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생활은 엉망이 됐다. 김은숙 씨가 "몇 년 전에는 그때가 '밑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때는 천국이었다 싶다"고 얘기하는 까닭이다. 2009년은 그녀에게 그만큼 잔인한 날들이었다.
그녀가 속해 있는 88컨트리클럽(88CC)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다. 몸이 아파 일을 못 한 것도 아니다. 특별히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는 '자발적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첫 직장으로 골프장을 선택해 어느덧 20년이 가까워오는 '베테랑' 경기보조원 김은숙 씨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 라운딩에 9만 원…장마철과 한겨울에는 '일이 없다'
겨울은 골프장에서 '비수기'다. 날이 추워지면 라운딩 하는 손님도 줄어든다. 유례없이 장기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18일 경기도 용인시의 88CC는 고즈넉했다. 김은숙 씨와 함께 만난 이미영(가명) 씨는 "오늘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고 나왔는데 티켓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사흘 째 라운딩을 나가지 못했다.
▲겨울은 골프장에서 '비수기'다. 날이 추워지면 라운딩 하는 손님도 줄어든다. 유례없이 장기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18일 경기도 용인시의 88CC는 고즈넉했다. ⓒ프레시안 |
손님 수에 따라 그날 일할 수 있는 경기보조원의 숫자도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내가 언제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것이 일상이다. 비록 순서가 있긴 하지만, 하루 전에야 대강 "내일은 오후 쯤 일을 할 수 있겠구나"를 짐작할 뿐이다. 당연히 출퇴근 시간도 제멋대로다. 한 번 라운딩을 나가면 받는 돈은 9만 원. 손님에게 돈을 받지만, 이 액수는 회사가 정한다.
한 라운딩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7시간이다. 준비 시간과 뒷 정리도 경기보조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창 성수기인 4~6월과 9~11월에는 새벽부터 나와 하루에 두 번 라운딩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날은 중간 대기 시간인 3시간을 더해 꼬박 17시간 씩 일을 하게 된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장마철과 한겨울에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수입을 9만 원×365일로 단순 계산할 수는 없다.
김 씨가 지난해 번 돈이 2400만 원 수준인 것은 그래서다. 그런데 김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88CC에서 벌어진 경기보조원 대량해고 사태 때문이다. 비록 김 씨 자신은 해고자가 아니지만, 노조 분회장이라는 이유로 같이 일을 쉬고 있는 것이다.
88CC에서는 무슨 일이? "정권 바뀌니 사 측 태도 바뀌더라" 사실 88CC 경기보조원들이 별도의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10년 전인 지난 1999년의 일이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는 아니지만 노동조합법상은 노동자"라며 노동부가 설립필증까지 내줬지만 회사는 노조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간 노동조합과 회사의 크고 작은 갈등이 시작됐다. "회사가 '너희는 개인사업자'라고 우겨서 노동부의 행정해석을 받았더니 마지 못해 노조를 인정했다. 단체협약 체결하자고 했더니 싫다면서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40여 일의 직장폐쇄 끝에 갈등을 풀어 간신히 단체협약을 만들었지만, 2년 뒤에 이 단협을 갱신하자고 했더니 또 싫다고 직장폐쇄 조치를 내렸다. 2003년까지 그렇게 힘들었다." 어렵게 시작한 노동조합이었지만, 4년이 지난 뒤 88CC의 노사관계도 안정돼 갔다. 김은숙 씨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5년 동안은 너무 평화롭게 잘 지냈다"고 말했다.
