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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포장술로 경제현실을 바꿀 순 없다"

[인터뷰] 김광수 소장 "문제는 정치다, 이 바보야!"

굳이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는 정치위기와 맞닿아 있다는 게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 수상,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들고 나온 정치적 아젠다가 그 출발점이다. 이들 정치집단의 주장에 기반한 경제질서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내부 모순이 눈덩이처럼 커져 터진 게 이번 경제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경제위기는 모든 규제를 거부하던 시장의 실패이자 동시에 이런 시장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 국가(정치)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반성은 각국의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미국의 오바마 정권, 일본 하토야마 정권의 탄생은 경제위기가 중요한 모태가 됐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이명박 정부가 당선됐다. 국민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경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3년차를 맞이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 등 거시적인 경제지표를 바탕으로 한국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 ⓒ프레시안
김광수 김광수경제연구소 소장은 한국의 빠른 회복세가 '포장술'에 의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현재까지 총 재정지출 증가액이 150조 원"인데 이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제금융으로 쓴 돈인 160조 원에 맞먹는 규모다.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에서 한국은 위기의 중심부였다면 이번 미국발 경제위기에서 한국은 위기의 주변부에 있다. 이번 경제위기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외환위기 때와 맞먹는 규모의 돈을 풀었으니 경제성장률 등 각종 경제지표가 높게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이처럼 당장의 성과에 집착해 단기적 대응과 처방에 급급한 것은 이명박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0년 민주당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권력의 교체는 있었지만 '성장 우선주의'라는 경제정책의 큰 틀은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인 세종시에 대해서도 그는 마찬가지 견해를 밝혔다.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도 자신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불과 몇년 안에 인구 50만의 자족도시 건설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다는 것. "박정희 정부에서 온갖 자원을 쏟아부었던 대덕연구단지가 30년이 지난 지금 어떤지를 보면" 정부의 세종시에 대한 청사진이 얼마나 현실화되기 힘든 것인지 알 수 있다.


사실은 다소 의외였다. 지난 97년 외환위기에 대한 분석을 가장 먼저 내놓아 정부와 경제전문가들을 놀라게 했고, 2000년부터 10년 가까인 민간 경제연구소를 운영해온 김광수 소장과 인터뷰 내용의 절반 가량이 경제가 아닌 정치문제로 채워졌다.

김 소장은 "정치의 물갈이가 수반되지 않는 경제정책의 변화는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며 현재 한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가 정치의 위기와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세대'를 넘어서 '자식세대'를 고민할 줄 아는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 또 이를 위한 맹아적 형태의 자발적 정치결사체, 경제전문가 김광수 소장이 현재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이대로 가다가는 부동산 버블 때문에, 또 자동차, 조선업 등 주력 산업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제2차 산업공동화 때문에 한국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음은 12일 경기도 일산에 있는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 진행된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와 김광수 소장의 인터뷰 전문.


"외환위기 때와 맞먹는 돈 쏟아 부어…경기회복은 당연한 결과"

프레시안 : 본격적으로 경제회복기에 들어간 분위기다.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실제 경제지표들이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고, 정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한국이 경제위기에서 가장 빨리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의하나?

▲ ⓒ프레시안
김광수
: 한국에서는 우리가 위기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고들 얘기하는데, 외국 언론들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경제가 어떤 경제인가? 수출 위주 경제다. 수출이 안 되면 주저앉는다. 한국의 수출 대상 국가가 어디인가? 미국·중국·일본·유럽이다. 미국 경제가, 유럽 경제가 다시 주저앉으면 한국 경제도 주저앉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 경제는 아직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한국 경제가 정말 회복됐다면 좋은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국가도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거지, 유리한 식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나라가 좋아지지 않는다. 기업이나 개인은 상태가 나쁠 때 좋은 것처럼 꾸미면 금방 들통 나고 민·형사상 처벌 받는다. 그런데 정부 관료들은 여기서 완전히 면책돼 있다. 그러니 아무나 '맞으면 좋고' 정도 생각으로 좋게 포장하려고만 한다.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 정치인, 정부 관료들의 역할과 책무는 경제수치에 일희일비하는 게 아니다. 국민이 그들을 임명해준 이유는 중장기적, 지속적으로 성장 가능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거다.

단기적으로 통계 수치를 포장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현재 이명박 정부 기간 총 재정지출 증가가 150조 원 가까이 된다. 정부회계에서 빠지는, 보이지 않는 부분들까지 치면 훨씬 더 크다. 90년대 말 IMF 사태 때 구제금융으로 쓴 돈이 160조 원이다. 그에 필적하는 돈을 지난 3년 동안 쏟아 부었다. 이렇게 돈을 푸는데 누가 경제지표를 못 끌어올리나.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다.

