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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양극화…닮아가는 韓·日 비정규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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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통의 양극화…닮아가는 韓·日 비정규노동"

한일비정규노동 포럼 "시간이 별로 없다"

지난 2008년 6월, 도쿄의 번화가 아키하바라에서는 '무차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7명의 목숨을 빼앗고 10명을 다치게 한 이 사고의 주인공은 파견 노동자였다. 범행 직전 그가 남긴 메시지들은 이랬다.

"아, 집도 없이 떠도는 무직자가 되는 것인가. 점점 더 절망적이다."
"파견으로 어딘가의 다른 공장에 간다고 해도 반 년 만 지나면 또 이런 처지가 될 것은 뻔하다."


이후 일본 열도는 '파견 노동자'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다. 노무라 마사미 토호쿠 대학 교수는 "이 잔혹한 범행은 파견노동, 나아가 비정규 고용을 둘러싼 논의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뒤인 지난 8월, 일본에서는 이른바 '혁명'이 일어났다. 최초로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중의원 480석 가운데 무려 308석을 얻은 민주당의 선거 공약은 "제조업 파견을 금지한다, 2개월 이하 일자리에는 노동자 파견을 금지한다"였다.

당연히 일본은 지금 파견 노동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뜨겁다. 일본 학자들이 대거 한국을 찾아 한국의 전문가들과 함께 오직 비정규노동만을 주제로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포럼을 벌인 것은 이런 배경에 있다.

일본이 앞서 나간 비정규직 확대, 한국이 배우고 다시 일본이 한국을 보다

▲ 비정규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일본보다 우리가 앞선다. ⓒ프레시안
비정규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일본보다 우리가 앞선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나타난 고용 형태의 변화가 당장 각종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한국은 지난 2006년 관련 법을 만들어 '비정규직 보호'에 나섰다. 비록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학계의 논란으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비정규직 비율도 다소 우리가 앞선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지난 8월 통계청 조사 결과 34.9%, 575만4000명이었다.

반면 일본의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 노동자의 비율은 지난해 34.1%였다. 지난 1984년 15.3%에 비해 2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숫자로도 대폭 증가했다. 1984년에는 604만 명이었던 비정규직이 지난해에는 1760만 명이 됐다. 특히 일본 스스로 '전후 최장의 호황기'를 보냈다는 2002년에서 2007년까지 정규직은 23만3000명이 줄어든 데 반해 비정규직은 269만5000명이 늘어났다.

사실 한국의 비정규직 고용의 확산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지난 1985년 파견법을 제정해 노동자 파견을 인정해줬다. 일본은 또 1996년, 1999년, 2003년 잇따라 관련법을 개정해 "파견대상업무가 원칙적으로 자유화"(와키타 시게루 료코쿠대학 교수)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에야 파견법이 만들어졌고 2006년 한 차례 개정했다.

우리는 일본은 못 따라해 안달이다. 틈만 나면 일본의 고용 유연화 사례를 모범으로 정부가 들먹인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다시 우리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양국의 학자들의 만남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특히 고용모델, 정책, 법, 노동운동, 여성, 사회보장 등 6개 분야에 걸쳐 이뤄진 이번 포럼은 양국 모두 더이상 비정규직의 문제가 비정규 노동자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순히 약자에 대한 보호나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를 넘어 비정규 문제가 이미 한국과 일본 사회 모든 분야의 핵심 고리가 돼 버린 현실을 서로 확인하고 인정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일본은 젊은 남성의 고용에 민감"…남성 파견 노동자 급증이 사회를 들썩이게

일본은 왜 이렇게 비정규직 문제에 예민해진 것일까? 그 답을 노무라 교수는 "일본 사회는 전통적으로 젊은 남성의 고용에 민감한데 젊은 남성의 비정규 고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5~34세 남성의 비정규직 규모는 1990년 87만 명에서 지난 2008년 220만 명으로 급증했다.

특히 파견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 1997년 25만7000명이던 일본의 파견 노동자는 지난 2007년 160만8000명으로 60배 넘게 늘어났다. 고가 가즈미치 가나자와 대학 교수는 "특히 생산 라인의 파견 노동 도입이 합법화된 2004년 3월 이후 파견 노동자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통계는 도급 노동자를 포함하지 않고 있어, "실제 간접고용 노동자는 250~300만에 달할 것"이라고 고가 교수는 추정했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사회적 합의가 우리보다 강한 일본이기에 젊은 남성이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몰리는 것은 사회를 들썩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우리보다 13년 앞서 파견법을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와키다 교수는 파견법 제정의 진짜 이유로 △대기업에 만연한 '사내하청'이 위장도급이라는 것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한 대응 △여성을 파견회사 소속으로 바꿔 남녀차별 문제제기를 무마시키려고 △언제든 해고가 쉬운 풀타임 비정규를 받아들여 정규직 고용을 줄이기 위해 △노동조합를 장기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서를 꼽았다.

