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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서재]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철학한다고 무엇을?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철학 왜 하느냐'고 질문한다. 아마도 이런 질문은 학문 왜 하느냐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학문이든, 물질적 생산이든, 소비 사회에서 즐거운 놀이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대답한다.

이들의 질문을 통해 보건대, 한편으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일반인과 다른 지적 노력을 하고 있다는, 좋게 이야기하면 격조 높은 지적 작업을 한다는 데 대한 일반인의 선망이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보다 일반적 현상인데, 철학한답시고 쓸데없이 논쟁과 분란을 일으키며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으로 경멸의 시선이 담겨있다. 이 후자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철학하는 자가 여름에도 겨울 코트를 입고 나온다는 식이다.

우리는 전자에 대해서야 뭐라고 말하기 부끄럽다. 왜냐하면 특히 현대에 와서 철학이 만학의 왕이라는 과거의 이름에 걸맞은지도 의심스럽고, 또한 철학한다고 여러 학문에 대해 조예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 대해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 곤란하다. 겨울에 산에 들어가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들어갈 때 입은 옷 그대로 여름에 다시 나올 수도 있다. 격조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시대의 흐름을 잘 못 읽어 엉뚱한 행동을 한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전자의 가식과 달리 후자의 진지한 삶은 이상하게도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인간이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방향 상으로 두 가지 상반된 방식이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뭔가 원리와 법칙이 먼저 있고, 그 원리와 법칙을 기준으로 위계상으로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각 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신분을 지키는 경우 바르고 착하다고들 한다.

다른 하나는 원리와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세상살이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어떤 경향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명령적인 체계처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며 살아가는 양식, 즉 이런 저런 삶의 양식으로 엮여져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나 밋밋해 보일 수 있다.

전자의 지배 방식은 사회 지배 방식에 대한 설명도 쉽고 분명한 성격의 공동체일 것이다. 그래서 경계 밖에 있는 것을 그릇된 것으로 배격한다. 이에 비해 후자에서는 그런 것도 아닌 것도 아닌, 경계를 무너뜨리고 위계 없는, 삶의 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별은 논리를 먼저 설정하고 인지하는 지식과 삶의 다양한 관계를 중시하는 지혜 사이의 차이와 닮았으며, 학문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이런 차이가 있다.

해결은 하나의 길인가?

이런 구별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영혼에 관해서이다. 오랜 관습상 영혼이 우리 몸 바깥에 있다가 다시 우리 몸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처럼, 날개 달린 영혼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비해 어떤 물질들이 서로 연관을 맺다가 단세포도 만들고, 그것들이 복합세포를 만들어, 발전의 단계를 거쳐 의식이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표상을 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영혼이 긴 과정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상에는 어떤 물체의 형성에 원본 또는 설계도가 먼저 있고 그 설계도에 잘 맞는 것은 진실에 가깝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여기는 쪽이 있다. 이에 비해 원래 설계도도 없고 더군다나 원본도 없었지만 이리 저리 만들다가, 물체를 여러 차례 만들어 가는 가운데 경향성이 있어서 지구상에 이런 저런 물체들 또는 생명체들을 만들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한 가지 더하면, 서양 철학사는 오랫동안 먼저 완전한 형태가 있고 그리고 그 형태를 따르지 못하는 가상들이 있었다는 현상론이 지배적인데 비하여, 19세기 중반 이래로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무한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완전이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상징적 관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도 거의 2500년 정도의 오랜 세월 동안에 인간은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물체의 원본 도형을 먼저 생각했으나, 인생살이에는 원본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에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원본 상정, 세계 조작, 세상살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학문들의 전개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젊은 시절 배운 <논리학>이란 책은 하나의 원리가 진정으로 있다고 치고, 그 원리를 통해 부당과 모순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풀키에의 <논리학>을 보다가, 또 프랑스 대학입학자격고사를 위한 참고서들도 동일한 배열이라는 것을 새롭게 생각했다.

'논리학'이란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언어의 논리학, 수리의 논리학, 물체의 논리학, 생명의 논리학, 인간의 논리학 등이며, 들뢰즈는 방향의 차이에 따른 의미의 차이를 설명한 의미의 논리학도 썼다. 왜 여러 논리(학)들이 있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사는 세상이 하나의 논리로 제단 되는 것이 아니며, 사물을 다루는 것도 하나의 논리만으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여러 학문이며 각각의 논리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철학은 만학의 왕도 아니고, 모든 학문의 토대도 아니다. 프랑스어에서는 수학만이 복수로 쓰고 다른 학문들은 단수로 쓴다. 내가 보기에 수학만큼이나 철학도 복수로 써야 할 것 같다. 세계를 다루는 학문은 수학과 물리학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세상은 수학과 물리학으로 또는 그 원리와 법칙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이제 조금씩 깨닫는다.

물리학에 길을 묻는다면…

▲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리처드 파인만 강의, 박병철 옮김, 승산 펴냄). ⓒ프레시안
물리학이란 생명체와는 다른 물체들로 이뤄진 세계를 다룬다고 한다. 그럼에도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자는 이로부터 거대한 우주와 미세한 미립자들을 해명하고 나아가 이 미립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생명체도 물질의 결합 방식에 따라 해명할 것을 기대하고 또 그 기대를 언젠가는 실현할 것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기대의 실현을 믿고 현실의 세상살이 문제를 풀기를 지체한다고 한다면, 이 미래가 언제인지 모르면서 기대를 건다는 점에서 천국을 믿고서 현실에서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 방식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제도를 인간이 풀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사에 불평등과 억압이 아직도 존속하는 것은 물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이룰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사람들이 물체 논리인 물리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물체적 문제를 해명하면 인간사 문제도 바람직하게 해결할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해서이다. 그런데 인간사에서 감정적인 연관을 신체에 할당된 계산 가능한 방식으로 냉철하게 문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물리학을 참조할 수 있을까?

