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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철학자의 서재]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Seeing is Believing

"Seeing is believing"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들어 보았음직하다. 그 원인의 하나가 1970~80년대를 전후하여 필독서였던 <성문기본영어>가 아닌가 한다. 이 책에 "To see is to believe"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해석과 함께 실려 있다. 그것도 맨 앞에 나온다. 많은 학생들에게 수학의 '집합과 명제'편과 더불어 영어의 '부정사'편은 늘 '작심삼일의 도돌이표'였다. 그러니 "웬만한 사람 다 들어봤다"는 말은 상당히 일리 있는 것 아닐까?

"Seeing is believing"은 우리가 속한 근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이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성문기본영어>의 공(功)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공은 근대과학에 있다. 근대과학은 '보는 것' 즉 경험을 중시한다. 근대과학의 방법이 바로 실험·관찰 등의 경험적 방법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험·관찰의 중시는 '세상 모든 현상의 원인이 세상 안에 있음'을 전제한다. 신화(Mythos)를 벗어나 로고스(Logos)로서의 철학을 성립시켰던 고대의 인간 정신은 근대에 이르러 신의 이름으로 지배되던 중세의 어둠을 뚫고 과학을 탄생시켰다. 신은 근대과학의 설명 원리로서는 완전히 배제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지하여 누리던 모든 권위와 권세는 땅에 떨어졌다. 인간은 자신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세상을 보고 그 이외에는 거짓이거나 알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자신을 억누르던 망령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철학의 경우도 (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에서 (참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를 연구하는) 인식론으로 중심이 바뀐다. 그런데 '보는 것(seeing)'과 관련하여 이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철학 사상의 하나가 실증주의(Positivism)다. 실증주의는 우리가 보는 이 세계 이외의 세계를 부정한다.

'실증주의'에서 진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태', 즉 '우리가 보는 것 모두'를 의미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실증주의는 보이는 이 세계에 대한 '긍정주의(Positivism)'이기도 하다. 실증주의는 지금은 철학으로서의 위세는 꺾였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서점을 가득 메운 처세서, 출세서들이 제목을 바꿔가며 계속 우려먹는 대표적 이데올로기가 바로 '세상을 긍정할 것' 아니던가?

본 것만, 봐서 확인한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인간 정신의 진보를 가져왔다. 아니 단지 정신의 진보뿐 아니라 세상의 물적 토대를 뿌리로부터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은 물론 자기 자신도 바꾸어 놓았다. "Seeing is believing"이란 사고는 인간사에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를 낳았다.

봐 봤자 허무한 세상

그런데 '보는 것'에 대한 강조가 이와 같이 순기능만 한 것은 아니다. 아니 과연 '보는 것'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는 의심해 볼 만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한 번 반대로 되짚어보자.

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보는 것'에 대한 강조와 믿음은 근대의 테두리 안에서만 그러하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 '보는 것' 혹은 '보이는 것'은 '참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무상(無常)하다. 언젠가는 스러져갈 것에 불과하다.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Idea)계와 현실계로 나누었다. 참된 세계는 이데아계이고 눈에 보이는 이 세계, 즉 현실계는 이데아계를 모방해 놓은 허깨비로 보았다. 한편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허망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 : 2)

이들에게 보이는 것, 보이는 세상은 모방물이며 '보는 것'은 이 '모방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Seeing is believing"일 수 없다. 어떻게 허깨비인 이 세상을 보고, 그것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근대와 근대인은 자기 시대의 슬로건(Seeing is believing)에 반대하는 플라톤과 솔로몬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즉 '보는 것'에 대한 부정, 이 세상만이 진리라는 생각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긍정주의와 부정주의

실증주의가 보는 것·보이는 것에 대한 '긍정주의'라고 한다면 플라톤과 솔로몬은 이에 대한 '부정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태도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입장이 바뀐다.

실증주의는 진리의 대상으로서 실증할 수 없는 것,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은 '부정'한다. 반대로 플라톤과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것, 이 세상의 것은 부정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 신의 나라에 대해서는 '긍정'한다. 그 이유는 변화무쌍한 세상 것에서는 플라톤과 솔로몬이 추구하는 영원한 진리의 원천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영원한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와 신의 나라에 각각 속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게 이데아의 세계와 신의 나라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우주상의 어떤 공간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근대는 이데아의 세계와 신의 나라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보는 것이 허망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받아 들였다. 보는 것은 믿을 만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근대인 스스로의 '경험'에도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면 영원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을 진리로 여기는 사고는 결국 진리의 부정으로, 상대주의로, 회의주의로 귀결함은 철학사가 말해준다. 철학사에서 "seeing is believing"을 기치로 내걸었던 경험주의, 실증주의가 바로 그러했다.

신의 나라는 내 마음 속에 있다?

이 세상뿐이라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영원한 진리는 없다. 반면 근대 이전까지 영원한 진리의 원천이라고 여겨져 왔던 이데아의 세계와 신의 나라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진리란 없는 것인가? 이데아의 세계와 신의 나라를 대신할 영원한 진리의 원천은 없는 것인가? 세상의 허망함을 허망하다고 할 수 있는 허망하지 않은 척도란 없는 것인가?

