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배령을 피해 부천으로 스며든 중식(이서균)은 개척교회 목사인 친지 형(이대현)을 도와 중학생 공부방의 선생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은둔자 아닌 은둔자로 어쩡쩡한 삶을 살아가는 그의 일상은 무료하고 남루하다. 한때 그의 삶은 세상을 주도하는 척 했지만 이제는 그저 끌려가는 상황일 뿐이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잔뜩 술을 먹고 들어 온 중식에게 목사 형은 다독이며 이렇게 말한다. "난 귀농할 생각이다. 넌 근처 신학교를 가면 어떻겠니? 장차 니가 이 교회의 목회를 맡아 줬으면 좋겠다." 중식은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이렇게 답한다. "안될 것 같아요. 학교는 모르겠는데요, 목회에 자신이 없어요."
▲ 파주 |
그러나 어디 목회에만 자신이 없겠는가. 중식은 이미 삶과 세상에 투쟁한다는 것 자체에 자신감을 잃은지 오래다.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잃은지도 오래다. 그런 그에게 은수(심이영)라는 여인이 다가서고 중식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녀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중식은 은수에게 쉽게 몸과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는 유부녀이자 운동권 선배였던 옛 여자 자영(김보경)에 대한 죄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데, 파주로 흘러들어 오기 전 자영과 동거 아닌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게, 손쉽게, 순차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화자는, 엉뚱하게, 중식의 처제 은모(서우)다. 이야기는 은모가 3년의 외유 끝에 고향인 파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언니 은수는 7년 전 자신이 가출한 사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홀로 남은 은모와 중식은 기묘한 동거를 다시 시작한다. 은모는 형부에게 오래 전부터 연정을 품어 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언니의 죽음에 대해 형부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랫만에 돌아온 고향 파주의 집은 재개발의 위협 속에 풍비박산이 난 상태다. 형부 중식은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맡아 벼랑끝에 서있다. 늘 사회정의에 앞장서 있는 형부, 어릴 적부터 사랑해 왔던 남자, 그러나 자신의 언니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남자. 은모는 진실의 무게와 파고 앞에 끊임없이 흔들린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 내벽 앞에 서있는 중식에게 다가 선 은모 표정이 가슴을 친다. 아래 층에서는 철거민들이 바닥 용역깡패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며 투항중이며 순간순간 이들에게는 강력한 소방 호스가 뿌려진다. 주변은 아수라장이다. 연옥이다. 세상의 끝이다. 은모는 이렇게 묻는다. "형부는 왜 이런 일을 해요?" 중식은 이렇게 답한다. "처음엔 멋있는 것 같아서, 나중엔 세상에 갚을 게 많은 것 같아서.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한바탕 용역깡패들과의 싸움이 지나간 후 철거 직전의 방안에 남은 두 사람에게 격정이 몰려 든다. 형부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들며 그의 입술을 찾던 은모는 눈물을 흘리며 묻는다. "뭐가 진실인지 알고 싶어요." 중식은 자신을 뿌리치려는 은모를 더욱 부둥켜 안으며 이렇게 외친다. "모든 게 다 진실이야. 모든 게 다!"
▲ 파주 |
<파주>는 형부와 처제 간의 끈적한 불륜을 앞세우는 이야기인 척, 어쩌면 그동안 지금의 세상이 수없이 저질러 왔던 시대의 불륜을 얘기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불륜'에 대해 고발하는 양 굴어 왔지만 사실은 모르는 척 외면해 왔던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에 대해 얘기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막장 드라마인 척, 막장 드라마가 양산되는 시대의 울분을 차분하게 응시하게 한다.
<파주>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를 경유하며 치열한 자기고민에 빠져왔던 한 지식인 감독의 자기 고백의 성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 고백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해서 절절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영화를 보면서 자꾸 눈물이 나는 건 그때문이다. 박찬옥 감독은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 지난 7년의 기간동안 무지하게 고독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자신의 그 고립감을 토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박찬옥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영화의 자기 구원성, 곧 영화가 스스로 진화하면서 한편으로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바꿀 수 있다는 이론을 실천시켰다. 2009년 막바지, 세상은 박찬옥을 통해 가장 빛나는 영화 한 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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