 다양한 도전에 백화점이 맞서는 길은, 결국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본다. '도시의 오아시스', '입장료 없는 생활 유원지'라는 본질 말이다.

"답은 역사에 있다"

프레시안 : <일본유통업체의 출점전략>, <세계의 유통기업>, <백화점의 문화사> 등 다양한 책을 썼다. 특히 눈에 띄는 게 <백화점의 문화사>다. 앞의 책들이 경영, 경제학적 접근을 했다면, 이 책은 문화사적인 접근을 했다.
ⓒ프레시안

김인호 : 회사를 다니다 일본 대학원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논문 주제는 백화점이었다. 당시 일본의 백화점들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이렇게 직접 발품을 팔아서 알아낸 것 외에 내가 참고한 자료는 사사(社史)였다. 회사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 말이다. 일본 기업들은 사사가 잘 정리돼 있는데, 몇 년 동안 일본 백화점 사사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특히 이세탄 백화점 관련 자료는 남김없이 읽었다. 코스케 키쿠오, 야마나카 칸 등 이세탄 백화점을 이끈 경영의 명인들에 관한 자료는 언제 읽어도 배울 점이 많다. 지금도 일본 백화점 사사를 자주 읽는데, 종종 묘한 감회에 빠지곤 한다.

특히 인수, 합병(M&A)으로 사라진 백화점의 자료를 볼 때면 더욱 그렇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츠코시 백화점도 결국 이세탄 백화점에 흡수됐다. 미츠코시는 한국 땅에 처음 들어선 백화점이기도 했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1906년 서울에 지점을 세웠는데, 충무로 1가, 그러니까 사보이호텔 맞은편이 그 자리다. 이 백화점은 1934년 지금 신세계 백화점 자리로 옮겼다.

족보가 끊어진 것은 미츠코시만이 아니다. 마츠자카야, 세이부, 소고우, 한신 백화점 등 한때 업계를 주름잡았던 백화점들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았다. 한국보다 역사가 앞서 있는 일본 백화점의 흥망사는 한국 백화점 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왜 어떤 백화점은 계속 살아남고, 어떤 백화점은 사라지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역사적 관점이 생긴다. 눈앞의 결과를 낳은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며 탐구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역사와 문화 등 인문학적 접근의 중요성도 알게 됐다.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 상품을 집대성한 백화점"

프레시안 : 백화점은 도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이지만, 막상 다른 유통업체와 근본적으로 구별짓는 백화점만의 특징을 콕 짚어보라고 하면 대답이 쉽지 않다.

ⓒ프레시안
김인호 :
'백화점의 본질'에 관한 질문인데, 여기서 필요한 게 인문학적 접근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서만 백화점이 갖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온갖 물건을 다 취급한다는 뜻으로 백화점(百貨店)이라는 기호를 택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백화점을 '디파트먼트 스토어(Department Store)'라고 한다. 디파트먼트(Department)가 부서, 부문이라는 뜻이니까 여성의류, 남성의류, 잡화 등 부문별로 구분된 매장이라는 표현인 셈이다. 공간 별로 상품 분류가 잘 돼 있어서 편리하다는 기능성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같은 영어권 국가인 영국에서는 '유니버설 프러바이더(Universal Provider)'나 '빅 스토어(Big Store)'라는 표현이 쓰인다. "무엇이든 있는 곳"이나 "대형 상점"이라는 뜻이다. 기능보다는 규모에 초점을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백화점이 프랑스에서 처음 생겼고 유럽 다른 나라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점을 떠올리면, 규모에 초점을 둔 표현이 백화점의 원래 모습에 가까우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규모를 강조하는 공간에서 기능을 중시하는 곳으로 진화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백화점이 처음 생겨났을 때,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비유하는 이들도 많았다. 다양한 상품, 지식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 백과사전이 '글자 순서'라는 체계에 따라 지식을 분류했다면, 백화점은 공간 배치로 상품을 분류했다. 과거에는 상품이 중구난방 흩어져 있었지만, 백화점이 생긴 뒤에는 카테고리(범주)에 따른 공간적 편집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하고, 백화점 건물이 높아진 뒤에는 지금처럼 층별로 상품군을 정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지하층은 식품, 1층은 잡화, 2, 3층은 여성의류, 남성의류는 4층, 가정생활용품은 5층이라는 층별 구성이 일반화 됐다. 백과사전의 독자가 글자 순서에 따라 지식을 찾는 게 자연스럽듯, 백화점 고객은 층별 순서에 따라 물건을 찾는다. 고객은 '1층=잡화, 2,3층=여성의류, 4층=남성의류'라는 체계를 알파벹 순서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백과사전의 탄생은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디드로, 달랑베르, 몽테스키외 등 '백과전서파(Encyclopediste)'로 불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학문과 기술을 집대성한 출판물로 민중을 계몽하려 했다. 반면, 백화점의 탄생은 19세기 유럽의 만국박람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갖 사물이 전시된 만국박람회는 당대 과학기술의 결정체를 보여줘서 민중을 계몽하는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 생겨난 곳 역시 프랑스인데, 1852년에 파리에 세워진 봉마르세가 그것이다. 백화점은 '백과전서파(Encyclopediste)'의 역사와 닿아 있다. 이렇게 생겨난 백화점은 곧 유럽 전역과 미국, 일본으로 퍼졌고 20세기 도시 문화를 상징하는 곳이 됐다. 19세기에 만국박람회가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백화점이 있었던 셈이다.

"'문화와 교양의 터전'으로서의 백화점을 꿈꾼다"

프레시안 : 그런데 벌써 21세기에 접어든 지 10년이다.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 등으로 인해 유통산업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상품을 공간적으로 분류하는 백화점의 기능은 이런 변화 속에서 퇴색돼 간다.

김인호 : 나 역시 21세기 백화점의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내가 찾은 답은 '문화'다. 다시 박람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최초의 백화점인 '봉마르세'가 만국박람회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서양문화사를 보면, 19세기는 박람회의 시대다. 런던 만국박람회가 1851년에 열린 후, 서양은 박람회의 시대로 돌입한다.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미싱 등 새로운 발명품이 출품됐고, 이들은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당대 최고의 건축물에 전시됐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파리의 생시몽주의자들은 런던 만국박람회를 보며 산업유토피아 건설을 꿈꿨다. 이들은 파리 만국박람회의 실현을 통해, 민중을 계도하려 했다. 일상과 동떨어진, 철골과 유리로 된 거대한 공간 안에 모든 새로운 사물을 옮겨 놓는다면, 인간 이성의 힘에 눈 뜰 수 있는 교육 공간이 생긴다고 봤다. 혁명 사상가였던 프루동이 만국박람회에서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상설박람회를 구상한 일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연장선 위에서 '봉마르세'라는 최초의 백화점이 등장한 것이다. 에펠탑으로 유명한 에펠이 설계한 '봉마르세' 건물 내부에는 독서실, 휴게실, 미술관이 설치됐다. 백화점은 탄생 당시부터 문화와 교양의 터전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백화점 산업이 변곡점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류 최초의 백화점을 만들었던 이들이 품었던 꿈으로 돌아가는 게 대안일 수 있다고 본다. '소비 욕구의 자극제'가 그 꿈이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게다. 나는 지금, '문화의 궁전'으로서의 백화점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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