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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파주, 박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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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파주, 박찬옥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술과 관련된 모든 사건사고는 과신에서 비롯된다. 흔히들, 예전엔 소주를 짝으로 갖다 놓고 마셨다며 빈말인 척 하지만 마음 속에는 실제로 여전히 그렇게 마실 수 있다고 자신하는데서 일들이 벌어진다. 사람은 일정 나이가 지나면 짝으로 갖다 놓고 마실 수가 없다. 한계가 오는 법이다. 몸이 흐트러지고 혀가 꼬이며 말 실수를 하게 되고 마음 속에 담아 둔 괴물을 꺼내게 된다. 술자리가 폭력적이 되는 건 그때문이다.

마이크 피기스의 영화 <리빙 라스베가스>를 보면서 가장 그럴 듯하다고 생각됐던 장면은 오프닝 씬이다. 카메라는 접사로 찍은 주인공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에서 점점 올라가 일종의 부감 샷이 되는데, 상황이 참 개판이다. 케이지는 주방에 쓰러져 여전히 혼수상태고 냉장고 문은 반쯤 삐죽 열린 상태다. 아마도 밤사이 엉망으로 취해서 들어와선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꽈당 넘어진 채 아침까지 내처 잠들었던 모양이다. 영화속 니콜라스 케이지 마냥 그렇게 꿈뻑 눈이 떠진 적이 왜 없었겠는가. 비비적비비적 간신히 몸을 일으켜선 한동안 아무 생각없이 멍한 상태로 있게 되는 건 어젯 밤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 아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벗어버리고 싶은 일상, 차라리 잃어버리고 싶은 자아, 도망치고 싶은 관계들. 술이 인생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일까. 허물어지고 있는 인생을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아 근데 그건 구차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박찬옥 감독의 <파주>를 보고나서 또 술을 마셨다. 원래는 그날부터 술을 끊고 운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영화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부터 엄청 소주가 당겼다.

오랜 기간 영화 언저리에 살면서 한번도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비평가가 아닌 척 비평을 해오면서 살았듯이 이제는 영화를 안만들겠다는 척, 영화를 만들 궁리만 하고 산다. 하지만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영화를 만들겠다, 안만들겠다 하는 식의 갈림길 논리가 아니다. 막상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나서부터는 '만들어야 할 영화'와 '만들고 싶은 영화', 그리고 '만들 수 있는 영화'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생겼으며 그것이 엄청난 혼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 파주

<파주>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를 경유한 한 지식인 감독의 시대적인 자기 고백이 담담하게, 그러나 낱낱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파주>를 보면서 가슴 한구석에 찬물결이 치고 올라오는 건 박찬옥이라는 감독의 고백 속에 들어있는 죄의식에 대한 공감대 때문이다. 여주인공인 서우는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형부 이서균에게 묻는다. 형부는 왜 이런 일을 해요? 이서균은 쓸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엔 멋있어서 그랬던 것 같고, 다음엔 갚아야 할 게 많아서 그랬던 것 같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파주>를 보면서 울었다. 감독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 절절한 외로움 때문에 울었고, 나는 여전히 이 사회에 대해서 갚지 못한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울었으며, 평생을 가봐야 이런 영화는 내 주제에 만들 것 같지 못할 것 같아 울었다. 그리고 진짜 운 이유는 아무리 개판이라 해도 <파주>가 만들어질 만큼 조금씩조금씩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그 지긋지긋한 희망 때문이었다. <파주>를 보고나서 마신 소주는 취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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