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금융권에서는 대출이 어려운 신용등급이 낮은 빈민층에게 담보 없이 500만~1억 원을 대출해주겠다고 한다. 금리도 시중 은행보다 낮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창업 자금을 지원해 '자활'을 돕는 것이 이 정책의 목표다.
정부는 예산 한푼 들이지 않고 휴면예금을 포함해 순수 민간 기부를 중심으로 2조 원을 종자돈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국내 최대 규모로 벌어지는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이다. 방글라데시에서 1970년대에 처음으로 소액신용대출을 시도한 '그라민(방글라데시어로 시골 또는 마을이라는 의미) 은행'의 창시자 무하마드 유누스가 지난 2006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 3년 만이다.
아름다울 미(美)자에 적을 소(少)자를 썼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민들을 '미소'짓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을 붙인 이 사업이 정말 서민을 웃게 만들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정부 주도 '마이크로 크레딧'
금융위원회는 지난 17일 미소금융 사업을 내놓으며 "높은 이자부담과 불법 추심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위해 서민금융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저소득층과 저신용층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려는 것"이라고 사업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신용등급이 낮아 제도권에서 대출이 안 되는 사람들은 '전화만 하면 바로 입금'해주는 이른바 '사채' 시장으로 내몰려 끝없는 벼락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대부업 실태조사 결과, 지난 상반기 등록대부업체의 대출 규모는 무려 5조2000억 원이었다.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10년 동안 2조보다, 6개월 동안 대출액이 3배 가까이 되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7일 미소금융 사업을 내놓으며 "높은 이자부담과 불법 추심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위해 서민금융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저소득층과 저신용층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려는 것"이라고 사업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뉴시스 |
정부는 그동안 사채 시장으로 내몰리는 이들을 지원하고 재기를 돕기 위해 재정을 부어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한 개인워크아웃 지원이나 신용회복기금을 설립해 채무를 재조정해주거나 대부업체의 고금리는 은행권 금리 수준으로 낮춰주는 전환대출을 시행해 왔다.
그러나 이런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금융위원회는 "보다 근본적으로 저신용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의 자활을 지원하기 위해 마이크로 크레딧 자금의 공급을 확대하고 제도화하는 대책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민간단체는 30여 개가 있다. 휴면 예금이나 지자체, 복지부 등의 재원을 활용해 지난 2000년 '신나는 조합'을 시작으로 이들 단체가 지난 10년 가까이 빈민층에게 지원한 돈은 모두 772억 원이다. 조성된 재원이 1480억 원이니 10년 간 2조 원이라는 정부 계획은 이보다 무려 13배가 넘는다.
혜택을 입는 대상자도 확연히 늘어날 것으로 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신용회복기금을 통한 채무재조정이 지난해 9월 설립 이후 5만 건, 전환대출의 혜택을 받은 숫자가 1만5000건인데 반해 정부가 예상하는 미소금융의 혜택 대상자는 10년 간 20만~25만 가구다.
이를 위해 정부는 소액서민금융재단을 가칭 '미소금융중앙재단'으로 확대 개편하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에 200~300여 개의 법인을 설치하기로 했다. 재계나 금융권도 재단 설립이 가능하다. 재원은 올해 중으로 재계의 기부금 1000억 원과 휴면예금을 포함한 금융권 기부금 2000억 원 등 총 3000억 원을 만들 계획이다.
저신용자의 '자활' 지원이 목표…개인파산자·기초생활수급대상자 등은 제외
이번 사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혜 대상은 신용등급이 7~10등급인 저신용자다. 그러나 저신용자라 하더라도 금융채무불이행자와 개인파산자, 기초생활수급대상자는 대출이 불가능하다.
또 창업 등 '자활' 지원이 목표이기 때문에 생활비 대출은 안 된다. 금융위원회가 밝힌 세부지원내용은 △영세사업자 운영자금 △전통시장 영세상인 대출 △프랜차이즈 창업희망자 △임차보증금 등 창업자금 △자활단체의 운영자금 △사회적 기업 운영자금의 모두 6가지 항목이다. 이에 해당할 경우 최대 500만~1억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금리는 시장금리보다 2~3% 낮은 수준으로 현재로 따지면 연 5% 이하다.
