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읽을거리가 널려 있는데도 정작 마음을 울리는 글은 찾기 어렵다. 이 책, 저 책에서 짜깁기한 이야기에 자신의 얄팍한 생각을 덧붙인 글들이 홍수처럼 넘쳐난다.
이런 참에 이계삼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녹색평론사 펴냄)을 며칠간 정독했다. 지난 수년간 <프레시안>, <녹색평론> 등에 발표한 글을 묶은 그의 첫 책이다. 글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 읽던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그렇게 힘들게 책을 다 읽고서 속물 같은 생각을 했다. '그에게 배우는 밀양의 밀성고등학교 학생이 부럽다.'
그는 '지식인'이다
지역에서 희망을 찾자, 이런 얘기를 떠드는 지식인은 많다. 그러나 정작 서울을 버리는 이들은 드물다. '어쩔 수 없이' 지역에 자리를 잡더라도, 늘 눈길은 서울을 향해 있다. 이계삼도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고향은 "언제라도 떠나고 싶었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갔다.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나는 그저 '뿌리 뽑힌 삶'이었다. (…) 나는 어느 곳이든 뿌리내려야 했고, 그렇다, 내게도 고향이 있었다. 자동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도 어디든 충분히 다닐 수 있다는 것, 밉건 곱건 한정된 실명의 공간에서 일생토록 부대낄 구체적인 이웃을 가진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렇게 학교를 옮기고 귀향을 결행했다. 고향은 별로 변하지 않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란 아이들을 가르쳐 도시로 떠나보내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기쁜 열망이 있다. 땅과 고향을 지키는 일, 이 아이들 중 누구라도 되돌아와 살 만한 곳으로 내 고향을 가꾸는 일,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는 일 (…)."
▲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이계삼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
"이제는 새삼스럽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사회는 미쳐 있다. 이명박 정부 5년을 다 살아봐야 그의 시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가 등장해서 승승장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취임하기 전 두 달여 시간 동안에서 이미 그의 시대를 충분히 읽고 말았다. 그의 5년은 단언컨대 몰락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몰락'의 경험이며, '몰락 이후'의 삶에 대한 예지다. 몰락의 자리에 섰을 때 세상의 시선은 몰락을 예언하고, 몰락 이후의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할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미친 사회와 정서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는 '선생님'이다
이계삼을 '생각'하고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고향의 모교에서 다음 세대를 가르친다. "내가 먹고 싶지만 먹힐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인 이 '미친' 세상에서, 희망은 "아직 '사람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 그들을 찾아 구하는 것이다." 그가 오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정작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교육의 현실을 비관한다.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한 번도 사람을 잡아먹어보지 않은 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그는 "상처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감각이 점점 퇴화해가는 아이들에게 주눅 들어" 살았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그는 곧 깨달았다.
"아이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 아이들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타고난 천품이요, 악한 것이 있다면 어른들이, 혹은 이 사회가 그들에게 아로새긴 상처라고. 그들은 가냘픈 존재일 뿐이므로 그들에게 물어야 할 죄는 없다고, 믿게 되었다.
(…) 교육은 상처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국, 교육이란 상처와 뒤엉켜 그것과 함께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난 시절 한국 교육은 아이들의 상처에 무심했고, 이제는 이 상처가 폭력으로 분출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로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이계삼은 아이들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논술을 핑계로 책을 함께 읽고 한 명씩 돌아가며 제 삶의 고통을 털어놓았던 어느 수업 시간, 결국 그와 아이들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이들과 서로를 격려하고 치유하면서 이계삼은 드디어 '선생님'이 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지역 간부이기도 한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나에게 참다운 교육이란 이 형편없는 체제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 전교조가 (…) 실상 현실에서 무력한 것은 이 욕망의 시스템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한 영역으로 남아 제도적인 손질에 치중하는 세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실천가'다
'영혼 없는 사회'에서 희망이 되어야 할 아이들의 미래는 사실 잿빛이다. 이계삼도 그것을 잘 안다.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에워싸고 있는 가장 강력한 현실"은 '비정규직'이다. 결국, '미친' 세상에서 아이들은 "떠돌고, 찢기고, 타락할" 운명이다. 상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학교를 넘어서 사회로 향한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기륭전자, GM대우, 이랜드, KTX·새마을호, 코스콤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 미군 기지 때문에 쫓겨난 평택의 주민들, 시민권을 유린당하는 장애인, 벼랑 끝에 선 농민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는 개발 세력에 맞서 외롭게 저항하는 지율과 삼성에 맞서 싸우는 김성환을 옹호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태일, 권정생 등의 삶을 끊임없이 사색한다. "힘없고 약한 것들을 향해 품었던" 그들의 사랑, 그런 사랑에서 나온 "정의에 대한 단호한 열정"이야말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전태일이 "다시 이 땅에 살아온다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하고 또 실천한다.
"아마도 전태일은 그 어떤 미디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그 어떤 사회 시스템도 보듬지 않는 '현실들'을 부여안을 것이다. 그래서 전태일은 죽어가는 '농업'의 문제를 고민하며 스스로 똥짐을 지는 농부가 되거나, 자신이 처했던 것과 너무나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시민권을 유린당하는 장애인들의 벗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전태일은 맹목과 파괴만이 횡행하는 이 사랑 없는 세상을 넘어서 인간들의 우정과 사랑만히 교통하는 어느 '가난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 "전태일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 이 무력한 우리들의 희망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에게 무거운 도전이다."
"사람으로 살자, 당당하게 살자"
그렇다. 이계삼은 '영혼 없는 사회'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그는 오늘도 아이들과 부대끼며, 세상의 고통을 응시하고, "힘 없는 사람 망루 꼭대기로 몰아넣고 불로 태워 죽이는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자, 당당하게 살자" 되뇐다. 목사 최완택의 말대로 우리는 운 좋게도 '위대한 젊은 스승'을 한 명 얻었다.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와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 보자는 것이 유토피아라면, 자신의 마음에서 나와 자신이 이렇게 해 보려 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치는 '나는 유토피아는 갖고 있지 않지만,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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