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1946)은 루스 베네딕트가 미국 국방정보국(OWI)의 의뢰로 일본의 이해를 위해 쓴 책이다. 일본을 점령 통치하게 된 미국이 통치 대상국을 이해할 필요에서 의뢰했던 것이다. 이 책이 행정 관계자들의 범위를 넘어 널리 인기를 끈 것은 위 구절처럼 모순의 미학을 현란하게 펼친 덕분이겠지만,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그 시절까지도 서양인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수수께끼의 느낌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는 일본의 열강 대열 진입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 클럽 가입 자격은 뭐니뭐니 해도 전쟁 잘하는 데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95)으로 준회원 자격을, 러일전쟁(1904~05)으로 정회원 자격을 땄다.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이 풍미하고 백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던 이 시절에 일본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었다. 유색 인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단기간에 근대화를 이룬 이유는 일본 안에서도 밖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었다.
개항 전의 일본이 근대화 이전의 유럽과 어떤 비슷한 특성을 가졌느냐 찾아내는 것이 오랫동안 일본의 성공을 설명하는 열쇠로 여겨졌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봉건제가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흡사한 형태였다는 점을 많은 학자들이 천착하기도 했다. 출발점이 비슷하기 때문에 비슷한 경로를 쉽게 따를 수 있었다는 설명인데, 요즘은 좀 수그러든 것 같다.
그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따라서 생명력도 강한 설명은 개항 전 일본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근대화에 적합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다룬 연구와 논설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여 있고, 깊이 살펴보지 못한 나로서도 개연성을 인정할 만한 점이 많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 예를 들어 중국이나 터키의 같은 시기 상황과 비교해 일본만이 꼭 근대화에 성공할 충분한 조건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이 글은 조선의 망국 상황의 배경으로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개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근대화의 당위성을 치밀하게 검토하기보다 근대화 과정의 흥미로운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은 사람의 하나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경력에 비쳐진 일본 근대국가 건설 과정의 굴곡을 살펴보겠다.
조슈(長州) 번(藩)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 태어난 이토가 특이한 경력으로 접어든 출발점은 1863년의 런던 유학이었다. 함께 유학생으로 선발된 4인 가운데 유신의 동지가 될 이노우에 가오루도 있었다. 그들은 이듬해 열강의 시모노세키 공격에 임해 조슈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귀국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함대의 위압으로 개항했지만, 이후의 진로를 능동적으로 찾아나갈 주체가 세워지지 않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막부의 권위가 개항으로 인해 크게 손상되어 새로운 상황에 확고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조슈, 사스마 같은 강력한 번들이 막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1863년 조슈가 시모노세키 해협의 외국 선박 통과를 포격으로 막아 열강의 공격을 자초한 것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준 일이다. 조슈는 기본적으로 교역 확대를 바라는 입장이었는데 경쟁자인 사스마가 그 길에 앞장서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극단적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깃발을 내건 것이었다. 대외적 위기를 만들어놓고 그에 대한 대응을 위해 개혁파가 번의 정치를 장악해 군대를 비롯한 개혁을 급속히 진행하는 가운데 영국에서 돌아온 청년 이토가 한 몫을 맡게 되었다.
이토를 포함한 서부 개혁파 집단은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개혁을 위해 막부 타도를 기본 목표로 세웠다. 쉽게 장악할 수 있는 교토의 조정을 개혁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 집단은 먼저 서부의 강력한 번인 조슈와 사스마의 정치를 장악하고 1866년 막부에 대항하는 삿쵸(薩長)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교토 조정을 꾸준히 회유,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시점에서 막부 자체가 역부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비가 쉽게 넘어갔다. 마지막 장군 요시노부는 이미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선언해 놓고 있었고, 1868년 4월 정부군이 에도로 진격해 오자 저항 없이 성문을 열었다. 도호쿠(東北) 지방 영주들의 항거가 그 해 9월까지 진압됨으로써 유신에 대한 무력저항이 모두 해소되었다.
막부의 문을 닫는 과정에서 서부 개혁파 집단을 비롯한 하급 사무라이 출신 인재들의 역량이 확인되어 유신 조정에서 이들의 역할이 확보되었다. 그 역할이 확정된 것은 1871년 7월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였다. 개혁파 집단은 강력한 몇 개 번의 정치를 장악하고 그 번들을 앞세워 막부를 타도했기 때문에 그 번들이 유신 조정의 주체가 될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막부 붕괴를 뒤이은 중앙집권화 분위기를 타고 폐번치현을 유도해 다이묘들이 정치 주체로 나설 길을 막은 것이었다. 이것이 구체제의 확실한 종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는 1870년 외무차관으로 있다가 서양의 통화제도를 학습하러 미국에 갔고, 이듬해 돌아와 지조개정(地租改正) 작업을 진행한 다음 1871년 12월부터 1873년 9월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를 순방했다. 1863년의 런던 유학으로 시작한 이토의 서양 견문과 인맥은 당대의 '서양통'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개항 후 막부도 몇 차례 사절단을 유럽과 미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인원도 많고 (48명) 여행 기간도 길 뿐 아니라, 단순한 기술만이 아니라 국가의 조직 원리까지도 학습 대상으로 삼은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 근대사에서 획기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새 국가 건설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이토를 비롯한 여러 핵심인물이 장기간 조정을 떠나 있을 수 있었다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다. 이와쿠라 도모미 단장과 키도 타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 메이지시대 정치를 이끌 인물들이 22개월간 여행을 함께 한 것이었다.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 통일 직후의 독일, 전성기의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뿐 아니라 귀로에는 침략당하고 있는 아시아 지역까지 둘러본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가장 큰 학습 결과는 내치 우선론이었다. 국제 무대에서 행세하기 전에 장기적인 내정 개혁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사절단이 귀국할 무렵 일본에서는 사이고오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정한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와쿠라 등 사절단 멤버들은 이에 극력 반대해서 유신정부의 분열까지 불사했다. 이 갈등은 이듬해 초의 사가(佐賀)의 난에 이어 유신정부에 대한 마지막 내부 도전인 1876년의 서남전쟁으로 이어졌다.