프레시안 : 우리 경제가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김광수 : 한국 경제가 무너진 원인을 찾자면 IMF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장 아쉬운 건 민주화 이후다. 90년대 이후 민주화 정부가 들어선 한국은 어땠나? 20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안정적인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임금노동자들의 소득은 늘어났나? 물가가 그동안 올랐으니 명목 임금소득이 오르긴 했지만 실질임금으로 따지면 마이너스다. 일자리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지금 정부 통계상으로 보면 2008년 경제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취업자 수는 위기 전보다 많다. 실업자 수도 경제위기 전 수준으로 돌아간 상태다. 실업률도 거의 안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진실인가. 미국과 일본만 해도 위기 전에 비해 실업률이 1.2%, 1.4%포인트 가량 올랐다. 모든 선진국 지표가 마찬가지다. 한국만 실업률이 그대로다. 모든 국민이 다 일자리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데, 정부 지표만 좋아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성장잠재력이 늘어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부동산 거품 붕괴는 이미 시작됐다"

프레시안 : 최근 출간한 <경제학 3.0>에서 한국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뭐가 문제이길래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하는 건가?

김광수 : 부동산으로 휘청이는 나라다. 부동산 문제는 특히 IMF 사태 이후 투기와 맞물리면서 정권까지 바꾸는 위력을 지녔다.

프레시안 : 부동산 문제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도 나타난 문제다. 당시도 경기가 저점으로 갈 때 부동산을 활용해 돌파하는 패턴이 보였다.

김광수 : 민주화 정부 출범 이후 일자리가 충분히 늘지 않았다. 그만큼 성장잠재력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소득이 높아졌느냐?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소득도 나빠졌다. 이 불안한 상황에서 2000년대 초부터 부동산 시장이 커졌다. 모두가 부동산으로 도피해버렸다.

박정희 정권 때만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집이 부족했다. 당시는 수급 자체가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때 '아파트 200만 호 건설'을 추진하면서 부동산 문제는 단순한 오르내림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프레시안 : 오래 전부터 부동산 거품이 조만간 꺼질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언제 꺼지는 건가?

▲ ⓒ프레시안
김광수
: 우리는 두뇌기관이지, 점쟁이가 아니다. 두뇌기관의 역할은 사전 경고다. 왜 두뇌기관보고 '예측하라'고 하고 틀리면 비판하느냐?

국가경영의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문제의 소지를 미리 발견해 예방해주는 것이다. 이게 상책이다. 위험 경고에도 불구, 문제가 터졌을 때 급급해서 때우려고 하는 건 중책이다. 가장 하책은 문제가 터졌음에도 계속 악화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하책을 쓰고 있다. IMF 때 본격화된 문제를 노무현 정부는 물론,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하책만 쓰고 있다.

"부동산 담보 대출 이자만 GDP의 4%"

프레시안 : 부동산 거품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김광수 :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미하던 국가채무가 IMF 이후 10년 동안 400조 원을 넘었다. 공기업 채무까지 더하면 이미 GDP 대비 70~80% 수준이다. 다수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문제는 이 나라들은 수십 년에 걸쳐 이 정도 빚을 진 반면, 한국은 짧은 기간 동안 폭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다 부동산 시장을 떠받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프레시안 : <경제학 3.0>에서 부동산 시장의 연착륙이 오히려 고통을 장기화시킬 뿐이라면서 경착륙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계가 은행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한국적 현실에서 부동산 경착륙은 가계에 큰 고통을 안길 수 있다.

김광수 : 상식적으로 이야기 하자. 부동산 연착륙이 가능할 것으로 보나? 한 달 뒤에 집값이 10% 떨어진다고 가정하자. 이를 사람들이 미리 안다면 '지금 당장 팔아야지'라고 생각한다. 매물이 당장 쏟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또 10%가 떨어지고, 또 10%가 떨어지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부작용 없이 이어지는 게 연착륙인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현재 부동산에 투기해서 은행 이자만 내는 것이 GDP의 4% 수준이다. 이게 건강한 경제라고 할 수 있는가.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해 반 토막이 나면 다 개인들이 책임진다. 잘못된 투자 판단으로 인한 손실을 개인들이 다 떠안아야 한다. 그런데 왜 부동산 투자에 대한 책임은 정부가 떠안아야 하나? 냉정히 말하면 그렇다.

"자동차, 조선 등 제2차 산업공동화 진행 중"

프레시안 : 최근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사면 사태 등 법과 규칙을 뛰어 넘는 거대 권력이 된 재벌 문제도 한국경제에서 심각한 문제다.

김광수 : 현재 간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산업공동화다. 제2차 산업 공동화가 일어날 것이다.

