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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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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꿈꿨다"

[화제의 책] 박인상 전 한국노총 위원장 회고록 <외줄타기>

지난해 11월 30일, 한국노총 장석춘 위원장이 국회 정론관에 섰다.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를 놓고 노사정 간의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한국노총은 하루 뒤, 정책연대 파기와 총파업 선언을 할 예정이었다.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자청한 장석춘 위원장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기업 내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 노조 사이에 강성 투쟁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고 더 투쟁적인 노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갈망하는 상생과 협력의 선진적 노사관계 실현은 요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국가의 선진화도 멀어질 것입니다."

'노사 자율 교섭을 전제로 한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기존 입장과 180도 다른 얘기였다. 입장 변화의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지난 7일 장석춘 위원장은 이와 관련 "내가 자문을 받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설득하려면 이런 내용도 필요하다'고 얘기해 들어간 문구"라고 설명했지만, 의문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한국노총이 반대했지만, 2011년 7월이면 복수노조 시대가 열린다. 장석춘 위원장도 새 노조법이 통과된 뒤에는 '복수노조가 대세라는 것은 인정한다'고 말을 바꿨다. 그런데 한국노총은 한 달 전에, 왜 그랬을까?

최근 나온 박인상 전 한국노총 위원장의 회고록 <외줄타기>(박인상 말하고 박미경 씀, 매일노동뉴스 펴냄)는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위원장님,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민주노총으로 다 가고 한국노총 1년 안에 망한다고 합디다. 제 말이 아니고 나름대로 유명한 대학교수가 한 말이랍니다."

한 산별대표자가 한 말이었다. 당시 박인상 위원장은 "노동조합법 3조5호라는 '찢어진 우산'을 과감히 벗어던지자"며 기존의 한국노총 입장이던 '복수노조 반대'를 '허용'으로 바꾸자고 나섰다. 그것도 사업장 단위의 복수노조가 아니라 상급 단체인 민주노총의 인정 여부를 놓고 벌인 토론이었다. 당시 박인상은 이렇게 설득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조합원을 위해서 열심히 뛰는데 조합원들이 왜 우리에게 등을 돌리겠습니까."

그리고 13년 후, 한국노총은 다시 '복수노조 반대' 주장을 들고 나왔다. 올해로 창립 64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노총이 '복수노조 허용'을 공식 입장으로 가졌던 기간은 고작 13년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료가 될 박인상의 회고록

▲ <외줄타기>(박인상 말하고 박미경 씀, 매일노동뉴스 펴냄). ⓒ프레시안
사실 한국노총은 한 단어로 설명하기는 힘든 조직이다. 요동치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한국노총은 있었다.

박정희 독재가 끝난 뒤, 신군부의 '노동조합 정화 조치'로 "대대적인 노조 간부에 대한 숙청"을 겪어야 했으면서 1987년에는 "국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바라는데 정부가 들고 나온 '4.13 호헌 조치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끝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노동자들로부터 '어용'으로 몰려" 타도의 대상이 됐다.

1996년에는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 사태로 인해 한국노총을 부정하고 시작한 민주노총과 손을 잡고 '연대 총파업'을 벌였지만, '정리해고제'에는 도장을 찍어줄 수밖에 없었다. "50년 동안 여당을 편향적으로 따랐던 조직"이면서도, 1997년 대선 때는 김대중 대통령과 정책연합을 맺었고, 2007년 대선에서는 다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정책연대를 선언했다.

1960년대 대한조선공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해 금속노련과 한국노총을 거쳐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까지 지낸 박인상의 회고록은 그 한국노총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 개인의 삶에 대한 기록물의 가치를 넘어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사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박인상이 금속노련을 끌고 전노협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지만, 스스로 "나는 한국노총 사람"이라고 몇 차례나 밝힌 박인상의 삶이 오늘의 한국노총과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비정규직 잘렸다고 정규직이 들고 일어난, 42년 전 대한조선공사 노동자의 파업

그의 회고록은 조선공사 노동자의 투쟁으로부터 시작한다. 발단은 임시공, 즉 지금으로 말하면 비정규직 1175명에 대한 해고예고통보였다. 외환위기 이후 늘어난 비정규직 규모와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로 '비정규직 차별'을 꼽게 만들었지만, 박인상이 노조 청년부장이던 1968년에도 조선공사는 정규직, 즉 본공보다 임시공이 더 많았다.

놀라운 것은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뉴스'가 되는 지금과 달리, 그 당시 조선공사노조의 전략은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었던 점이다. 당연히 싸움이 시작됐다. 지부장, 부지부장이 없는 상태에서 떨어진 회사의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조합원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의장단이 없다고 안 싸울끼가? 마찬가지 아이가?"

법적 절차를 밟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김이 빠지면 안 된다. 조합원들이 공장문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아웃'이다. 그런데 그것은 기우였다.

(…) 임시공이 잘렸는데, 본공이 들고 일어섰다. 역시 조선공사노조는 우리나라 최고의 노동조합이었다. 성난 파도가 도크를 메웠다. 파업이 시작됐다.


박인상은 "조선공사 본공들이 노동자 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임시공과 함께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그때도 "먹고 살기는 너무 힘들"었고, "부산에서는 조선공사 본공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었다."

"요즘 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들 사이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그때라고 없었을까. 그때도 있었다. 본공들은 나이가 많았고 임시공들은 어렸다. 임시공을 본공으로 전환시키고 나면 회사가 어려워질 때 누구더러 나가라고 하겠는가."