1874년 4월의 타이완 정벌과 1875년 9월의 운요호 사건 정도 외에는 이 시기 일본이 대외적 도발을 삼가고 국가 체제 정비에 힘쓴 것이 내치 우선론의 작용이었다. 격동의 시대에는 모험주의가 득세하기 쉬운 법인데, 이와쿠라 사절단 멤버들이 이끈 1870년대 후반 이후의 일본 정부는 군비 증강을 억제하고 교육, 사법, 재정 등 근대 국가의 기본 기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근대 국가 건설의 과제 중 가장 늦춰진 것의 하나가 정치 체제였다. 1881년 민간의 국회 개설 요구가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그 여파로 정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1881 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의 결과 정부 내에서 이토의 역할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헌법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나 18개월간 체류했다. 이 체류에서 돌아온 이토는 한 정파의 지도자를 넘어 국가 운영과 건설의 최고 기술자로 널리 인정받는 존재로서 1885년 초대 내각의 총리를 맡은 이래 네 차례에 걸쳐 8년간 총리직을 맡았다. (1885~88, 1892~96, 1898, 1900-01) 총리를 맡지 않고 있을 때도 추밀원 의장과 원로로서 이토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1885년 이토 내각 출범 무렵부터 일본의 근대 국가 건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각제에 이어 지방자치제 시행(1888), 메이지헌법 반포(1889), 국회 개설(1890)이 일정에 맞춰 진행되었다. 1876년 서남전쟁 이후 불안하던 국가 재정과 1881년 이래의 불황을 몇 년간의 긴축 정책으로 극복하고 1886년 은본위 화폐 제도를 정착시키면서 기업 활동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해 본격적인 산업화에 들어섰다.
이 발전의 혁혁한 성과가 1894~95년 청일전쟁의 승리였다. 이 승리로 일본이 거둔 이득 중 배상금 2억3000만 냥만 하더라도 1894년 일본 국가 세입의 네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 배상금 덕분에 당분간 일본 정부는 여러 방면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오랜 숙원이던 불평등 조약의 시정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민간의 기업 활동도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지방 중하층 사무라이 출신의 '번벌' 세력이 메이지 시대의 주역이었다. 근대 국가로의 변화를 서두르는 데 큰 재능을 발휘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그들은 얼마만큼 알고 있었을까? 막부 시대의 종말을 인정하고 권력을 스스로 거둔 마지막 장군 요시노부보다 그들이 일본을 더 위한 것이었을까? ⓒ프레시안 |
메이지 국가는 천황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만들어졌다. 헌법도 흠정(欽定)이었다. 민권의 주장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뒤에야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해서 1890년까지 국회 개설을 기다렸다. 그러나 국회가 개설된 뒤에는 경제와 산업의 발달에 따라 민권파의 배경이 지주층으로부터 상공업계로 옮기면서 정부에 대한 견제가 강해졌다. 이 시기 민권 운동은 유산 계층에 한정된 것이어서 관료 집단에 비해 호전적 팽창주의에 쏠리는 경향이었다.
군부는 행정부와도 별도로 천황에 직속하는 기관이었다. 1880년대 국가 조직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중앙 집권적 성격을 극단적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의회는커녕 행정부조차도 군부에 간섭하지 못하는 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두 차례나 총리를 맡는(1889~91, 1898~1900) 등 군부 출신이 정치계에 영향을 끼치는 길만 열려 있었다.
유산층을 대표하는 민권파와 국가주의 성향의 군부가 청일전쟁 승리에 고무되어 극단적 부국강병책으로 정부를 몰아가는 동안 일본의 새 국가 건설 사업은 고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양적인 확장은 계속되지만 질적 변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는 틀이 잡힌 것이다.
30년의 국가 건설 사업에서 이토 같은 하급 사무라이 계층 출신의 관료 성향 정치가 집단이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근대 일본이 높은 효율성을 가지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에서는 뛰어나지만 국가의 존재 의의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군국주의의 비극을 막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근대화의 트라우마' 정리가 예상 외로 힘들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진행해 나가면서 다른 이야기 중에라도 보충할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자본주의의 속성'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블로그 바로 가기)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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