과거 재벌그룹의 행태가 어땠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차 공동화 당시 한국의 최대 수출품목은 봉제의류였다. 중국이 생산기지로 뜨면서, 90년대 초반 봉제업체들이 대거 중국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봉제의류 산업은 산업 구조상 가장 하위에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접점이다. 이 바로 윗 단계는 직물업이다. 봉제업체들이 한국을 떠나니 이들은 직물을 팔 곳이 사라져버렸다. 대구 경제가 그래서 무너졌다. DJ정부 때 밀라노 프로젝트니 뭐니 난리를 쳐도 살아나지 않는다. 납품할 공장이 다 중국에 있으니 사줄 곳이 없다. 직물업 윗 단계는 원사·화섬업체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새한, 한국합섬 등이 전부 망했다.

지금은 어떤가. 2차 산업 공동화 초기단계다. 현재 주력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 공장은 이미 해외에 상당수 이전했다. 더 이상 국내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또 조선업도 중국이 앞지르기 시작했고, 철강은 이미 중국에 밀린 지 오래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국내에 일자리가 없어진다. 재벌의 속성이다.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근본적으로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레시안 : 산업공동화 문제를 우려했는데, 이는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서유럽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본과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일국의 바운더리 안에서 산업공동화나 노동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김광수 : 신자유주의는 그 출발점부터 경제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구호의 측면이 강하다.

한국은 노동이 혼자 걸어가고 있는 면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현실과 괴리돼 국민에게서도 외면 받고 있다. 또 임금노동자 비중이 외국의 경우 70~80%대인데, 한국은 50%대에 불과하다. 노조가 정치적 주장을 하더라도 국민에게 먹히지 않는 구조다. 이걸 노동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일자리 문제가 정치투쟁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미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제조업은 2005년 이후로 40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농·어업도 20만 명, 물류부문에서도 40만 명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전체 취업자 수는 150만 명 늘어났다. 왜? 개인서비스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PC방, 김밥집, 보험설계사, 전업투자자 등.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고용의 질 자체가 빠르게 악화된다.

"세종시 미래? 대덕연구단지를 보라"

프레시안 : <경제학 3.0>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 때 균형발전에 대한 정부 용역을 진행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관료들이 보고서 내용에 상당한 불만을 보였다고 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 확정된 행정복합중심도시인 세종시 원안을 폐기하고 수정안을 발표해 정치적, 경제적 논란이 한창이다. 세종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나?

▲ ⓒ프레시안
김광수
: 행복도시 자체가 문제였다. 도시개발에 있어 처음부터 완벽한 도시가 시작되는 건 불가능하다. 일산이나 분당을 봐라. 90년대에 자리 잡았지만 자족 기능을 갖고 있나? 그나마 서울 옆에 바짝 붙어 베드타운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나.

도시계획은 50년, 100년 후를 내다보는 긴 안목으로 세워야 한다. 그런데 세종시든, 행복도시든, 단숨에 50만 인구의 자족기능 도시를 만들겠다고 정부에서 쇼를 했다. 이미 노무현 정부 당시 지어놓은 인근 아산의 아파트에 빈 가구가 4000가구가 넘는다. 유령도시다.

상황이 이런데 여기에 또 이명박 정부가 불을 지르는 꼴이다. 자족도시가 그렇게 쉽게 되면 30년이 넘은 대덕연구단지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대덕연구단지는 지금 세종시가 하겠다는 과학연구단지로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온갖 자원을 다 쏟아 부어 경제메카로 만들겠다고 했었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나 노무현 정부 때 만든 행복도시나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과거 '민주정부 10년' 동안 추진했던 일들을 모두 원점으로 돌리겠다는 입장이다. 세종시 수정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김광수 : 좀 더 근본적 문제로 돌아가는데, 이명박 정부도 과거 민주화 정부들의 경제 포장책을 답습하고 있다. 이는 YS 정부 출범부터 태생적으로 안고 왔던 문제다. YS 정부부터 경제 중심으로 국가를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 동안 집권한 민주 정부는 모두 이를 알 수 있는 능력도, 역량도 없었고, 심지어 도덕성마저 없었다. 끊임없이 정권 비리 사태가 터졌다.

독재정권과 싸우던 시절의 국가운영 패러다임과 민주주의 하에서의 국가운영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데, 일부 구시대 청산에 머무른 것이 전부였다. 앞으로 나아갈 개혁 능력이 없었다. 문제의 근원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건 민주화 운동 세력이 민주화를 이룬 후, 다음 세력한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다 보상 받았다. 3김 가신그룹은 물론, 노무현 정부 때도 386세대들의 보상이 반복됐다.

"민주화 정부, 집권세력의 보상시스템만 반복"

프레시안 : 이른바 진보정권의 무능력이 나라를 망친 원인이었다?