물리학은 철학적으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의 입장을 확장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이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세계는 물질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저자 파인만은 세계가 물질로 이루진 것이고, 이로부터 세계에 대한 해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며, 인간이 하고 있는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본다. 그래서 그는 다음 세대에 물려줄 과학적 지식을 한 문장으로 쓴다면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영원히 운동을 계속하는 작은 입자로서 거리가 어느 정도 이상 떨어져 있을 때에는 서로 잡아당기고 외부의 힘에 의해 압축되어 거리가 가까워지면 서로 밀어낸다."

파인만은 물리학이란 학문 영역에서,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그리고 상대성 이론을 제시한 아인슈타인, 그 다음으로 양자전기역학의 체계를 수립한 중요한 물리학자이다. 그는 단지 이론물리학뿐만이 아니라 실험물리학에도 중요한 사실들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죽기 2년 전 1986년 챌린저호 참사의 미스터리를 쉽게 증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우주왕복선의 개스킷 또는 O링(O-ring)과 얼음물 한 컵을 사용한 실험이다. 이 실험은 밖이 너무 추워서 발사가 무리라는 기술자들의 경고대로 개스킷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또 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알기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도 그런 장점을 살렸다. 이 책은 그의 긴 강의록 세 권을 일반인 쉽게 접근할 수 있는 6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물리학의 진수를 전해주고 있다.

물리학의 세계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아무리 온도가 낮아도 진동은 있다. 그 원자들의 움직임은 외부로부터 힘을 받으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관성이 있고, 그리고 힘이 있다. 이들은 또한 상호 작용을 하며, 물리학자는 이에 대해 중력이라는 힘을 발견하였다. 그 원자는 핵과 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핵 내부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다. 이 내부 상호 작용 속에는 전기력이 있으며 진동으로 표현된다. 진동 횟수의 증가에 따라 전자기파의 성질이 파동에서 입자의 성격을 띤다. 이 흥미로운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핵을 이루는 내부 입자들은 아직도 연구의 대상이다.

이쯤에서 파인만이 말하는 물리학의 성격을 보자. 파인만은 물리학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들을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논리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단숨에 물리학을 기하학처럼 가르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로 첫째 우리가 모든 기본법칙들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최첨단의 물리학이라고 해도 "무식의 전당" 속에 있다고 한다. 둘째 물리학의 법칙들을 제대로 서술하려면 보기에도 생소한 고등 수학이 반드시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올바르다고 여긴 서술들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근사적으로 맞는 것이라 한다. 그는 덧붙여서 "근사적으로" 맞는 법칙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그 법칙은 유효하다. 즉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전자의 흐름이, 기하학의 원리처럼 하나의 직선 방향은 아닐지라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확률적 측정 안에 있는 흐름이며, 그것을 근사적으로 계산할 수 있고 또 감지 장치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 이 점에서 물리학은 정확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정한 영역 안에서 확률적으로 법칙을 정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물리학은 우리의 삶에 효과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리학도 알려진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물리학이 제시한 기본 법칙 중에는 에너지보존법칙이 있다. 이 법칙에 벗어나는 사례는 아직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에너지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해답이 없다. 단지 에너지는 특정 양이 덩어리처럼 뭉쳐진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세계의 기원에 대해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없다는 불가지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법칙을 발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 즉 만유인력의 법칙은 자연 현상에서 위배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중력이 왜 생기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성이론은 중력이론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중력이 전달되는 데도 분명히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시 빛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빛을 에너지도 파동도 아닌 입자의 다발로 간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양자역학은 전자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전자파동실험에서 전자는 조각으로 쪼개지는 일이 없이 항상 온전한 덩어리의 형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더 깊이 파고들어, 파인만의 전자파동에 대한 설명은 더욱 흥미롭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아 감지기로, 경과 과정이 아니라 효과만을 측정할 수밖에 없는 실험을 설명한다. 이 전자파동의 실험에서 기술적으로 시작하는 모든 초기 조건과 그 효과가 발생하는 모든 말기 조건을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확하게 측정하거나 그 조건들을 감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즉, 과정을 잘 모르겠으나 초기와 말기를 보아 확률적으로 이런 저런 경과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미 지적했듯이 물리학은 근사적 법칙이라는 의미를 다시 음미하게 한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나 양자역학에서 확률적 계산은 바로 인간 지적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자연 자체에 원래부터 내재하는 본질이라고 한다.

세상살이는 인간의 문제

자연은 원래 하나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의 원리로 해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리학이 본질을 해명 못하고 있듯이, 수학도 무오류성과 무한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열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 자체가 다양성 또는 다양체가 아닌지 라고 생각해본다.

세계에 대한 해명의 불확정성에 비추어 인간사에도 본질적으로 불확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개연적 또는 확률적 삶의 양식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인간 사회의 공동체 원리에도 하나의 방식이나 방향으로 정립하는 조급한 노력보다, 인간관계에서 제기된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저개발국가의 빈곤, 노약자의 배고픔, 소수자·소외자에 대한 배려와 무상 혜택은 내세종교의 구원이나 물리학적 해명의 귀결이라기보다 현실적 삶의 과제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를 인간이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굳이 혁명을 말하지 않더라도, 다시 상기하자. 21세기 생산력은 넘치고 남는다. 전쟁, 핵무기, 폭력 등을 평화와 인도적 계약으로 전환할 때 지구상의 어느 인생살이도 해결하고 남을 것이다.

한 생명으로 태어났다 가는 삶, 지금 여기,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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