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들은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황금이냐, 아니면 황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 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제물이냐 아니면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 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불행하여라, 너의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형을 어떻게 피하려느냐.(마태복음23)
예수가 성전에서 나갈 때, 한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웅장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코복음13)
마르크스는 어딘가에서 '오로지 억압당하고, 경멸당하며,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모든 현실 상황을 파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라 잃은 시절 신채호는 자신의 한 소설(<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억압 상황이 파기된 이 나라를 관념적인 서술 방식을 통해 단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그린 나라에는 예수와 공자와 석가가 민중의 손에 죽고 없으며, 정치와 법률학교와 교과서가 불태워졌고, 교회와 정부와 관청과 은행과 회사의 건물이 파괴되어 있다.
자본가와 대지주, 황제와 대원수, 경찰과 종교인이 모두 하나로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세계를 지옥으로 그리면서, 신채호는 지배계급과 제국주의가 한 몸이며, 국가란 그 자체로 민중의 적이라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현실적인 것으로 수긍하였다. 그리하여 한 사회 내의 정치/법률/예술/도덕/종교 등 이른바 '상부구조'는 사회적 생산관계와 지배체제를 은폐하고 유지하는 데에 이용되는 '허위의식(mauvaise fois)'의 기제라는 마르크스의 직관은 신채호의 소설에서 관념적이나마 소설적 형상을 얻는다.
도무지 자기성찰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사불란하고 맹목적이며 야비하고 무자비한 19개월의 정권의 시간이 흘러갔다. 사라졌던 전국 일제고사가 부활하여 초등생들까지 획일적인 입시전쟁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도래했다. 일관된 대북 압박 정책으로 10년 동안의 남북화해 무드는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전직 대통령이 강도 높은 수사 압박 속에서 자살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있었고,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정부의 압박에 반발하여 국가인권위원장이 중도 사퇴하는 일이 있었으며, 거대신문의 방송소유를 허용하는 미디어법이 대리투표 의혹 속에서 여당의 날치기 투표로 강행되는 일이 있었다.
광우병에 대한 공포와 전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전면적으로 허용되었다. 시민의 촛불 봉기에 놀란 정부는 시민의 광장을 봉쇄하고 거기에 잔디를 깔고 꽃을 심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있다. 복지예산은 축소되는 반면 경제적 근거도 없고 국민의 동의절차도 없는 천문학적 대운하 사업이 어느새 4대강 사업으로 둔갑하여 공중파 방송에서 국정홍보 영상으로 흘러나온다. 이전 정권에서는 검찰 독립을 운운하던 공안권력은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약자의 권리를 짓밟으며 권력자의 의중에만 온 귀를 기울이는 정권의 몸종으로 회귀하였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예의가 사라진 이 시간을 거대한 재앙의 시간이라고 밖에 달리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 그 재앙 같은 시간 속에 용역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깡패조직과 재개발조합이라는 이름의 허울 좋은 투기세력과 오로지 자본의 무한증식만을 욕망하는 건설재벌, 거대한 이권세력의 수호에만 기민한 법의 하수인들의 '협업'으로나 가능할 수 있었던 용산참사가 250일을 지나고 있다. ⓒ뉴시스 |
자신의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거론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연설하던 장로 대통령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해진 공적 살인(의 존재 자체)을 부인하며, 그를 따르는 법의 맹목적 하수인들은 더 난폭해지고 교활해지고 그리하여 더 무능해진다. 귀신의 곡소리조차 얼어붙은 250일이 지나서야 며칠 전 겨우 참사의 현장을 찾아 나선 새로운 교수 총리는 벌써부터 "공직자로서 책임을 느낀다"면서도 "정부가 직접 해결에 나서긴 어렵다"는 알쏭당쏭한 '정치적 수사'를 흘리고 다닌다.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것이다. 나직한 음성으로 겸허함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제 막 정부 요인이 된 이의 이 발언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교묘하게 회피되고 있는 것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에 진정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책임의 윤리다. 왜 벌써부터 그는 이런 정치적 어법을 사용하는가?
이 사태와 관련하여 애도의 눈물은 일관되게 조롱당했고, 천칭을 든 법의 여신을 향한 정의에의 호소는 번번이 외면 받았으며, 진실에 대한 희망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였다. 그리하여 까맣게 탄 주검은 몇 겹의 성에가 끼어 돌덩이보다 더 단단한 얼음덩이가 되었다. 죽은자의 넋은 그렇게 모욕 받았다. 산 자의 처지는 어떠한가. 망루에서 '공권력'에 맞서 아비를 지키던 아들은 법의 이름으로 아비를 죽인 죄인으로 둔갑하여 법정에 고발당하였고, 테러 진압용 경찰특공대의 작전에 의해 그들은 공식적으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수치를 느끼지 못하고 미안함을 모르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연민의 능력을 갖지 못하는 삶이야말로 사람이기를 포기한 삶이다. 하느님의 성전에 한 도시를 통째로 바치겠다던 권력자와 법의 하수인들, 황금의 추종자들은 과연 하느님이 당신을 닮게 만들었다는 사람의 모습을 얼마나 닮아 있는가. 물론 오랫동안 도시와 살고 도시를 키워온 도시의 원주민들을 광인이나 살인자나 부랑자로 내모는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욕망의 카르텔에는, 인간과 시간과 공간을 돈으로 환산하고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 시대 전체의 재앙 같은 무의식도 얼마간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하느님이 사라져야 할 세상'야말로 이런 세상이다. 그가 보기에 이런 비정하고 비도덕적인 세계를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말하는 창조주 하느님은 '참 나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예수가 메시아인 이유는 이런 '나쁜 하느님'을 지양한 가난한 존재인 까닭이다. 헤겔의 해석처럼 예수는 무한한 존재에서 유한한 존재로, 천상의 존재에서 지상의 헐벗은 존재로, 신적인 것의 자기분열을 스스로 현시하는 '불행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얼마 전 G20 정상회의를 유치한 후에 가진 기자회견(2009.9.27)에서 대통령은 국운의 상승을 논했고 국가의 품격이 높아졌다고 자부했다. 다시 한 번 장로 대통령에게 묻는다. 당신이 보시기에 이 상황은 정말로 '나쁜 하느님'이 보시던 세상처럼 참 좋은가?
예수가 교회당을 나오며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코복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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