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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가 꿈꿨던 것은? 연인들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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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가 꿈꿨던 것은? 연인들의 공동체!"

[철학자의 서재]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불현듯 예감된 그 공동체

우리가 예감(豫感·Ahnung)하고 있는, 아니 예감하고자 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미래는 단지 우리의 과거에, 지정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웠다고 상기(想起·Erinnerung)하고 있는 그 어떤 과거에 아직 머물러 있다. 미래가 아직 과거에 있고, 따라서 예감하고 있는 그것을 여전히 상기를 통해서만 확인해야 하는, 그래서 예감이 상기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되는 역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아니면 원했던가? 확실한 것은 아직 그 공동체가 우리 앞에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불현듯 스쳐지나간 과거의 어떤 시점에 우리는 그 공동체를 예감할 수 있었다.

"마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바람직할 것이라 여겨진 형식들을 뒤집어엎는 축제와 같은 갑작스런 만남 속에서, 2008년 6월은 아무 계획 없이, 아무 것도 도모하지 않고 급진적 소통에 대한 긍정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급진적 소통, 다시 말해 계급, 나이, 성, 문화의 차이에 대한 구별 없이 처음 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했던 열림. 그 때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마치 이미 사랑받았던 자와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가까운 자였기 때문이다."

▲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모리스 블랑쇼 외 지음,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프레시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2008년에 있었던 대규모 촛불 집회에서 위에서 언급한 바와 유사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글은 사실 당시 있었던 촛불 집회에 대한 소회를 읊은 것이 아니다. 2005년 국내 번역되어 출간된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책에서 발췌하여 연도만 바꾼 것이다.

장-뤽 낭시의 글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대한 답글로 쓰인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는 '부정의 공동체'와 '연인들의 공동체'라는 두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위 글은 그 중에서 '연인들의 공동체'에 있는 한 구절이다. 이 글은 일명 '68 혁명' 또는 '5월 혁명'으로 불리는 1968년 5월 유럽-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에필로그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2008년 촛불 집회를 상기하였고, 너무나 흡사한 감성에 적잖이 놀랬다. 그와 동시에 바로 그러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 공간의 도래를 예감하였다.

그런데, 과연 내가 아니 우리가 예감한 또는 예감하고 싶었던 그 공간, 그 공동체는 과연 어떤 공간, 어떤 공동체였을까? 분명한 것은 아직 그 공동체는 도래하지 않았고, 다만 상기를 통해서 각자에게 서로 다르게 재현될 뿐이다. 그리고 상기의 연쇄반응은 우리를 1987년 6월로 인도한다.

87년에서 상기되는 공동체

1987년 6월은 뜨거웠다. 전사들의 피가 들끓었고 사방은 열정과 승리를 예감하는 환희가 있었다. 물론 적들도 결사적으로 항쟁하였지만, 역시 승리는 정의의 편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가 쟁취되지 않았고, 또 다시 우리가 원하는 그 공동체는 지연되어 아직까지도 도래하지 않았다.

상기해 보자. 87년 6월에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고, 예감하였던가? 어쩌면 각자의 편차가 너무 커서 몇 마디 말이나 개념으로 정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어떨까? 그 때 우리가 원했고 예감했던 공동체는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공동체였다고. 이렇게 하면 너무 안전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그렇다면 2008년 6월에 우리가 원했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 역시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공동체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87년에 원했던 상식과 정의가 2008년에 원했던 상식과 정의와 동일할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확실한 답변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확실히 87년에는 상식과 정의를 원했고, 그것은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통해 달성과 동시에 기만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기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서로 상이한 사고와 기대가 있었던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기만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마저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87년은 기만을 만족으로 기만해 버렸다. 그리고 고유했던 이상과 이념들은 '대선투쟁'이라는 미명 하에 아주 순식간에 기만적 절차에 휩쓸려 버렸다.

