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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에 이제 '개혁'은 막 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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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에 이제 '개혁'은 막 내리나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노동운동의 미래' 산별노조 약화시킨 한국노총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을 둘러싼 공방은 산별노조의 단체교섭 대표권을 갉아먹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지난해 12월 4일 한국노총의 장석춘 위원장이 참여한 이른바 '3자 합의'의 핵심은 결과적으로 기업별노조 체제의 온존 강화였던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으로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을 통한 1국 1노총 건설이 그것이다.

노동자 내부 격차 풀기 위해 조금씩 전진해온 산별노조

▲지난해 12월 4일 한국노총의 장석춘 위원장이 참여한 이른바 '3자 합의'의 핵심은 결과적으로 기업별노조 체제의 온존 강화였던 것이다.ⓒ프레시안
산별노조 건설 과제는 1998년 2월 최초의 산별노조인 보건의료노조를 필두로 민주노총에서는 금속노조, 언론노조, 화섬노조, 공공운수노조가, 한국노총에서는 금융노조 등이 만들어지는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보건의료노조, 금융노조, 금속노조에서는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산별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의 노사관계를 기업별 수준에서 산업별 수준으로 재편해왔다.

그 동안 기존 산별노조들은 사용자의 방해와 저항, 정부의 무관심과 비협조, 법제도의 미비라는 어려움을 뚫고서 산별교섭을 성사시켰으며, 이를 통해 산업별 수준의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산별노조-산별교섭은 기성 노동운동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임은 노동운동가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시장의 최대 현안인 노동자 내부 격차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그 첫 단추로 정규직 중심의 현행 기업별노조 체계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도 차별 없이 가입할 수 있는 산별노조로 전환해야 한다. 노조가 기업 안의 임금, 노동조건, 복지에만 집착해서는 기업은 물론 해당 산업과 국민경제의 미래도 없다. 노조가 산업적 전망과 전국적 시야를 갖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기업별노조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산별노조로 나가야 한다.

껍데기만 남은 민노당,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갈 길 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산별노조 건설은 기업 단위로 갈라지고 쪼개져 있는 노동자들을 산업과 전국 수준으로 결집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의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기성 정당에 대해 노동운동의 목소리를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정치 전망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은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라는 두 번째 과제로 이어진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어떻게 뒤틀릴 수 있는 지는 노동자계급 정체성이 껍데기만 남은 민주노동당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정규직 중심의 실리주의가 만연할 때 노동운동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는 한국노총이 이명박 대통령과 맺은 정책연합에서 잘 드러난다.

민주노동당은 농민운동가가 당대표이자 원내대표이고, 원내부대표는 변호사다. 5명의 의원 가운데 노동운동 출신은 2명뿐이다. 리더십 구성뿐만 아니라 그 정책과 활동에서도 이름만 '노동당'일 뿐이다. 현 시기 노동운동의 힘은 강력한 산별노조를 통해 확보될 수 있는 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보니, 노동조합 진영이 당 안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2008년 '종북주의' 논란으로 당이 쪼개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뉴라이트의 주장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반북(反北) 논리를 내세우며 갈라져 나온 진보신당도 창당 전부터 환경, 여성, 청년 등의 '신사회운동' 성향으로 경도되면서 노동자 중심성을 상실해버렸다. 그 결과 언론을 많이 타는 '스타 정치인' 한 둘이 껴야 굴러가는 '패션'정당으로 전락했다.

한국노총과 한나라당의 정책연합은 약속한 '정책'은 오간데 없고, '연합'이라는 깃발만 남았다. 한나라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는 한국노총 출신 노조간부 4명의 의원 당선을 빼고 무슨 정책적 성과가 있었는지 의문스러운 수준이다.

한국노총에게 산별노조는 '남의 일'이었다
산별노조 건설은 민주노총 산하 조직들에서 상대적으로 활발했고, 한국노총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디었다. 한국노총 안에서 그나마 힘을 발휘하던 금융노조도 정부의 관치금융 압박 속에 산별교섭 체제가 흔들리는 등 조직력이 약화되고 있다.

한국노총 전체적으로 보면 산별노조 건설은 남의 일이었고, 기존의 기업별노조 체제만 지키데 급급했던 2009년이었다. 그래서일까 한국노총이 중요한 주체가 된 12월 4일의 '3자 합의'는 산별노조의 단체교섭권을 훼손하는 내용을 담았고, 그런 내용을 반영하여 1월 1일 새벽 한나라당 주도로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노동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산별노조는 걸음마 단계를 지나기도 전에 독자적인 교섭 실체를 훼손당하는 법제도적 장애물을 만났다.

노동조합 활동의 꽃은 단체교섭임을 감안할 때, 단체교섭권이 위축된 산별노조의 힘 역시 약화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산별노조의 힘이 약해지면 기성 정당을 통한 정책연대나 노동계급의 독자정당 같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역시 힘이 빠질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가 무슨 대수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의 전진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통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시 정부보다 오바마 정부가 더 민주적이라고 우리는 평가하는데, 미국 노조운동이 정권교체를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복지국가를 자랑하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떠한가. 노동운동과 연대한 좌파정당들이 정권을 잡은 결과, 그들이 자랑하는 사회복지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부자만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선거권의 도입 같은 중요한 정치 제도에서부터 8시간 노동제, 주5일제, 출산휴가, 유급연월차휴가, 산업안전보건, 노동자 경영참여, 최저임금제 같은 사회경제적 성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런 저런 제도들은 노동운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들이다.

▲한국노총 전체적으로 보면 산별노조 건설은 남의 일이었고, 기존의 기업별노조 체제만 지키데 급급했던 2009년이었다. 그래서일까 한국노총이 중요한 주체가 된 12월 4일의 '3자 합의'는 산별노조의 단체교섭권을 훼손하는 내용을 담았고, 그런 내용을 반영하여 1월 1일 새벽 한나라당 주도로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노동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연합뉴스

과거의 관성이 미래의 뒷덜미를 낚아채다

2010년 새해를 맞으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과제인 산별노조가 단체교섭권을 훼손당할 가능성이 커졌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위축되고 왜곡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결국 또 하나의 과제인 노동운동의 자기 개혁도 실종될 위기에 처했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서 무엇하랴마는 한국노총이 민주노총도 불가능했던 총파업을 밀어붙이면서 노동법 개정 투쟁의 원칙을 지켰더라면 2010년 새해의 노동 정세는 어떻게 펼쳐졌을까. 산별노조와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물론 자기 개혁이라는 노동운동의 과제도 눈에 띠게 활발해졌을 게 틀림없다.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노동운동'을 자임했던 한국노총도 노동운동 안팎으로 더욱 빛을 발했을 것이다.

2009년 12월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1987년 이후 (때로는 반동(反動)을 겪으면서도) 큰 틀에서는 꾸준히 전진해온 한국노총의 개혁 드라이브가 그 한계점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과거의 관성인 기업별노조에 대한 집착이 미래의 전망인 산별노조의 뒷덜미를 낚아채버린 것이다.

이제 한국노총의 개혁 드라이브는 막을 내린 것이고, '1국 1노총'의 전망은 더욱 멀어지는 것인가. 반동은 일시적일 것인가 오래 지속될 것인가. 추위만큼이나 매서운 노동 정세가 새해 벽두부터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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