박인상은 "본공들은 후배들을 위해 작은 양보에 인색하지 않았고, 임시공들은 본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 힘이었다"고 말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대량해고로 촉발된 1968년 파업, 그리고 그들은 또 이겼다. 물론 "정작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사실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의 회고록은 조선공사 노동자의 투쟁으로부터 시작한다. ⓒ매일노동뉴스

파업으로 인한 해고, 다시 노동자가 되다

"1964년 뒤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조선공사 노동자들을 무릎 꿇게 한 것은 이듬해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긴급조정권이 발동됐다. 그리고 조합원의 가족 2명을 포함해 27명이 구속됐다. "솔직히 말해서, 노동조합을 시작할 때 구속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박인상도 감옥에 갇혔다. 조선공사에서도 잘렸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그는 조선공사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다시 노동자가 됐다. 목적은 간단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 하나. 노동자들이 단결했을 때 솟구쳐 오르는 힘을 보고 싶었다. 단결의 맛, 승리의 기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노동자 조직화"가 그의 선택의 이유였던 셈이다. 당연히 그는 대평철공소 노동자로 금속노조 직할 영도 철공분회에 파견된 사무장이 됐다. 무려 40여 년 뒤 다시 '노동운동의 새 목표'로 설정된 산별노조의 현장 간부가 된 것이다. "하루에도 두세 번씩 철공소를 돌며 사장을 상대로 '근로기준법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을 했고, 어느 날은 "하청대금을 못 받아 사정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사장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나의 노동운동은 이념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박정희 독재 아래에서도 꿋꿋했던 그의 활동은 "이론이나 노선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그가 금속노련과 한국노총에 여러 차례 "실망"을 느낀 이유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특히 그는 훗날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었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에 사퇴해야 했던, 이석행이 1984년 진주의 대동중공업에서 파업을 벌이던 때에 대해 상세히 적었다.

"파업을 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던 그때, "절박하고 외로운 파업"을 벌이던 이석행에게 금속노련의 고위 임원은 외려 "지금이 어느 때인데 파업을 하냐. 당장 집어치우라"고 날뛰었다.

박인상은 "어쩌면 나는 이 무렵부터 금속노련 위원장으로 출마할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는 "독재정권으로부터 버림받기도 전에 조합원들로부터 먼저 외면당할 처지에 놓인" 금속노련을 바꾸겠다는 결심이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내가 꿈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혁명이었을까. 아니다. 나의 노동운동은 이념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노동자라는 자긍심을 갖게 됐다. 파업을 못하게 하면 조직을 했고, 조직을 못하게 하면 교육을 했다. 내가 꿈꿨던 것은 개혁이었는지도 모른다."

"정권에 무릎 꿇은 과거도 우리의 과거…부끄럽다 외면해선 안 된다"

한 차례 도전의 실패 끝에, 그는 1988년 5월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의 거센 파도가 휩쓸고 간 뒤였다. 위원장이 되자마자 그가 내린 첫 번째 주문은 "바둑판은 내다 버리고, 룸살롱이나 요정에 가서 술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직시를 요구하고 있다.

"나는 한국노총이 해야 될 일 가운데 하나가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고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유행처럼 나왔던 '역사 바로 세우기'나 '청산'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정권에 무릎을 꿇은 과거도 우리의 과거 아닌가. 그것이 부끄럽다고 해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전노협 건설이 가시화되고 "산하 조직과 정들었던 후배들이 떠나가던" 때 "손발이 잘려 나가는 느낌"이면서도 그가 한국노총에 남은 이유도 같았을지 모른다. 그는 이 책에서 여러 차례 자신에 대해 "나는 한국노총 사람이고, 내 임무는 한국노총을 개혁하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1996년, 역시 한 차례의 실패 끝에 그는 한국노총 위원장이 됐다. 그해 6월부터 이미 경제위기론이 흘러 나왔고 정부는 적극적으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단식도 했고, 파업 준비에도 박차를 기울였다. 한국노총의 50년 역사상 첫 총파업 준비하면서 박인상은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파업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내게 개인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총파업으로 노동법 개정을 막기 어려울 것이고, 총파업도 쉽지 않을 주장이었다. 또 총파업으로 한국노총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예고했던 총파업을 잇따라 유보했다. 그리고 '노동법 날치기'는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박인상은 "노동계의 파업 유보가 국면 주도권을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됐다"며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날치기 통과로 양대 노총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부 개정을 얻어냈다. 비록, 정리해고제는 막지 못했지만.

"정리해고 법제화, 더 부끄러운 것은 그 이후였다"

"돌이켜 보면 정리해고제에 동의한 것보다 이후가 더 부끄럽다. (…) 이 시기 싸운다고 싸웠지만 이후 노동계가 비정규직 확산을 막기 위해 무슨 노력을 기울였는가, 하는 대목에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받아들인 뒤 현장은 서서히 비정규 노동자들로 채워졌다.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가 없었다면,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조합원이 됐을 것이다.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비정규 노동자들을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고 있다."


이런 평가에 이어 그가 던지는 질문은 그때 그 '날치기 노조법'에서 시작된 노동현안이 한국노총의 '결단'으로 13년 만에 일단락 된 오늘에도 유효하다.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해야 했던 일은 비정규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빨리 흡수하고 대오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이후 각각 현장으로 몰아닥치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또 노사정위에 대한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해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은 아닐까."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이 금지되고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제도 도입과 창구단일화를 전제로 한 복수노조 허용을 앞두고 있는 지금, 양대 노총은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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