그 분위기가 깨진 것은 지난해였다. 형식적 사용자는 주식회사 88관광개발이었지만, 이 회사는 국가보훈처가 위탁 관리를 맡긴 것일 뿐이다. 실질적 사용자는 정부인 것이다. 당연히 정권이 바뀌면서 임원도 다 달라졌다. 그리고 평화롭던 노사관계는 완전히 180도 달라졌다. 서약서 강요, 각종 경위서 제출 요구 등 다양한 방법으로 회사는 노조를 압박했다. 지난해 9월에는 조합원 1명이 "고객 불친절"이라는 사유로 처음으로 징계 해고됐다. "이 해고는 부당하다"며 보훈처에 글을 올린 조합원 52명이 한꺼번에 또 출장 유보 등 사실상 해고됐다. 총 58명의 해고자 문제는 1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다. 보훈처에 올린 항의 글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사 측의 주장에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지난 4월 경기지방노동위에서 사 측의 부당노동행위가 인정됐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사는 노조를 탈퇴한 13명만을 복직시켰다. 그 사이 지난해 6월 150명이던 조합원은 12월 현재 69명으로 줄었다. "처음 노조를 만들고 직장폐쇄까지 됐을 때는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생에 최악의 힘겨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가 훨씬 나았다. 1년 이상 해고자가 되니 '바닥은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관리자들의 말대로 "좋은 시절"이 딱 끝나버린 지난해 3월부터 노조 분회장을 맡아 온 김은숙 씨의 말이었다. 김 씨는 지난 여름, 국가보훈처 앞에서 한 달 동안 단식도 했다. 남은 것은 여러 건 걸려 있는 소송의 결과다. |
최소 고정 지출액이 50만 원…수입증명 안 되는 캐디는 은행 대출도 안 된다
▲지난해 11월부터 꼬박 1년 동안 김은숙 씨는 한 푼도 벌지 못했다. ⓒ프레시안 |
김 씨는 저축해 놓은 돈도 없었다. 임대 아파트 보증금 1900만 원으로 담보 대출을 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보증을 서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 씨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구한테 보증을 서달라고 하냐"고 되물었다.
수입은 없어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돈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당장 임대 아파트 월세가 매달 17만2000원이다. 전기세와 가스요금을 포함한 관리비도 10만 원이 든다. 의료보험료가 2만8000원이다. 핸드폰 요금은 이 사태가 벌어지면서 되려 늘었다. 지난해만 해도 평균 4만 원을 넘지 않았던 핸드폰 요금이 오랜 복직 투쟁을 하면서 10만 원이 됐다.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의 병원비는 한 달 평균 10만 원이 든다.
식비를 제외한 월 평균 최소 지출액이 50만 원 수준인 셈이다. 물론 작년보다 다른 지출은 많이 줄었다. 줄여야만 했고,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5만 원씩 내던 민간보험은 장기간 내지 못해 실효됐다. 산 꼭대기의 골프장까지 출퇴근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13년 된 자동차는 밀린 벌금 30만 원을 대신 내주겠다는 사람에게 그냥 넘겨줬다. 4형제의 막내딸로 조카들만 7명이지만 집안 행사도 모른 척 하고 산다. 김 씨는 이 대목에서 "사실 좀 속상하다"고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니 형제들이 자주 우리 집으로 온다. 조카들이 오면 용돈이라도 한 푼 쥐어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형제들보고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김 씨는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경조사비를 포함해 교제비로 한 달에 50만 원은 들었다"고 말했다. 이 돈도 올해는 지출이 0원이다. 그녀는 "나랑 밥 먹으려면 무조건 사야한다고 주변에 얘기해 뒀다"며 웃었다.
