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말했다. 자신이 신이라고 착각하는 하위 관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을 하위 관료라고 착각하는 신이라고.
자상한 아버지이며 충직한 남편이었던 공무원 아이히만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하위 관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신처럼 기계적으로 매일 수천 명의 죽음이 담긴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 범죄는 바로 그렇게 이루어졌다.
물론 판사는 신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건의 판결을 처리해야 하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하는 일은 그저 여느 공무원들의 서류 처리와 다를 바 없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법원에 들락거릴 일이 없고, 지금 겪고 있는 재판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검사는 온갖 정보를 틀어쥔 채 고압적인 태도로 피고인을 몰아붙인다.
이정희 의원의 말마따나 변호사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판사에게는 신과 같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판사는 일개 공무원처럼 권력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 용산 참사에 대한 1심 판결은 엄연한 정치 재판이었다. 이제 우리가 지상의 법에서 그 어떤 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 |
용산 참사에 대한 1심 판결은 엄연한 정치 재판이었다. 김형태 변호사의 말대로, 그것이 순수하게 하나의 형사 재판으로 다루어졌다면 99% 무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화염병 투척으로 인해 화재가 났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형사 재판은 철저히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검찰이 유죄를 못 밝혔다면 당연히 피고인들은 무죄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 헌법적 원리를 무시한 채, 자신들이 판관 포청천이라도 되는 양 '참회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며 도리어 피고인들을 다그쳤다.
왜 있지도 않은 죄를 뉘우치며 선처를 호소해야 하는가? 헌법에 적시되어 있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형사 재판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법 앞에 정의를 호소하는 행위가 너무도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용산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항소하여 결국 이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간다고 해보자.
신을 대신하여,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대변하여 판결을 내릴 13명 중 한 사람의 자리에 신영철이 앉아 있다. 이메일을 통해 일선의 판사들에게 노골적으로 외압을 넣고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사람 말이다. 대법관은 본인이 사퇴하지 않는 한 임기가 다할 때까지 신분을 보장받는다. 그를 끌어내리려면 국회에서 탄핵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다수당인 한나라당, 미디어 법을 '위법'하게 통과시켰지만 '효력이 인정'된다는 판결을 듣고 표정 관리에 들어간 한나라당이 의회의 3분의 2 가량을 점하고 있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삼권분립의 취지를 존중하여 법리적 판단을 마친 후 정치권으로 다시 공을 돌린 헌법재판소의 미디어 법 판결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미 현재의 국회는 이성적으로 토론하여 합리적으로 표결하는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위법한 표결 처리로 만들어진 법안은 무효라고 판시함으로써,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어쨌건 형식적인 합리성이나마 갖출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의 민주주의, 우리의 헌법을 지켜낼 수호자로서의 자각을 내던진 채, 그저 '일개 판사들'처럼 행동하고 만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지상의 법에서 그 어떤 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들이 아버지를 화염병으로 죽였다고 판결을 내리고, 옳지 않은 과정으로 만들어진 법도 무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쩌면 진정한 정의는 저 하늘 너머에만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오늘 11월 2일,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야 한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구현사제단의 위령 미사가 예정되어 있다. 물론 서울시는 '왕궁 수문장 캐릭터' 행사가 있다며 광장 사용을 불허하겠다는 입장이다. 지상의 불의가 천상의 정의로 씻길 수 있기를 기대하며, 신발 끈을 단단하게 고쳐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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