김광수 : 진보라는 사람들의 주특기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항상 '가치관과 철학이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뭐냐고 물어보면 기껏해야 3분이면 끝나는 얘기들이다. 민주주의하자, 같이 잘살자 이 정도다.

지금은 지식의 시대다. 과학 경쟁력도 관련 기술이 개발돼야 생긴다. 경제도 누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가치관이나 철학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근사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이해하는 것들이다.

내용이 없으니 나라가 안에서부터 썩어버리고 있고, 그 대가로 국민들은 골병들고 있다. 그럴 듯하게 포장해 놓은 대가는 모두가 빚쟁이로 전락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프레시안 : 결국 국가 정책을 실제로 입안하고 이끌어온 관료들의 무능이 한국 경제를 골병들게 했다는 지적인가?

김광수 : 지난 20년간의 민주 정부들(YS-DJ-盧-MB) 10년씩 진보라는 이름, 보수라는 이름으로 정치실험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 실패했지 않나.

프레시안 : 나라 전체의 능력이 결국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과거는 물론 현재 수권자에게만 책임을 돌리려는 듯 보인다. 이토록 잘못된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의 정치가 잘못된 건가?

▲ ⓒ프레시안
김광수
: 한국은 근대화 과정의 첫 단추를 스스로 꿰어보지 못했다. 영국이나 미국은 물론, 일본도 이러지 않았다. 선진국들의 시스템 개혁은 앙시엥레짐(구시대의 체제) 위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일본을 예로 들자. 막부 말기 쇄국정책이 실패하고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낄 때, 막부가 권력을 내놓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스스로 망하지 않기 위한 실천강령을 세우고, 유능한 인재를 선진국에 파견해 제도를 뜯어고쳤다. 그 토대에서 60년 만에 일본은 선진국으로 올라섰다. 스스로의 손으로 근대화 첫 단추를 끼웠다.

한국은 어땠나. 조선이 일본제국주의한테 망했다. 친일파가 득세했다. 그런데 친일파들은 어떤 사람인가. 조선시대 탐학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세력이었다. 조선을 망하게 한 사람들이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했다. 이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야합했고, 또 독재정권과 손잡았다. 민주화 이후에는 이 세력이 이미 금력을 가졌으니 권력 자체가 돼 버렸다. 한국은 100년 동안 스스로 근대화의 첫 단추를 꿰어본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첫 단추부터 다시 꿰어야 한다.

프레시안 : 결국 사회 전체를 개조하지 않으면 경제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소리인데, 어떻게 하자는 건가?

김광수 : 경제정책은 결국 정치에서 결정난다. 정치를 바꿔야 한다. "무슨 경제연구소가 정치 얘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를 바꿔야 하고, 그 근본은 정치 변화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나만 주식 해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정치에는 관심 없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처럼 미련하고, 바보 같은 이야기가 없다. 비열한 태도다. 전쟁터에서 혼자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해봐야 소용없다. 남이 살아남을 확률이 10%라면 그 사람은 기껏해야 15%다. 전쟁이 안 일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마찬가지다. 경제가 계속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면 그 속에서 자기 혼자 용 써봐야 갈수록 사회는 악화될 뿐이다. "왜 내가 취업을 못하나"하고 한번 찬찬히 생각해봐라. 한두명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취업을 못한다면 그건 자기 탓이 아니다. 뭔가 거대한 국가 체제 자체가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정치를 하겠다는 건가?

김광수 : 그렇다. 미래 세대 양성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 김광수 경제연구소 포럼 회원이 7만 명 정도다. 이들을 바탕으로 나름 본격적인 세대교체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포럼의 지역모임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올해부터는 공부방을 모아서 인재양성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를 토대로 기회가 올 때 정말로 국민들에게 선택의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프레시안 : 현실 정치세력 중 연구소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나?

김광수 : 이름을 말하기 곤란한데, 가끔 몇 분이 찾아왔다. 보통은 그냥 돌아갔다. 대부분이 흥정하려는 생각만 갖고 있더라. "내가 당신들에게 이러저러한 걸 줄테니 당신들은 내가 원하는 걸 제공해 달라"는 식이다.

"자식세대들이 잘 사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프레시안 : 당신이 생각하는 개혁의 대안은 무엇인가?

김광수 : 대안을 갖고 있지만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한 가지 조건을 달겠다. 그 사람들(기성 정치세력)이 먼저 물러나는 게 조건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말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프레시안 : 바라는 대로 패러다임이 바뀐다면, 어떤 세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나?

김광수 :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긴 힘들다. 크게 이야기하면 자식세대들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 잠재력을 자생적으로 키워나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똑같은 목표를 세우고 있다. 다만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할 때, 사회적·역사적 배경이 달라서 방법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환자의 증세가 다르면 처방도 달라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게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식세대 중심의 정치권력 교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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