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인권 NAP, National Action Plan) 권고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신문들을 중심으로 인권위의 권고안이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등의 결정을 무시하면서 진보 측 입장만 반영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권고안이 심각한 '편향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인권위 측은 이런 비판에 대해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내부적으로 "인권위가 한 쪽 편을 들었다니 말도 안 된다"라며 발끈하는 분위기다. 권고안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과도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신문, 인권위 향해 비판기사 쏟아내**
인권위가 권고안을 발표한 다음날부터 〈조선〉, 〈동아〉, 〈중앙〉, 〈문화〉 등 일부 신문들은 권고안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기사를 쏟아냈다. "정부부처 의견조차 인권위, 거의 반영 안 해"(〈중앙〉 11일자), "'헌법 상처내기' 밥 먹듯 하는 국가인권위"(〈동아〉 11일자), "진보 입장만 대변, '진통' 예고"(〈문화〉 11일자) 등의 제목으로 인권위를 패다시피 했다.
특히 "세금만 축내는 '무국적 인권위'의 잠꼬대"라는 제목의 〈조선〉 사설은 인권위를 "무지하고, 무능하며, 무국적의 기관"이라고까지 몰아세웠다. 인권위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비난의 정수를 보여준 셈이다.
이들 신문이 제기하는 비판의 초점은 권고안이 기존의 관행(현실), 정부부처의 입장,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결정 등을 부정한 채 진보 성향을 가진 일부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그들은 "이번 권고안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식의 위협적 표현까지 구사하고 있다.
권고안 내용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 보장 △성전환 수술비에 국민건강보험 적용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금지 △집회와 시위의 자유 확대 △국가보안법의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정 등이다.
***"권고안 내용 정확히 알고나 비판하나?"**
인권위 측은 이같은 비판에 대해 공식 반응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3년여 동안 고생해온 몇몇 인권위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반박에 나서고 있다.
박병수 인권위 전문위원은 "권고안 발표 이후 언론 보도나 인권위에 걸려오는 항의전화 내용을 보면, 권고안의 내용이 잘못 전달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권고안에 대한 비판은 대개 '부풀려진 표적'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권고안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제기된 비판인 경우가 많다고 박 전문위원은 지적했다.
한 예로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 문제와 관련해 인권위 권고안은 "현행 법제도가 획일적으로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만큼 법 조항을 개정해 이들의 정치활동을 '일정 범위' 확대해야 한다"고 돼있다.
다시 말해 권고안은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는 내용은 담고 있지 않으며 정치활동 허용을 '일정 범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정도다. 이는 향후 법제도 개선을 담당할 관계부처에서 '허용 범위'를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설정한 것이다.
박병수 전문위원은 "유엔 자유권규약은 모든 시민에게 자유로운 정치참여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에 비춰 우리의 법과 제도는 획일적으로 공무원과 교사들에게 정치활동의 권리를 금지하고 있다"며 "따라서 인권위가 정부에 공무원과 교사들에게 일정 부분 정치활동의 자유를 일부 보장하라고 권고한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검토하라고 권고한 것을 그렇게 몰아치다니…"**
오해에 기초한 비판의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또 하나의 예는 '성전환 수술에 대한 국민건강보험의 단계적 적용 검토'에 대한 비판이다. 이에 대한 비판에는 '국민정서에 반한다'는 논리가 포함돼있다. 여기서 국민정서란 성전환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부정적 인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권고안은 "성전환 관련 수술에 대한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단계적으로 검토하라"고 돼있다. 다시 말해 성전환 관련 수술에 대해 건강보험을 전면적으로 적용하라거나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은 권고안에 들어있지 않다.
박 전문위원은 "성전환자와 같은 성적 소수자는 스스로 의제를 설정할 수 없을 정도로 소외된 계층인만큼 인권위가 나서서 의제설정을 할 필요를 느꼈다"며 "국민건강보험을 당장 적용하라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전제하고 하는 비판은 과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더구나 인권위는 건강보험 적용을 관계 정부부처가 '검토'할 것을 권고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인권위는 이번 권고에 대한 비판의 상당수가 권고안 내용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12일 기자들을 상대로 권고안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근본적 입장차를 어떻게 하겠나"**
하지만 권고안에 대한 비판이 단지 권고안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인권위의 권고안이 제시하고 있는 방향성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권위 측도 이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기관으로서 언론마다 가지는 관점에 대해 정면 비판하는 것은 정도에 맞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반박을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명재 인권위 홍보협력팀장은 "개별 언론들이 가지는 입장차에 대해서 인권위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며 " 다만 권고안의 취지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공감대를 넓히는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인권위 존재의 의미, 권고안 수립의 의미를 아는가?"**
하지만 이처럼 조심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일부 언론의 비판이 가지는 맹점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인권위 내부 목소리들도 있다.
정영선 인권연구팀장은 '권고안이 진보적 성향 단체의 편을 들었다'는 비판에 대해 "인권이란 개념이나 권고안이 담고있는 특징이 미래지향성"이라며 "잘못된 현실을 개선하자는 것이 권고안 본래의 취지인 만큼 권고안 내용이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 팀장은 이어 "권고안 작성의 취지를 도외시하고 내용이 진보 성향 단체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구의 편을 들었다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고 덧붙였다.
박병수 전문위원도 "인권위는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 처해 있는 인권침해 실상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다. 권고안도 마찬가지로 이들의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며 "따라서 권고안에 우리 사회 모든 집단의 의견들이 골고루 반영돼야 한다는 주장은 인권위의 존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미 인권위 정책홍보 담당 사무관은 "대법원 등 사법기관의 결정과 권고안이 상충된다는 이유로 법원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 역시 인권위의 기능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며 "인권위는 정부기관의 잘못된 관행이나 규정은 물론 인권적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법률에 대해서도 개정 등을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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