▲금융위원회가 밝힌 세부지원내용은 △영세사업자 운영자금 △전통시장 영세상인 대출 △프랜차이즈 창업희망자 △임차보증금 등 창업자금 △자활단체의 운영자금 △사회적 기업 운영자금의 모두 6가지 항목이다.ⓒ뉴시스 |
기존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민간단체인 사회연대은행은 평균 지원 금액이 2000만 원이다. 하지만 최소 150만~최대 1억5000만 원까지 대상자의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융자 조건도 무이자에서부터 연 6%까지 다양하다.
미소금융과 사회연대은행의 차이점은 지원 대상의 폭이다. 정부는 저신용자 가운데서도 개인파산자 등을 제외하고 있지만, 사회연대은행은 지원 계층이 미소금융 사업 계획보다 더 세분화돼 있다. 영세 자영업자, 시장 상인 등으로 사업의 특성 위주로 나눠진 정부 계획과 달리 사회연대은행 등 민간 단체의 계층 구분은 여성 가장, 성매매 여성, 청년 가장 등 수혜자가 처한 처지에 맞춰져있다.
미소금융, 기존 마이크로 크레딧 단체 '돈줄' 마르게 할 수도
우리나라의 기존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은 지자체 등의 지원을 받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간 중심이었다. 반면 미소금융 사업의 운영은 현재의 소액서민금융재단이 이름을 바꿔 진행하지만,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데는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일종의 '혼합형'이다.
박종현 진주산업대 교수는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은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미소금융처럼 정부가 주도권을 쥔 경우는 전세계적으로도 대단히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장단점은 둘다 있다.
우선, 국내에서 마이크로 크레딧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시키고 다시 한 번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박 교수는 "지난 10여 년 동안 민간을 중심으로 어렵고 느리게 진행됐던 마이크로 크레딧 시도를 대단히 빠른 속도로 우리 사회 전역에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정부 주도의 장점을 설명했다. "과거 우리가 압축 성장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경험을 이 영역에서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기존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 단체들의 첫 번째 반응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재원을 더 짧은 시간에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정부의 힘이라는 것이다.
▲ 정부 주도의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의 장점은 사회적 관심의 환기다. 사진은 지난 2007년 9월 서울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마이크로 크레딧 인프라 구축 캠페인 선포식'.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 사업의 창시자로 불리는 무하마드 유누스 교수다. ⓒ뉴시스 |
그러나 같은 이유로 부정적 우려도 있다. 기존 단체들의 사업 재원의 상당부분이 기업 등의 기부금으로 채워져 있는 현실에서 이 자금이 모두 미소금융재단으로 쏠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정부는 미소금융재단에 재원을 내놓는 기업에 대해 법인세를 50%까지 감면해주기로 했다. 기존 지정기부단체에 기부할 경우에 비해 무려 10배나 큰 혜택이다.
안중상 사회연대은행 사업개발본부 팀장은 "법인세 50% 감면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미소금융재단 두 단체 뿐"이라며 "특히 미소금융이 국책사업처럼 추진되는 분위기에서 직·간접적으로 기부에 의존해 온 기관들은 재원 조성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2003년부터 2007년 7월 말까지 사회연대은행의 기금 총액은 93억7800만 원으로 이 가운데 정부 기금은 47.2%였고 나머지 52.8%가 민간 기금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전체 기금의 41.2%는 사회연대은행이 직접 모금하는 것인데, 미소금융 사업이 시작되면 당장 이 부분에 타격이 있을 수 있다.
마이크로 크레딧, 돈보다 철저한 사후관리와 전문성이 중요
또 다른 이유에서 이번 사업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이 단지 '자금 대출'의 의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종현 교수는 "이 사업의 핵심은 자금 이외에도 대출 고객과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혀 다양한 인적, 사회적 자본을 제공해주는 것인데 현재 정부 계획이 이런 특성을 충족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돈을 빌려준 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각종 교육 및 컨설팅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의 핵심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정부 계획에도 교육에 대한 대책은 있다. 1단계로 2010년 5월까지 전국 20~30여 곳, 2단계로 최대 200~300개가 설치될 지역 거점을 통해 정부는 자활 컨설팅을 지원할 계획이다. 소상공인진흥원 소속 전문가의 지원을 받아 사업계획 및 입지선정, 고객 서비스, 마케팅, 재무 및 회계 등 창업 및 경영컨설팅을 지원하는 것이다. 또 소액금융상담이나 신용관리상담 등 상담 업무 및 채무 재조정이 필요한 경우 신용회복위원회로 연결시켜주는 서비스도 제공할 예정이다.
