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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아이의 사고…내 삶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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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아이의 사고…내 삶이 달라졌다

['보호자 없는 병원'을 기다리며②] 엄마가 '간병'을 가장 잘할까?

아이가 자라면서 한 번도 병원신세를 지지 않을 수야 없다. 다행히 그것이 수술이나 장기간 입원이 필요한 정도의 질환이나 사고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래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 둘째는 다섯살 때, 동네 골목길에서 치킨집 배달 오토바이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오토바이가 뒤에서 아이를 덮쳤고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갔을 때 아이는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넘도록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 당시의 놀람이나 마음 아픔이야 말을 해서 무엇하랴….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가슴 한 쪽이 무너진다.

아이가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 너무도 당연히 내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병원을 지켜야했다. 그때 나는 어린이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주변 누구에게도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때 보통은 기대게 되는 할머니들도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혼자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를 맡기기엔 남편도 못 미더웠다. 나만큼 아이를 잘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서 아이의 쇄골이 아물기를 기다리고 부러진 치아를 치료받고 수술을 두 번이나 하는 그 두 달 동안 나는 꼬박 아이의 침대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일도, 검사를 받으러 왔다 갔다 하는 일도, 아이의 상태를 놓치지 않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알리는 일도, 아이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도 모두 내 몫이었다.

엄마로서 보호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문적인 병원인력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엄마'이기에 그 모든 노동을 최대한 잘해내려고 집중하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어느 환자의 보호자가 됐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이기에 당연히 잘해낼 것이라 모두들(세상도, 병원도, 가족도) 요구했고 나 역시 '엄마'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그렇게 많은 치료비와 병원비를 내면서도 병원은 많은 필수적인 '노동'을 환자 보호자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런 요구가 불합리하다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당연하게 그 노동을 내 것으로 떠안는다.

▲병원에 그렇게 많은 치료비와 병원비를 내면서도 병원은 많은 필수적인 '노동'을 환자 보호자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런 요구가 불합리하다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당연하게 그 노동을 내 것으로 떠안는다.ⓒ뉴시스

만일 내가 잘못된 의학정보로, 아니면 단순한 착오로 약을 잘못 먹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가 움직일 때 제대로 돌보지 못해 더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내게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은 것은 엄마가 옆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이는 나에게 몇 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비록 내가 보호자이긴 하나 익숙하지 않은 병원의 시스템은 나를 몇 차례나 당혹스럽게 했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힘과 노하우가 필요한 것이어서 나는 서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는 기색이 보이면 아이는 "엄마, 의사선생님한테 다시 물어봐, 엄마, 이건 엄마가 할 줄 아는 거야?"라며 불안해했다. 몇 달동안의 시간들이 나 스스로에게 그리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낸 시간들과 그 과정에서 그래도 긍정적인 것을 확인하려는 내 노력과 의지의 문제일 뿐, 생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연히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던 어린이집 일은 중단된 상태였다. 나에게 그 두 달은 고립된 섬에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변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자주 찾아주었고 외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고 나는 다시 어린이집에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나는 또 어려워했다. 공백을 채우기가 힘겨웠다.

당연히 다시 몇 달을 나는 공백을 메우는 데만 마음을 써야했다. 다른 일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시기가 나에게 준 영향은 무척이나 컸다.

제일 큰 것은 큰 아이였다. 그 시기에 큰 아이가 어떻게 보냈는지, 나중에 돌이켜보니 생각나질 않았다. 7살이었던 아이가 혼자서 집에서 어떻게 보냈을까? 물론 아빠가 옆에 있었지만 큰 아이가 느꼈을 충격과 엄마가 곁에 없어 느꼈을 외로움, 그것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가끔 남편에게 둘째 아이를 맡기고 큰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가뭄에 콩나듯 한 이벤트였을 뿐이었다.

그 다음은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이었다. 아이와 두 달동안 한 시도 떨어지지 못하면서 지내면서 나는 그 이후로도 한 동안 아이를 떨어뜨려놓는 일이 못 견디게 불안했다. 그 감정적 불안함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내 삶을 객관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된다는 확신을 갖는데 거의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 몇 달동안의 시간은 그렇게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역사에도 가정은 없고, 삶 역시 마찬가지지만 새삼 생각해본다. 만일 그때 아이가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두 달 동안 꼼짝 없이 아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다른 고민을 하고 좀 더 빨리 나를 성장시키는 다른 삶을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보호자 없는 병원'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우리 아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 그런 제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당장 처음이야 내가 휴가를 내고 아이의 충격이 덜해질 동안 같이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전문 병원인력을 아이 곁에 두었을 것이다. 아이는 서툴러 땀을 삐질 삐질 흘리는 엄마를 보면서 느꼈던 불안감 대신 전문적인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 또 나는 내가 일하는 일터와 관계 속에서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와 다른 가족들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큰 아이가 잘 견뎌주었지만, 큰 아이에 대한 미안함도 덜했을지 모른다.

물론 나는 그나마 아주 운이 좋은 경우이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내가 일하던 곳에 나는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직장이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실제 많은 엄마와 아내들은 나만큼의 운도 없다. 그래서 아픈 사람을 돌보는 책임을 지게 되는 여성으로서는 집에 아픈 사람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힘든 것을 넘어 삶 자체를 바꿔버리게 된다.

'보호자 없는 병원'은 단지 의료서비스를 높이는 문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행복 추구권을 보장하는 문제다. 환자들에게는 '더 나은 간호'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전문적인 간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받는 문제다. 더더군다나 여성들에게는 이 경쟁 사회에서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관련 예산을 삭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들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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