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재아(宰我) <논어>에는 재아에 관한 기록이 분량은 많지 않아도 그의 사람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잠이 많고 말대답이 많은 사람이었다. 혼자 문제를 붙잡고 궁리하기를 좋아하는, 명석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공자는 재아를 놓고 짜증도 내고 걱정도 했다. 나쁜 습관들이 있는 데다가 말을 함부로 하는 재아에게 야단도 치고 조바심도 치는 것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재아가 훤한 대낮에 낮잠자고 있는 것을 안 공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에는 회칠을 할 수 없다. 너 같은 놈을 야단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재아는 너무 똑똑한 게 탈이지만 말이 앞서거나 얕은 꾀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성은 넘쳐나는데 판단력이 아쉬운 사람이랄까? 토론에 능하지만 결국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고 듣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상례에 관한 공자와의 대화에서 그런 면을 알아볼 수 있다. 재아의 주장은 3년상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고, 그 이유는 그 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군자가 3년간 예를 행하지 않는다면 예가 필히 흩어질 것이고, 3년간 음악을 돌보지 않는다면 음악이 필히 무너질 것입니다." 자연이 1년에 한 바퀴씩 도는 데 맞춰 복상하는 사람도 1년이 지나면 일과 놀이, 그리고 다른 예를 행하는 일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공자가 물었다. "상중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면서 네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네, 편안합니다."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상중인 군자는 좋은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운 줄 모르며 자기 집에 있어도 편안함을 모른다. 그래서 쌀밥을 먹지 않고 비단옷을 입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아무렇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려무나." <논어>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재아가 방을 나갔고, 공자가 다른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질지 못하구나, 재아는. 아이가 세 살이 지나야 부모 품을 나오는 것이니 3년의 상기는 천하 사람들이 함께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재아는 부모에게 3년간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란 말인가?" 대화가 있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록하는 일이 <논어>에는 별로 없다. 위의 예처럼 대화의 주된 상대자가 없는 상태에서 공자가 한 말을 전해주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이런 상황이 재아가 자리에 있을 때부터 존재하던 긴장감을 더욱 높여준다. 이 대화가 이런 형태로 전해진 까닭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전해진 이상, 공자와 재아 사이의 관계가 긴장된 것이었음을 이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재아가 냉혹한 성격의 인물로서 스승을 쉽게 화나게 하거나 짜증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재아는 스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지만, 또한 스승을 앞으로든 어느 방향으로든 더 나아가도록 떠밀어주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논어>에 하나 보인다. 재아가 물었다. "우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진 사람이 알았을 때 (자기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따라 들어갈 것입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어찌 그리 하겠는가? 군자가 가볼 수는 있지만 빠질 수는 없느니라. 군자를 속일 수는 있지만 넋을 빼앗을 수는 없느니라." 재아가 이런 질문을 짜낸 것은 자기 식의 함정을 만들어 스승을 시험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착한 마음과 고상한 성품을 가진 "어진 사람"은 공자의 가르침이 이끄는 도덕적 성취의 궁극적 목표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재아는 우물 속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이상적 인간이 알았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고 스승에게 물은 것이다. "어진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우물 속의 사람이 쓸쓸할 것을 걱정해서 위험과 고통을 함께하려고 따라 내려가지 않는다. 그 성품의 특성은 "가까운 것에서 비유를 얻는"능력을 꾸준히 지키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걱정과 두려움, 괴로움과 즐거움을 보고 들을 때 자기 자신의 그런 감정으로부터 유추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은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에게서는 이 특성이 두서없이 충동적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 또한 재아가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니, "어진 사람"은 어떻게 하면 우물 속의 사람을 구해낼 수 있을지 미리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우물 안으로 쫓아들어갈 것이라고 본 재아의 가정이 합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진 사람"이 착한 행동을 하는 데는 생각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재아가 스승의 가르침을 비웃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착한 마음 때문에 속임을 당하기 쉬운 "어진 사람"의 안전을 걱정해 준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공자가 제시한 표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한 것일 수 있다. 그 표준에 맞는 "어진 사람"이라면 실제 현실 속에서 실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공자는 대답에서 "어진 사람"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군자", 올바르고 절도 있는 사람 이야기를 했다. 군자라면 위험과 고통에 빠진 사람이 있음을 알았을 때 "가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위험과 고통에 쫓아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사람이나 속임을 당할 수 있는 것처럼 군자도 속임을 당할 수 있다. 아니, 보통사람들보다 더 쉽게 당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에 예민하고 의심을 적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자는 "넋을 잃지"는 않는다. |
엊그제 서울 나간 길에 김 선생님 서재에 들렀다. 여러 달 만에 미리 연락도 없이 갔는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주시고 책부터 꺼내 주신다. <신정 증보판 조선 후기 농학사 연구>. "내 농업사 연구에 영문 요약 달아주는 일이 이제 끝났군." 말씀과 함께.
1986년도에 시작해서 23년 걸린 일이다. 새로 내는 책이 있거나 전에 내신 책을 고쳐서 낼 때마다 영문 요약을 만들어드렸다. 이 작업이 내게는 대단히 실속있는 공부였다.