사실 여부나 흔히 말하는 객관적인 평가는 접어두자. 단지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상기하고 있고 어떤 것을 예감하고 있는지 그것에만 집중해 보자. 확실히 87년에 원했던 공동체는 피를 부르는 민주에게 피를 바치고, 그 대가로 정의가 실현되는 공동체였다고 상기된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수많은 대중들의 그 엄청났던 모임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잔인하고 숨 가쁜 현장이었다. 이미 수없이 계획되었고, 전위와 대중들이 구분되어 일정한 위계와 질서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들이 서로 얼싸안은 것이 아니라 이념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전우애가 서로 근친성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과연 이런 현장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예감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이 한갓 절차적 민주주의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2008년의 모임에서 나는 다른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도모하지 않은 채, 그저 하나의 축제처럼 그냥 그렇게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던 어떤 집단적 관계맺음이 적어도 2008년에는 있었다. 그리고 그 집단적 관계맺음 속에서 나는 아무런 위계나 미리 외쳐진 어떤 질서 그리고 방향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혹자는 그것을 원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는 그런 방향, 질서, 위계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공동체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연인들에게는 아무런 위계가 없다. 그들이 왜 가까워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어느 순간, 아무 계획 없이 그들은 서로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자체에 환호하고 그런 자신들에게 열광하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2008년은 우리에게도 어느 순간 이런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겠다 하는 예감을 던져 주었다.

좀 더 다른 얘기를 그러나 사실은 같은 얘기를 해보자.

"공산주의는 나의 삶에서 중대한 문제이고 원초적인 경험이다. 나는 공산주의가 표현하는 열망들 가운데 끊임없이 내 자신을 발견하였고, 나는 항상 다른 사회와 다른 인간성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

에드가 모랭이라는 사람이 어느 잡지에 썼다는 글이다. 어쩌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군가의 자화상일지도 모르는 이런 신념에 대해 블량쇼는 이렇게 응답한다.

"만일 공산주의가 평등을 그 기반하고 있기에 모든 인간들의 욕구들이 평등하게 만족되어야만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산주의는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 '내재적인' 인간성의 원리를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 거기에 겉으로 보아 가장 온전할 뿐이 병적인 전체주의의 기원이 있다."

블랑쇼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공산주의가 진정한 공산주의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내재적인 원리'를 가정하고 있는 모든 이즘(ism)의 배경에는 전체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블랑쇼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항상 미래의 공동체를 예감하면서 그 어떤 이즘을 가지고 겉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는 지도자/전위 행세를 해오지는 않았을까? 대중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속으로는 그들의 유치함에 비웃고 가르치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태도 속에는 항상 배제와 억압을 동반하는 어두운 전체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전체는 나만의 전체이거나 아니면 우리만의 전체였을 뿐, 너의 전체이거나 너희들 혹은 그들의 전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인들의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그 공동체는 기존의 공동체를 부정한다. 그래서 부정의 공동체이다. 즉 공동체를 부정하는 공동체이다. 기존의 공동체를 부정하기에 적어도 연인들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제약이 없었다는 점에서 '즉각적' 소통은 소통 그 자체와의 소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설사 투쟁들, 토론들, 논쟁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계산적 지성보다 오히려 순수한 열정이 표현되었다. 바로 그렇기에 권위는 무너지거나 차라리 무시되었고,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되살려 제창할 수 없는 공산주의가 한번도 경험되지 않은 방식으로 선언되었다."

이렇게 68과 2008 그리고 연인들의 공동체는 닮아 있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87과는 다르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도한 비약일까?

젊었을 때 우리는 진리와 정의가 살아 숨쉬는 공동체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예감하면서 투쟁적 삶을 지속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이제는 진리와 정의가 나를 속박하는 고집스러운 이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촛불을 들고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리와 정의보다는 아름다움을 먼저 본다. 물론 저들에게는 그것이 추하게 보이겠지만.

저들이 추하게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저들이 생각하는 진리와 정의에 합당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와 정의를 외치기 때문일까? 그 안에 과연 우리 모두가 동의했고 동의해야만 했던 그 어떤 진리와 정의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그렇게 모인 그 사태 자체가 아름답고 또 아름답기 때문에 그 모임에서 발설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진리가 되어야 하고 정의가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런지….

벌써 40년이나 지나버린 지구 저편의 어떤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공동체에 대한 담론들이 모리스 블량쇼를 통해 21세기의 한국에서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나아가 우리가 상기하고 있는 공동체와 예감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부적절한 그래서 정당화될 수 없었던 그 사랑, 그 관계가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리고 또한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고 진정성을 갖고 있기에 적절하고 공감되어야 하듯이, 우리의 만남도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도 먼저 아무런 전제나 이해관계 없이 아름다워지길 예감해 본다.

그리고 이런 예감은 "왜 공동체는 어떤 원리, 기준, 이념 즉 어떤 동일성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생각될 수 없는가? 이 동일성들의 바탕에 이미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정의, 즉 인간의 그 자신과의 관계, 자아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가 놓여 있지 않은가? 왜 이런한 인간 본질에 대한 정의로부터만, 그에 따르는 동일성으로부터만 타자와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가?"라는 역자의 반문에 공감을 표하게 만든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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