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운명이라 믿으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걸어갔던 안중근 의사. 그의 행보를 좇는 160여분의 시간동안 관객들은 숨 죽인채로 역사적인 추격전을 대면한다.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의 동력소리와 역동적인 안무는 긴장감을 극도로 가중시켜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장중한 하모니 속에서 마침내 울려 퍼지는 세 발의 총성소리는 관객들을 1909년 10월 26일, 그 역사적인 순간 속으로 데려다놓는다.
스펙터클한 무대연출과 군무의 완벽한 합일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은 역사적 사건을 고스란히 고증해낸다. 천장 끝까지 빼곡히 솟아있는 자작나무와 무대를 꽉 채우는 크기의 기차는 사실성을 넘어 좌중을 압도한다. 휘날리는 눈보라의 영상과 뒤로 지나가는 불빛의 깜박임은 달리는 기차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겹겹의 벽돌 모양의 세트 위로 그려지는 그래픽 영상은 공간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원근법의 효과까지 발현해낸다.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영화적 연출력은 실제 그 현장에 자리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총성에 맞춰 산산조각 나는 유리창의 영상은 생동감을 배가한다. 또한 빨간색과 파란색의 조명은 일본 경찰과 독립군의 대비를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태극기의 태극무늬를 떠올리게 한다.
철제구조물을 이용한 일본 경찰과 독립군들의 군무는 쫓고 쫓기는 긴박감을 그대로 표출해낸다. 구조물 사이를 오르내리며 숨 가쁜 추격전을 벌이는 이들은 완벽한 호흡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파워풀한 이들의 몸놀림은 독립된 하나의 작품을 보는듯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웅장한 앙상블의 거대한 하모니
진중한 가사를 바탕으로 어우러지는 앙상블의 하모니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군들의 의거에 대한 무게감을 증폭시킨다. 안중근을 비롯한 이토 히로부미와 가상 인물 설희, 역시 또 다른 가상 인물인 링링의 솔로가 각 인물들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치중됐다면, 앙상블은 극 전체의 구심점으로 작용해 웅장함을 뛰어넘은 비장함을 선보인다. '바람이여 도우소서 / 우리에게 힘을 주오 / 기약돼있는 그 날을 위해 / 자, 우리들의 외침! / 세상이 들으리라! / 민족의 울음 / 뜨거운 열정 /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객석을 가득 메운 그들의 외침은 관객들의 가슴을 뜨거운 감동으로 가득 메운다.
하지만 한 위인의 생애를 전달해야 한다는 제약 때문인지 전반적인 가사의 구성이 스토리 전달 이상을 뛰어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스토리의 무게감이 큰 탓인지 가사의 내용이 적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예기치 않게 극의 집중도를 떨어뜨린 점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사적 사건과 창작뮤지컬의 운명적 만남
해외 유명 라이선스 뮤지컬이 대형공연장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현상이 당연시된 요즘 순수 대형 창작뮤지컬 '영웅'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만큼이나 반갑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0주년 기념이라는 시의성에 맞춰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한 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20여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의 수정과정과 철저한 사전조사 속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영웅'은 역사 속 인물로만 각인돼있던 안중근이란 위인을 생생히 고증해낸다. 가상 인물의 등장은 스토리의 개연성과 완결성을 높인다. 한편 조국의 원수로 낙인찍힌 이토 히로부미를 재해석해 그에 대한 반일 감정에 치중하는 대신 인간적 면모에 중점을 맞춘다. 안중근과 이토가 각자의 조국을 위해 함께 노래하는 부분은 한일 양국 간의 친선과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안중근의 어머니나 가상 인물 링링은 관객들의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배역으로 만들어진 듯한 어색함을 엿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내기엔 그의 의거가 너무나 크고 무거운 탓일까? 인물의 내면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고 생각한 순간 엄습하는 역사의 무게감은 당시의 정황을 실감케 한다.
철저히 계산된 무대와 시나리오, 스펙터클한 영상과 완벽한 앙상블은 하얼빈 의거라는 역사적 사건을 완전하게 고증해낸다. 뮤지컬 '영웅'은 뇌리 속에 위인으로만 각인돼있던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현현(顯現)히 내보여 관객들에게 잊혀져버린 우리의 역사를 분명히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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