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갑자기 비행기 소리에 꽝꽝 소리가 나니까 모두 다 도망가서 밭에 엎드렸다. 다시 군인이 쫓아와서 다들 잡아갔는데, 난 좀 더 멀리 뛰어서 도망가 꿩처럼 밭에 엎드려 있다가, 쫓아온 군인한테 여기서 밭매던 사람이라고 해서 안 잡혀갔다.
나중에 다시 와보니 나 빼고 거기 갇혔던 사람 전부 삐삐줄(무전기 줄)에 서로 손목이 묶인 채 구덩이에 한꺼번에 죽어있었다. 너무 부패해 알아볼 수도 없어서 가족들이 옷의 바느질 모양 같은 걸 보고 찾아내기도 하고, 그냥 버려지는 시체도 있고…."
김 모 씨(88)는 1949년 충북 청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다음해 전쟁이 일어난지 약 열흘 만인 7월 4일, 그는 경찰의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했고, 다른 연맹원과 함께 청원군 강내면사무소 옆 창고에 감금됐다. 약 6일 뒤, 폭격 와중에 그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김 씨가 탈출한 다음날인 7월 11일, 보도연맹원들은 후퇴하는 군인들에 의해 모두 총살됐다. 그는 당시 감금됐던 마을 주민 65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규모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뿌리 깊은 비극인 국민보도연맹 사건. 사건 발생 60여 년이 지났지만, 피해 규모는 아직도 미궁 속에 남아 있다.
2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서울 충무로 진실화해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06년부터 3년 간 진행한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006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보도연맹 사건을 조사·발표한 데 이어 진실화해위가 보다 본격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가 발표된 것.
진실화해위는 "최고위층의 결정과 명령에 따라 민간인이 희생됐고, 유가족들은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아왔다"는 결론을 발표한 뒤, 조사 과정에서 입수한 경찰 및 검찰 자료 등을 공개했다. 김 씨는 이날 생존자의 대표로 기자회견에 참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 1949년 당시 국민보도연맹 조직 결성 이후 서울 서대문구 보도연맹원의 사진과 성명 등 신상을 명시한 조직도. ⓒ진실화해위 |
"시·군별 적게는 100명, 많게는 1000명 단위로 살해"
보도연맹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남한 내 좌파를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관변단체였다. 그러나 경찰은 약속과 달리 이들을 요시찰인으로 분류했으며, 1950년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예비 검속 조치로 인해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에 연행되거나 구금됐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도연맹원 등을 소집, 연행, 학살한 기관은 경찰과 육군본부 정보국의 CIC(방첩대)였다.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헌병, 공군정보처, 해군정보참모실, 우익청년단체 등이 관여했다.
이 중 수사정보기관인 경찰 사찰계와 CIC가 실질적으로 모든 과정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검찰은 국민보도연맹 조직 결성과 전쟁직후 일부 지역에서 예비검속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는 "국민보도연맹 결성을 관장했던 검찰과 경찰 주요 간부들은 보도연맹원 규모가 약 30만 명에 달했다고 증언했다"며 "전체 희생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조사 결과 확인된 희생자는 4934명이었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은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도, 울산, 김해 등 몇 개 군의 경우 보도연맹원 중 약 30~70퍼센트(%)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 희생자들은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 |
"보도연맹원과 처형자 관리한 명단 남아있다면…"
이번 조사에서 진실화해위는 보도연맹 사건이 누구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결국 밝혀내지 못했다. 진실화해위는 "요시찰인 예비검속과 사살명령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 군경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해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불란하게 동원됐다는 점에서 정부 최고위층의 결정과 명령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이승만 정부 당시 CIC의 책임자는 현재 생존해 있지만 진술을 얻지 못했다"며 "CIC 명령을 당시 지위계통 선에서 누가 내렸는지 밝히지 못했지만 이런 정도의 사건이라면 최고위층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이 연좌제로 고통받았던 사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이승만 정부 이후 198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연좌제를 적용해 취업 등에 불이익을 줌으로써 이들은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고 보고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대해 공식사과와 아울러 재발방지를 위한 법·제도적 조치를 마련하고, 피해 보상을 위한 배·보상법을 제정해 화해와 국민통합을 위한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김동춘 위원은 "그동안 자료를 보면 경찰이 보도연맹원과 처형자 명단을 꾸준히 관리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자료는 현 정부 어디엔가 남아있을 수 있다고 본다"며 "그렇다면 정부 차원에서 이런 명단을 추후 공개해서 당시 희생자 전체 상황뿐만 아니라 규모를 밝힐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 조사를 신청하지 못한 유족, 추가적인 진실규명 요구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며 "추후에 가능하다면 좀 더 체계적인 조사를 해서 피해자 유족에게 사과하는 조치가 따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 4월께 사실상 활동을 멈춘다. 정부는 아직 진실화해위의 향방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않은 가운데, 보도연맹 사건 역시 미진한 결과만 남긴 채 더 이상 국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생생한 '연좌제'의 기록 이날 진실화해위는 조사 과정에서 발굴하고 수집한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여기에는 사건 당시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보도연맹원 활동 기록을 계속 관리하면서, 가족들까지 연좌제를 적용한 기록도 남아있다. 공개된 자료 중에는 1950년 당시 구속된 보도연맹원 명부, 행방불명된 보도연맹원 및 가족 조사 명부를 비롯해 1975년 한 지역에서 처형된 611명과 연고자를 '대공인적위해자', '용공혁신분자'로 분류해 작성한 명부가 포함됐다. 또 경찰이 각 기업체 직원 중에 신원특이자를 파악해 관리한 자료에도 '삼촌이 보도연맹원으로 처형'이라고 기록돼 있어, 경찰이 본래의 사찰명부를 바탕으로 자료를 작성하고, 가족 중 보도연맹에 관련된 자가 있을 경우 감시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용공혁신분자조사서'에 등재된 희생자들의 연고자는 집중 감시와 사찰을 받았다. 유족들은 해외출국이나 취직, 승진, 공무원 시험, 기타 일상 생활에서도 신원조회나 연좌제 때문에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보도연맹원의 유족이자 진실화해위 신청인 중 한 명인 이 모씨는 "한 대통령 시절에는 1년에 몇 번씩 경찰들이 집에 들이닥쳐 조사를 했다"며 "고초라도 겪을까봐 억울해도 찍소리도 못한 채 살았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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