"간접고용 증가는 한국도 마찬가지…고통도 양극화"

해고가 어려운 대신 손 쉽게 자를 수 있는 고용 형태를 늘린 것이다. 우리도 최근 들어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용의 외부화', 즉 파견이나 용역과 같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규모가 점점 늘고 있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비정규 노동이 핵심적 업무에까지 사용돼 정규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며 "정규직이 거의 없이 주로 비정규직에 의해 운영되는 사업체도 유통업은 물론 제조업에서도 쉽게 발견된다"고 말한다.

정이환 교수는 "특히 고용의 외부화는 사내하청이라는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아웃소싱을 통한 사외도급의 확대도 중요한 통로"라고 설명했다.

이렇다보니 고통도 양극화된다. 지난 경제위기 시기 한일 양국 모두 비정규직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1997년에는 상용직이 먼저 줄어들고 임시, 일용직이 함께 줄어들었지만 지난해에는 상용직은 그대로인데 임시, 일용직만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노무라 교수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닛산자동차나 캐논과 같은 대기업이나 대기업의 자회사는 대규모로 파견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고용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며 "이런 '파견 잘라내기'는 비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한국 기간제법에 관심 보이는 일본…"법이 있어도 현실은…"

이날 포럼에서 눈에 띈 것은 일본 학계와 노동계가 우리의 기간제법과 파견법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하토야마 정권이 파견법 개정을 고려하고 있어 더욱 한국의 관련 법규에 질문이 쏟아졌다. 고가 교수는 "파견 노동 등 간접고용에 대한 규제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와키다 교수도 "파견 노동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싸다고, 동일노동 차별대우를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국가는 일본 외에는 없다"며 "파견법은 없애야 하지만 굳이 하나만 고칠 수 있다고 한다면 '동일대우'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 학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법이 현실을 규제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는 자조 섞인 토론이 오갔다.

강성태 한양대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없고 남의 나라에 있으면 좋은 제도인 것처럼 여겨지기 쉬운데 바로 그런 것이 차별시정제도"라며 "법이 만들어진 뒤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해본 적이 없는 제도"라고 말했다. 박수근 한양대 교수도 "현행 기간제법은 초단기 계약 등 편법적 행위를 막지 못하고 일부 개선도 있었지만 되려 하청업체에 고용되거나 실직하는 부작용도 생겼다"고 설명했다.

비정규 노동을 둘러싼 여러 분야에서의 이해를 통해 양국의 학자들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저임금인 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실업률을 낮추는 것은 결단코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불안정취업 노동자의 증가는 노동 시장 질의 악화, 즉 고용의 악화를 의미한다." (고가 교수)

적어도 비정규직 확대에 있어 우리보다 앞서 간 선배, 일본 학자들의 오랜 고민에서 나온 지적이었다. 일본은 이런 결론을 토대로 변화를 준비 중이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파트타임 노동, 과연 여성에게 장점이 있을까?

▲비정규직 가운데 여성 비중이 높은 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비정규직 가운데 여성 비중이 높은 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 마찬가지다. 특히 "일 가정 양립"이라는 명분 아래 단시간 노동, 즉 파트타임 노동자의 비중이 높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09년 3월 여성 단시간 노동자의 비중은 전체 여성 임금 노동자의 13.9%를 차지했다. 일본은 더 높다. 오사와 마치코 일본여자대학 교수는 "이미 지난 1980년 여성 파트타이머는 256만 명, 여성 고용자의 19.3%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말 여성의 파트타임 노동이 장점이 있을까? 분명 파트타임 노동은 육아 및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과 소득을 함께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실제 여성 단시간 노동자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다가 출산 및 육아시기가 지난 후인 30대 후반 여성에서 증가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좀 다르다. 단시간이라 하더라도 고용안정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권혜자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원은 "여성의 단시간 근로는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고용지속성이 가장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고용계약을 정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당사자들은 계속 고용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실제 근속기간은 여성 비정규직 평균 1년 10개월보다 9개월 짧은 1년 1개월이다. 심지어 1년 미만 근속기간의 비율이 75.9%나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여성이 비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단시간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단시간 노동의 자발적 선택 비중은 35.2%에 불과해 비자발적 선택 비율, 64.8%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비자발적으로 단시간 노동을 선택한 이유는 "생활비가 필요해서"가 33.7%로 가장 많았다. "육아 및 가사와의 병행을 위해"라는 대답은 24.3%에 그쳤다.

"일가정 양립, 단시간 노동의 장점을 고용불안이 깎아먹어"

한 마디로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단시간 노동의 장점"을 상시적 고용불안과 짧은 근속기간이 다 깎아먹는 셈이다.

또 여성 단시간 노동은 편의점과 같은 서비스 부문의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체에 집중돼 있다. 단시간 노동자의 46.2%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반면 1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율은 5.2%에 불과하다. 사업장의 규모는 해당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여성이 중심이 되는 단시간 노동의 열악한 환경을 짐작케 한다.

당연히 사회보험 가입률은 9.2%에 불과하다. 이는 정규직(58.3%)은 물론이고 비전형근로자(24.9%)보다도 월등하게 낮는 수치다.

권혜자 연구원은 "무엇보다 단시간 노동의 확대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리기 위해서는 안정적 단시간 일자리의 창출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단시간 정규직의 확대와 함께 단시간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성을 도모하는 방안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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