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원이 〈레디앙〉에 기고한 〈진보의 미래〉독후감을 최근에 읽었다. 장 연구원이 쓴 글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자본에 대한 언급이었다. 장 연구원은 "'진보 원리주의'라는 간편한 규정에 떠밀려 조명 받지 못한 '진보'의 얼굴은 '자본의 지배권'과 정면으로 맞서는 어떤 입장이고 세력이며 지향이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을 용인하지 않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이 관철되는 그 영역, 즉 경제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분배와 복지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전쟁의 진짜 이름은 '자본과의 대결'이다"라고 적고 있다.
'자본'에 대해 사뭇 공세적인 입장을 보이는 장 연구원의 관점을 진보 진영 일부의 인식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장 연구원의 글 속에는 '자본'에 대한 날선 적의(敵意)만 번득일 뿐 자본을 왜 다스려야 하는지 다스려야 한다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자본의 지배권을 용인하지 않고 해체한다는 것, 자본의 지배권이 관철되는 그 영역, 즉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 '자본과의 대결'이라는 것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란 어렵다. 시장을 계획으로 대체하자는 의미인지, 사적 소유를 폐절하자는 의미인지,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국가가 금융, 국가기간산업 더 나아가 상당수의 사기업을 소유하고 직접 경영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장 연구원이 쓴 글이 독후감이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이해못할 바도 아니지만 그렇다해도 장 연구원의 글은 자본에 대한 불신과 반감 너머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다.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가 쓴 "노무현, 이건희…'사람 사는 세상'은 꿈일 뿐인가?"라는 제목의 글도 장 연구원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 기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계와 비극적인 운명의 원인을 자본의 지배권이라는 열쇳말로 풀이하고 있다. 성 기자에 따르면 원대한 이상주의자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뜻을 펴기에는, 아니 '깨어 있는 시민'에게 허용된 자본의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공간이 너무 좁았고, 결국 고 노 전 대통령은 숨이 막힐 듯 비좁은 방에서 몸부림치다 온 몸에 상처가 난 채로 죽었다. 자본의 지배권을 제어해 자본의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여유 공간을 넉넉히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제2의 노무현이 등장한다 해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것이란 것이 성 기자가 쓴 글의 결론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성 기자는 진보의 미래가 자본의 지배권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과연 '자본'이 문제일까?
성 기자는 박연차 수사와 이건희 수사를 비교하면서 전직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린 것을 자본의 지배력이 한국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의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건희에 대한 검찰과 사법부의 굴종은 자본의 지배권 때문이라기보다는 '법치'의 부재 탓으로 보는 것이 온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장경제라면 공정한 게임의 룰과 법치 등이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고 이를 근저에서부터 흔든 이건희 같은 사람은 단호하게 응징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감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시장감독기구, 검찰과 법원 등의 사법기구 등이 자신들의 임무를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대로 수행했다면 이건희는 지금도 감옥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삼성 장학생이 상징하듯이 삼성의 영향력 혹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입김이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미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이를 '자본의 지배권'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자본의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불법승계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초법적인 존재가 된 이건희의 사례는 '자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법치'와 공정한 시장규율을 담보해야 할 국가의 역할 방기라고 보는 것이 옳다.
'자본과의 대결'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드는 것이 시급해
기실 '자본' 내지 '자본의 지배권'을 불온시하는 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화폐를 매개로 한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생산과 교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시장경제는 적지 않은 난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최적의 경제시스템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고 지대추구행위가 엄금된 상태에서 공정한 시장경제가 작동한다면 시장은 효율과 형평,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은 시장이 건강하고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불로소득의 근절, 독과점의 방지, 공정한 거래의 확보, 균등한 기회의 제공, 특권과 반칙의 폐절, 법치주의의 확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는 자본의 지배권을 차단하고 제어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나 부당한 '자본의 지배권'행사가 자본의 본성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기 쉽다.
진보의 미래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시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시장에 대한 맹목적 추종도 위험하지만 시장이나 시장의 핵심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인 자본에 대한 적대감도 진보의 미래를 재구성하는데 피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다. 지금 진보, 개혁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과의 대결'과 같은 전투적이기는 하지만 한 없이 공허한 선언이 아니라 공정하고 효율적인 시장경제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분명한 원칙과 구체적인 실행방법이다.
자칫 진보, 개혁진영이 '자본과의 대결', '자본의 지배력 해체'와 같은 실체 없는 선언을 일삼는 동안 수구진영이 시장 담론을 독점할까 두렵다. 분명한 것은 국민들 대다수가 납득할 만한 시장 담론을 구성하는데 실패하는 한 진보, 개혁 진영의 재집권은 영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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