따져볼 것은 전문성과 지속가능성이다. 박종현 교수는 "20만 명이 혜택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0만 명이 시장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관건"이라며 "기존 마이크로 크레딧 단체의 성공은 대출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진 엄격한 사후 관리와 전문성을 갖춘 RM(relationship manager)의 헌신적인 경영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사회연대은행은 모든 지원 대상자가 △기업가 마인드 △재무 △마케팅 등으로 이뤄진 외부교육 전문가의 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만 대출 자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사전 교육 외에도 사회연대은행은 사후 관리를 위해 전담인력을 따로 두고 있다. 개인과 개인으로 밀착된 이들은 창업경영을 지도하는 것 외에도 심리적 지지를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 필요할 경우 적절한 외부 기술자와의 연계도 제공한다.
자원봉사자만으로 책임성과 전문성 담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부 계획안에서는 이런 '돈 이외'의 분야에 대한 세밀한 고민을 찾기 어렵다. 실제 자금 신청자에 대한 심사와 집행, 사후관리를 담당하게 될 지역 지점의 인적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지역 거점에는 사회공헌도가 높고 사회봉사의지가 있는 대표자 1명을 두고 금융회사 퇴직자·청년 인턴 등 자원봉사자 2~5명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 정부 계획이다.
금융위원회는 "자원봉사의 취지를 감안해 대표자는 무보수·명예직으로 하고 금융회사 퇴직자 등 기간요원은 월 100만 원 이하, 청년 자원봉사자는 최소한의 실비만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했다.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는 기구를 자원봉사자만으로 운영해 그 책임성과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정명희 한국노총 금융산업노동조합 정책부장은 "운영자들이 무보수나 저임금으로 일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 미소금융재단이 각종 비리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부장은 과거 한 은행에서 비슷한 사업을 했던 사례를 들어 "투명성이 담보되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경우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보다는 집행기관 관련자의 지인이 나눠먹기 식으로 운영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우려했다.
안준상 사회연대은행 팀장도 "100만 원 미만의 급여를 받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조직이 수천 만원 씩 집행을 하게 될 경우 도덕적 해이 등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임금의 직원으로 구성되니 당연히 전문성과 헌신성 문제도 존재한다. 이 부분은 대출 자금의 원활환 회수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회연대은행 안준상 팀장은 "10년의 경험을 가진 전문 인력을 가진 우리도 1 대 1 컨설팅, 교육 등 한 사람에게 4~5년 동안 밀착해 달라붙어도 상환율을 높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회연대은행의 대출 상환율은 80%대 수준이다.
상환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10년간 쏟아 부을 2조 원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 정명희 금융노조 정책부장은 "관리자들이 발로 뛰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서류만 검토하면 부실나기 십상"이라며 "자주 만나고 속 사정까지 파악하는 '관계 금융'이 되지 않으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종현 교수도 "미소금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계산해, 사회연대은행의 직원과 유사한 역량과 헌신성을 가진 1만 여 명의 직원들이 20만 명의 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야 한다"고 말했다.
2조가 고스란히 "눈먼 돈"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2조 원이라는 막대한 돈이 '눈먼 돈'이 되지 않으려면 이런 부분에 대한 보완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인적 조직과 함께 주요한 보완 지점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중앙재단과 지역 지점의 지배구조에 대한 명확한 정리다. 정명희 부장은 "중앙과 지점이 어떤 연계 시스템을 가지고 굴러가고 지점의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손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얼마나 지는지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지난 10년 간 민간이 쌓아 온 경험과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안준상 팀장은 "민간의 경험 및 보건복지가족부의 '희망키움뱅크' 등 기존 사업을 다 배제하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말고, 10년의 경험과 같이 가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전경련 등을 통해 정부가 재원을 강제하고 운영 계획을 직접 수립하는 방식보다는 민간의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이며 또한 나눔과 봉사문화를 확산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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