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뜬 공룡' 이미지를 벗지 못하던 KT가 지난 6월 이석채 신임 회장을 영입한 후 한층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을 주도하는 한편, 통신·금융시장 재편에도 폭풍의 핵으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지난달 30일 발표한 금호렌터카 인수와 BC카드 지분 매입 시도는 상징적이다.
▲KT홈페이지. 밝고 경쾌한 기업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한 KT는 최근 들어 부쩍 강화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 |
M&A 시장 '최강 쇼퍼'
지난달 30일 금호렌터카 대주주인 대한통운은 KT-MBK컨소시엄을 금호렌터카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했다고 공시했다. 매각주간사 산업은행에 따르면 양측은 이번 달 안에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금호렌터카는 업계 1위 회사다.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온 알짜 매물을 KT가 걷어간 셈이다.
통신사업이 주축인 KT가 특별한 사업 연계성을 찾기 어려운 렌터카 사업에 뛰어든 것을 얼핏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KT측은 통합 시너지가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그룹 계열사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업무용 차량 중심의 KT렌탈이 있기 때문이다.
KT 관계자는 "(금호렌터카 인수) 실무 검토를 KT렌탈에서 계속 해 왔다. 막판 제안서를 낼 때 KT 명의로 한 것"이라며 "건설장비와 사무기기 등 KT렌탈의 사업 규모가 크기 때문에 (금호렌터카와) 합칠 경우 시너지는 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양사 합병에 대해서는 "아직 인수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비단 렌터카 사업뿐만이 아니다.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등 대형매물이 유달리 많은 올해 하반기 인수합병(M&A) 시장에서 KT는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쇼퍼(shopper)'다. 실제 KT는 IT비즈니스 사업 진출을 위해 '국산 운영체제(O/S)' 출시를 선언한 티맥스소프트와 50억 원 규모의 합자회사 설립을 준비 중이다. 이 사업은 KT 내 출자경영 담당 부서에서 주도하고 있다.
KT는 금융업 진출 행보도 본격화하고 있다. 금융과 통신을 융합하려는 움직임은 KT는 물론이고 경쟁사인 SK텔레콤과 LG텔레콤도 구체적으로 보이고 있으며, 은행권에서도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SK텔레콤은 하나카드와 업무 제휴를 추진하고 있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본격 짝짓기를 시작한 셈이다.
KT의 주요 타깃은 BC카드다. 우리은행과 신한카드가 각각 보유 중인 BC카드 지분 27.65%, 14.85%를 매각키로 결정하자 KT는 공개적으로 인수에 나설 방침을 밝혔다. 이 사업은 KT의 자회사인 KT캐피탈이 중심이다. 지난달 1일 KT는 한국거래소의 조회공시 요구에 "자회사 KT캐피탈이 검토 중인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KT캐피탈이 이 지분들을 모두 인수할 경우 BC카드의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된다.
▲이석채 KT회장은 열렬한 애국주의자이자 개발주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YS정권 경제수석을 지낼 당시 '경쟁력 10% 높이기' 등의 아이디어를 냈다. '임금을 잡아야 경제를 살린다'는 개발주의적 철학이었다. ⓒ뉴시스 |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거래 시 인터넷뱅킹 등 비대면 거래고객 비중은 지난해 82.7%까지 늘어났다. 반면 은행 창구를 통한 거래는 17.3%에 불과했다.
익명을 요구한 애널리스트 A씨는 "통신사의 차세대 사업은 특성상 금융권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BC카드가 신용카드 결제에 중점을 둔 회사라는 점은 상징적"이라고 말했다. BC카드 인수 시도는 단순히 금융권과 업무협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실상 본격적인 금융산업 진출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A씨는 "BC카드의 결제 정보를 이동통신 가입자 정보와 결합할 경우, 가맹점 안내 등 막강한 시너지가 날 것"으로 내다봤다.
'이석채 효과' 원동력은 정권 실세?
이와 같은 KT의 광폭 행보의 중심에는 이석채 회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KT와 KTF 합병부터 변화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이 합병(KT+KTF) 당시 "모회사 기준의 매출 산정 대신 계열사를 중심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각 계열사가 강한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성장하면 그룹의 실적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업계는 그의 말을 "비통신사업 부문에서 지속적인 인수합병(M&A)에 나설 것"이라는 말로 해석했다.
이 회장이 이처럼 광폭한 행보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로 그가 이명박 정부의 최측근 인물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앞서 SK텔레콤 최고 경영진이 언급한데서 나타나듯, 경쟁업체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이명박 정부의 인재풀로 일컬어지는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1기 출신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김기환 서울파이낸스포럼 회장, 한덕수 주미대사, 이효수 영남대 총장, 이성용 베인앤컴퍼니 대표 등도 1기 국민경제자문회의 출신이다.
이 회장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그가 KT회장에 취임할 당시 현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축사를 전달했다. 최시중 위원장은 KT를 비롯한 통신업체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SK텔레콤이 위기감을 느낀 이유는 이처럼 통신시장 규제자가 피규제자의 취임을 기뻐할 정도로 이 회장이 권력과 지근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달 26일 출범한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산하의 '그린IT협의체' 대표를 맡아 다시금 정부와의 끈끈한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린IT협의체는 IT관련 주요협회와 KT·SKT 등 통신·전력사업자, NHN·다음 등 인터넷/애플리케이션 업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건설기술연구원·정보처리학회 등 연구기관·학회와 지식경제부·행정안전부·방송통신위원회 등 관계부처 합계 34개 기관이 참여하는 매머드급 조직체다. 청와대에서는 김상협 미래비전비서관과 양유석 방통비서관이, 녹색성장위에서는 양수길·한미숙·곽재원 위원이 참가한다.
현 정부의 이른바 '녹색성장' 철학을 산업계에 전달하는 주요 가교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그린IT협의체는 어떤 식으로는 정부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장치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석채 회장은 누구? 이 회장은 관료 출신이다. 그는 지난 1969년 공직에 입문한 이후 대통령 경제비서관과 농림수산부 차관, 재정경제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경제수석을 지내던 때는 외환위기 직전인 지난 1996년 8월 8일부터 1997년 3월 5일까지다. 적어도 경제수석 시절만 놓고 보면 그는 실패한 관료였던 셈이다. 그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박태견 <뷰스앤뉴스> 대표가 쓴 <관료 망국론과 재벌신화의 붕괴>에 따르면 한 재정경제원 간부는 이 회장을 두고 "만약 집권자의 서슬이 시퍼렇던 정권 초기에 그가 경제를 책임졌다면 과거 5공 초의 고 김재익 경제수석 못지않은 큰 족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 한 정부투자기관 간부는 "그는 3공 시절의 낡은 마인드를 갖고 한국의 21세기를 재단하려 했다. 그의 실패는 이미 운명지워진 것이었다"라고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다. 두 말의 공통점이 있다. 이 회장은 적어도 관료로서는 미래 한국상과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인물조차도 그는 개발독재 시대에 어울리는 '추진력'을 갖춘 인물로 본다. 이 회장이 경제수석을 맡을 당시 그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함께 한국 경제를 지휘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회장을 매우 신뢰해, 한창 때는 매일같이 그를 불러 독대하기도 했다. 외환위기 직전 대부분 경제정책이 그의 두뇌와 입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됐을 것으로 추정 가능한 대목이다. 이 회장은 경제수석 시절 경제살리기 일환으로 임금동결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관료 망국론…>에 따르면 이 회장은 "임금을 잡아야 위기에 처한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 철학은 KT에서도 그대로 실행됐다. 경제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지난해 11월, KT임직원은 일찌감치 임금동결을 선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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