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끼리만 다 해처먹는 세상'이란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연말이다. 각종의 동창회니 모임이니 해서 송년회가 줄을 잇는데 그것 역시 '잘나가는' 사람들 몫일 경우가 많다. 공연히 그런 곳에 얼굴을 디밀었다가 열등감만 느끼고 슬쩍 자리를 뜨기 십상이다. 그리곤 어느 포장마차에서 1등 아닌 사람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고 한껏 취해서는 박성광마냥 "돈있는 인간들, 지들끼리 땅부자되고, 집부자 돼라"며 난장을 부리게 된다. 박성광은 그러다 "근데 강부자씨는 웬 강을 그렇게 사서 부자가 됐대?"라며 좌중을 웃기기라도 하겠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유머감각도 없다.
영화도 언젠가부터 1등만 독주하는 시대가 됐다. 박스오피스 10위에 오르는 것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10등은 커녕 2등만 해도 이제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다. 지금은 온통 <2012> 판이다. 잘만든 <백야행>도 백만 관객에 이르지 못하자 사람들 관심권 밖으로 내처지는 분위기다. <거친 녀석들 : 바스터즈>같은 영화는 아예 누구 영화인지도 가물가물해 한다. 영화가 좋고 나쁘고, 잘만들고 못만들고는 상관이 없다. 개봉 주말에 일단 1등을 하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해처먹는' 축에 끼어들 수가 없다. 12월 한달은 <뉴문>이나 <아바타>, <전우치>같은 영화만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올 한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새로운 영화라면 <디스트릭트9>이다.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도발적인데다 지적인 영화를 꼽으라면 타란티노의 <거친 녀석들 : 바스터즈>가 될 것이고 가장 빛나는 영화를 꼽으라면 박찬옥 감독의 <파주>가 될 것이다.
▲ 백야행 |
<백야행>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두고는 이런저런 평가가 엇갈리는 모양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대한 구조의 원작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해 낸 것만으로도 수작의 대열에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원작이 갖는 어둡고 드라이한 분위기에 사람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미덕을 갖춘 작품이다. 그걸 위해 영화가 다분히 신파적이 된 것 역시 나는 오히려 마음에 든다. 소설과 달리 형사의 역할과 비중을 상당 부분 앞으로 내세우게 된 것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야행>이 비교적 조기에 시장에서 스러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흥행성과는 별개로 작품성만으로도 공정한 대접을 받아야겠지만 얘기한 대로 지금의 세상은 1등만이 인정받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니 정말 이 드러운 세상!'이란 말에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고주망태 연기를 하는 박성광을 보며 낄낄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꼭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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