처음에는 요약에 담을 내용을 정리해 주시고 그것을 내가 알아서 영문으로 바꿔 올 것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요약을 만들려면 내 입장에서 연구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고집, 책 한 권 요약 만들 때마다 몇 차례씩 찾아가 마치 연구 심사라도 하듯 궁금한 것을 다 캐물었다. 단독 특강을 대놓고 받은 셈이다.
위에 인용한 공자와 재아의 사제 관계 이야기를 읽으며 그분과 나 사이의 별난 사제 관계가 떠올랐다. 역사학계에서 사제 관계라 하면 연구 분야가 이어지는 사이를 통상 말한다. 중국사 전공인 내가 한국사 전공인 김 선생님을 스승으로 받든다는 것부터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선생님께서도 나를 제자로 잘 인정하지 않으신다. 반쪽 제자 정도로 봐줄까말까다. 작년 봄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고 돌베개 한철희 사장과 함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제자가 아니라고 밝혀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구상 단계부터 못마땅해 하시던 것을, 책으로 나온 것을 보고는 막 화를 내셨다. 나를 꾸짖는 것으로 모잘라 한 사장에게까지 유탄이 튀었다. "한군이 뜻있는 출판 사업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책이라고 냈는가!"
스승 입장이 아니라 장배(長輩)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저씨가 조카 대하듯이 나를 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면이 있다. 40년 전 서울대 사학과에서 통상적 의미의 사제 관계를 처음 맺었지만, 그분께 특별한 배움을 얻게 된 것은 1985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달 동안 모시고 지낼 때부터였다.
니덤 교수의 동아시아과학기술사연구소에 체류하고 있을 때 파리에 체류 중이던 선생님이 중국농업사 자료 조사를 위해 건너오셨다. 생활도 보살펴 드리고 연구소 안내와 통역을 맡아 전면적 접촉을 가지고 지냈다. 내가 유럽 인문학의 "인간적" 학풍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는데, 그와 얼핏 대조되는 선생님의 치열한 연구 자세가 또한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 이후 내 공부하는 자세는 이 두 가지 축 위에서 새로 형성되었다.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여겼다면 그 때 내 생활하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납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공자가 재아를 보고 한심해 한 것보다 더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구석이 없지 않기에 곁을 주면서 학문의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을 것이다.
1990년 내가 교수직을 그만둘 때는 선생님과의 관계마저 잃을 뻔했다. 반년 전부터 대학 떠날 생각을 시작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어느 정도 반대야 예상한 일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였다. 몇 달 지나도록 내 뜻이 움직이지 않자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자네, 학교 그만두면 나랑 볼 생각 하지 말게."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이고, 학문을 그만둔 사람이라면 얼굴 볼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도 3년간 학위 논문에 공들이는 것을 보며, 신문사 일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자세를 웬만큼 지키는 것을 보며 마음이 누그러지셨지만, 내가 연구 활동에서 벗어난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연구와 평론의 경계에 애매하게 걸친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자 노여워하셨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으면 연구자의 입장을 굳게 지키면서 누구도 섣불리 반박하지 못하도록 당당하게 내놓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몇 달 후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을 찾아뵐 때 나는 무척 쫄아 있었다. <밖에서 본 한국사> 갖고도 그렇게 노여워하셨는데, 현실 정치와 관련이 있는 이런 작업 한다면 반응이 어떠실지 겁이 났다. 그렇지만 일에 관한 생각이라면 뭐든 남김없이 알려드리던 20여년간의 버릇을 갑자기 고칠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한 차례 설명을 듣고 몇 가지 질문을 하신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할 일이군."
작업이 끝나고 책을 가져갔을 때 돋보기를 쓰고 표지를 훑어보다가 "이번에도 돌베개에서 냈군." 하시고는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한철희 군 한 번 놀러오라고 하게. 전번에 야단쳐서 보낸 게 미안했는데, 이번엔 칭찬해줘야지."
엊그제 가서도 <공자 평전> 작업에 관해서는 자신있게 설명드렸지만, <조선 망국사> 작업 말씀 꺼내면서는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약간의 설명을 듣자마자 내가 구상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앞장서서 짚어 주시는 것이었다. 지도를 흠뻑 받은 뒤 인사드리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배우는 사람이 제자가 아니면 뭐야? 왜 나를 제자로 인정 안 하시는 거야?"
학문의 내용과 방법을 배운 스승이라면 여러 분을 댈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의 동기를 살피는 데는 25년째 맑은 거울 노릇을 해주시는 분이 김 선생님이시다. 연구 성과와 강의 외에는 사회와의 접촉을 거의 차단하고 살아오신 선생님께 이 글도 못마땅하실 것을 훤히 안다. 하지만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선생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
명경지수 같은 선생님의 삶과 천방지축 같은 내 삶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 스스로도 선생님 제자라고 나서기가 어색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걱정에서 학문의 뜻을 일으키는 학인의 자세를 그분께 배웠으니 어쩌겠는가. 공자가 "큰 스승"의 모습을 세우는 데는 오죽잖은 제자들도 나름의 공헌이 있었다. 나도 선생님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은 작업을 꾸준히 찾아나가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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