근대는 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데아의 세계와 신의 나라를 '생각하는 나' '이성을 지닌 개인'의 내면으로 집어넣음으로써 말이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데아의 세계는 '생각하는 나'의 내면으로 들어왔다. 이데아는 나의 내면에서 실재한다. 즉 이성의 이념이자 개념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분류하는 범주의 능력으로, 판단 능력으로서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자체는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능력에 따라 질서가 부여됨으로써 그것은 의미를 얻게 된다. 마치 시인 김춘수가 <꽃>에서 말하였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다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꽃이 되었"듯 말이다.

나아가 신의 나라 또한 우주 공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내면에 자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신의 나라' 역시 객관적 실재로서는 아니지만 도덕과 관련한 인간 이성의 요청으로서, 희망의 원리이자 이념으로서 인간 이성 안에 존립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이성은 적어도 그 가능성면에서는 전지전능해졌다. 인간은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다. 즉 객체가 아니다. 인간은 주체로 우뚝 섰다. 인간의 눈은 세상 어디에 위치하든 세상의 중심이다. 인간이 보는 것은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법칙과 질서를 부여하는 능동적인 입법행위이다.

우리는 백지 상태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는 보는 것을 순전히 믿는 수동적 존재일 수가 없다. '보는 것' 또한 수동적인 행위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사유 능력이든 가치관이든 이해관심이든 어떤 전제에서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보는 주체(Subject)가 이미 지니고 있는 것·전제하고 있는 것을 대상(Object)에 부여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영어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Believing"의 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해서 유홍준은 1993년 발간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아는 만큼 보인다(Believing is seeing)"고 하지 않았던가?

보는 것을 믿는다고? 그건 허구야

▲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프레시안
뉴욕시립대학 예술사 교수인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Believing is seeing"('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역자가 옮기면서 제목을 바꾼 것)이라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예술(art)에 나타난 근대적 편견과 신화를 뒤집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는 허구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사회적 조건의 눈에서 세상을 본다. 즉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 선입견, 선지식, 이해관계 등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는 것을 본다(Believing is seeing). 즉 아는 만큼 보인다(Believing is seeing)." 저자는 우리가 봄(seeing)을 통해 두 가지 'believing'을 볼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자기가 만든 대상을 어떤 것으로 보도록 하려는 만든 이의 believing(그의 의도, 편견, 이데올로기 등)과 그 대상을 어떤 것으로 보고 있는 나의 believing(나의 선입견, 선입견의 원인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봄'(seeing)에 관철되고 있는 이 두 가지 believing을 예술의 예를 통해 서술한다. 근대예술의 전모를 간략하게 툭툭 던지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친절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판으로 인해 여백이 많은 만큼이나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분명 말하려는 메시지가 강렬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분명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많은 이야기를 이토록 짧게, 답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기 의도를 이토록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 그리고 그 외의 사물들이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가"에 대해 연구한다. 저자는 의미와 가치들이 모두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어떤 사물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 존재할 수는 없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봐서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보도록 작업된 결과이다. 오늘날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미술'은 지난 200년 이래의 발명품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술 혹은 미술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많은 작품들은 사실은 미술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베르사이유 궁전>도, <기자의 피라미드>도 미술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생산한 뛰어난 건물들과 물품들로서 오늘날의 누군가에 의해, 오늘날의 특정한 제도와 가치관에 의해 우리 문화에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되었다. 즉 이것들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 잣대(believing)에 의해 미술로 차출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에 대해 예술·미술의 가치와 지위를 부여한 것은 오늘날의 시각이었다. 우리의 신념과 가치체계대로 보는 것, 즉 "Believing is seeing"의 결과이다.

근대 문화는 시각문화다. 따라서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 표현 수단이다. 이미지는 사람들의 희망과 꿈을, 절망과 분노를, 즉 삶을 반영한다. 반대로 이미지는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 어떤 이미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관습과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 어떤 이미지는 세상의 변화를 나타내준다. 어떤 이미지는 세상이 변화해야만 하는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강화시켜준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세상 뭐 있나

온갖 이미지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을 골라내는 일, 참·거짓을 가려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외부에서 전달되는 이미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자신 안에 내면화한 이미지, 즉 편견, 선입견,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세상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이제는 너무 흔한 일이 되었다.

보는 것, 봐서 확인하는 것의 중시, 즉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자각은 인간의 역사적 진보에서 더할 나위없는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시각에 기반을 둔 근대 문화·문명이 지닌 허점과 모순이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나는 참·거짓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꼽는다. TV와 영화 등은 가장 옳은 것, 가장 그른 것, 가장 기쁜 것, 가장 슬픈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추한 것을 독점한다. 나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를 보고는 슬퍼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내일이면 다시 예능프로에 나와서 우리를 웃겨줄 배우가 죽어가는 장면에서는 슬퍼한다. 연출된다는 것은 결국 거짓인데 거짓이 더욱 진짜 같으니 도대체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옳고 그름이 모호해지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이해득실만 남게 되는 것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1980년대 아스팔트를 달리던 청년이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던 포부는 추하게 늙지나 말았으면 하는 포부(?)로 바뀌었다. 변혁하겠다더니 내가 세상에 변혁당했다. 그렇지만 시인 최영미가 서른이면 잔치 끝난 거라고 알려주었을 때도 나는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아직도 곧이듣고 싶지 않다. 최영미와 나의 잔치만 끝난 것이라 믿고 싶다. Believing is se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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