그녀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아는 사람에게 빌려 해결하고 있다. 김 씨는 "다행이 88CC 투쟁을 지지해주는 고마운 사람이 있어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아파트 월세와 휴대폰 요금이 연체를 거듭하다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돈을 빌려 해결하는 식이었다. 지금까지 빌려 쓴 돈만 1800만 원에 달한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김 씨는 손 쓸 틈 없이 신용불량자가 됐을 것이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곧바로 빈곤층 전락…실업급여 사각지대는 '광활하다' 회사에서 해고됐지만 복직을 요구하며 싸우는 사람들의 생계난은 김 씨와 다르지 않다. 오랜 복직 투쟁은 그 결론과 관계없이 당사자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든다. 혹여 복직에 실패하고 싸움을 접는다 해도 대부분 재취업조차 쉽지 않아 신용불량자의 꼬리표를 쉽사리 떼지 못한다. 지난 여름 77일 동안 진행됐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철회 파업 참가자들도 마찬가지다. 노사 갈등이 마무리된 지 100일이 훌쩍 넘은 지난 11월에도 전직 쌍용차 노동자의 32%가 전혀 소득이 없는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배우자의 소득까지 포함한 월 가구소득이 100만 원 미만인 경우도 30%나 됐다. 민주노동당과 쌍용차 정리해고특별위원회가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다. 월 평균 가구 소득이 100~150만 원인 경우도 21.0%로 쌍용차 사태로 회사를 떠난 이들의 82.5%가 사실상 빈곤층으로 전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속노조나 보건의료노조와 같이 대규모 산별노조의 경우 노동조합이 최소한의 비용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돈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실업급여는 기간도 짧지만 사각지대가 너무 넓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상동 연구원은 "고용보험 사각지대 규모는 연구기관과 연구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1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당장 김 씨와 같은 특수고용직은 실업급여 지급 대상에 포함조차 되지 않는다. 때문에 국가 재정을 투입해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실업자를 지원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울림은 미미하다. 참여연대는 지난 11월 국회에 실업급여 수급 기간이 끝난 실업자와 청년실업자 등에게 최저임금의 80% 수준의 구직촉진수당을 지급하자는 내용의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청원했다. 정부는 내년부터 일정 규모 이하의 자영업자에 한해 본인 희망에 따라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그러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제기된다. 임의 가입의 형태여서 가입율이 미미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경기보조원의 경우 이미 지난해부터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등과 함께 예외적으로 산재보험 가입을 허용하고 있지만, 가입율은 낮다. 경기보조원 입장에서도 보험료의 절반을 내야하는 것이 부담이고, 사용자들이 임의로 '적용제외 신청서'를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김은숙 씨는 "노조가 있는 우리도 19명 밖에 가입을 안 했고 전국적으로 내가 알기엔 2곳에서만 가입자가 있다"고 말했다. |
"40~50대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저임금, 단시간 노동 뿐"
이런 사정은 김 씨 뿐이 아니다. 복직 싸움이 길어지면서 노조는 지난 여름부터 해고된 조합원들을 '아르바이트'로 내보냈다. 전부가 여성이지만, 경기보조원 가운데는 여성 가장이 많아 온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는 사람이 다수인 탓이었다. 이미 많은 조합원들이 집을 줄여가면서 전세금으로 먹고 살고 있던 때였다.
"40대 중반의 언니가 있다. 일할 때도 돈도 잘 안 쓰고 성실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집안의 가장이었다. 열심히 벌었어도 모으질 못했던 것이다. 복직 투쟁 하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전부 다 까먹고 1년 사이 집을 3번이나 옮겼다. 방 2개짜리 집에서 원룸으로 이사했다가 최근에는 다시 재개발 지역의 철거 직전 빈 상가로 이사를 갔다."
▲일을 구하려고 해도 중년의 여성 노동자가 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다. 그나마 젊으면 식당에서 서빙 자리라도 구할 수 있지만 40대, 50대는 그마저도 없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이다. ⓒ프레시안 |
일을 구하려고 해도 중년의 여성 노동자가 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다. 그나마 젊은 30대면 식당에서 서빙 자리라도 구할 수 있지만 40대, 50대는 그마저도 없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이다. 당연히 해고된 조합원 가운데 비록 저임금일지언정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절반도 안 된다.
"우리가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자리라는 것이 죄다 저임금인 것은 똑같다. 12시간 씩 일해서 100만 원 버는 식이다. 그나마 안정적이면 다행이다. 그런데 50대 쯤 되면 그마저도 없다. 마트 청소하는 힘든 일도 다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을 원한다. 단시간 아르바이트 외에 할 일이 없다."
복직을 포기하고 다른 골프장으로 가려고 해도 못 가는 이유도 같다. 김 씨는 "어느 골프장이든 30대 초반까지만 뽑아준다"고 말했다.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어 88CC는 정년이 58세이지만, 다른 골프장의 경기보조원 정년은 최대한 늦어야 45세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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