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허준영 경찰청장은 지난달 농민집회에서 참가한 뒤 숨진 두 농민 사망사건에 대해 27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들의 사과는 시민사회로부터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이번 사태를 몰고온 총책임자인 허준영 경찰청장이 사퇴불가 입장을 밝힘으로써 이런 의심은 더욱 증폭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실의 이호중 보좌관이 노 대통령과 허 청장의 대국민 사과를 보고 느낀 소감을 써서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노 대통령과 허 청장이 농민들의 폭력시위를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의 사망 원인으로 언급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정부의 농업정책 실패와 경찰의 의도적인 강경진압에서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편집자〉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 사과**
지난달 24일에 전용철 농민이 사망한지 꼭 33일만인 27일 노무현 대통령이 고인의 죽음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했다. 노 대통령은 책임자에 대한 문책과 국가의 배상 방침도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이 발표한 사과문과 기자회견 일문일답 내용을 보면서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시위가 없었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고, 허준영 경찰청장의 거취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대통령에게 문책인사 권한이 없으므로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도 당사자인 허준영 경찰청장은 물러날 의사가 없음을 너무도 당당히 밝혔다.
농민대회 과정에서 2명의 농민이 사망한 것이 폭력시위 때문이라고 보는 대통령과 경찰청장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식 때문에 유족과 농민들은 고인이 죽은지 33일만에야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사과를 들게 된 것이었다.
***폭력시위가 문제라니…**
과연 농민 사망의 원인이 폭력시위에 있는가? 지난달 15일 농민대회가 열렸을 때 이미 전남 담양의 촉망받던 젊은 농사꾼 정용품 씨가 목숨을 끊은 뒤였고, 경북 성주의 오추옥 여성농민이 자결을 위해 음독해 죽음을 앞둔 상태였다. 우리 농업의 근간인 쌀 가격이 20% 이상 폭락하고 국회에서는 정치인들이 쌀개방 협상 비준안을 곧 처리하겠다며 농민들을 협박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어진 죽음이었다. 그러니 농민대회에 참가한 농민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1994년에 UR(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됨으로써 한국 농업은 본격적인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쌀을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농산물 시장이 개방됨에 따라 농산물의 가격폭락이 이어졌고, 농가들은 생산비조차 건질 수 없는 농업을 이어가느라 빚더미에 올랐다. UR 협상 타결 이후 지난 10년간 농가소득은 42% 증가한 데 비해 농가부채는 241%나 증가했다. 도농간 소득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이제 농가소득은 도시가구 소득에 비해 73%까지 떨어졌다.
정부는 생산자인 농민들이 생산비를 적절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농산물 가격정책을 폄으로써 농민들이 영농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 정부는 그동안 농산물 가격정책을 마치 물가정책 펴듯 했다. 다시 말해 물가상승을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외국의 값싼 농산물을 수입해 가격을 낮추고,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면 그대로 방치하는 식이었다. 농민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금껏 농촌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개방되지 않은 유일한 농산물 품목이자 농업소득의 50%를 차지하는 쌀의 가격이 추곡수매제 덕분에 안정적으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3월 추곡수매제가 폐지됐다. 당연히 쌀값은 20% 이상 폭락했다. 게다가 쌀시장 개방폭을 크게 넓히는 쌀협상 비준안을 국회에서 처리한다고 하니 농민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심정이었다.
***농민대회에 모였던 농민들의 심정을 아는가?**
지금 농촌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농업경영주 중 40대 미만은 3만8000명밖에 없고 60대 이상이 59%를 차지한다는 농림부 통계는 한국 농업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농촌은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동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쌀값 폭락과 쌀시장 개방은 농민들에게 생사가 걸린 심각한 문제였다. 따라서 지난달 15일 농민대회가 분노한 농심으로 인해 격렬해질 수도 있음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당연히 경찰은 이런 상황을 감안해 유연한 대응을 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런 방향에서는 아무런 사전준비도 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농민대회 당시 경찰이 단순히 집회를 해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의도적으로 강경진압을 했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당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3일 뒤에 APEC 반대 집회가 예정돼 있었다는 점도 경찰이 애초부터 강경진압의 방침을 갖게 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시 농민집회에 참가했던 농민의 죽음에 대해 '폭력시위가 그 원인'이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농민을 두 명이나 죽음으로 내몬 경찰의 총수가 사퇴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으니, 아무리 사과를 한들 그 사과의 진정성을 국민이 믿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12월 21일 APEC 정상회의 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농민들의 반 세계화 시위 등에 대해 "반대하고 시위할 만한 이유가 있지만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며 과격시위 양상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영웅도 시대와 역사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한다"는 등 세계화의 대세를 바꿀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농촌문제의 심각성을 알기나 하나?**
노 대통령께 묻고 싶다. 세계화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인데 왜 한국의 농민들이 유독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한국의 농민시위대나 농민단체가 과격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잘못된 농업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농업과 농민과 농촌이 아사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저항이 거센 것이다.
노 대통령이 한국의 농업과 농촌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처럼 농업정책에서도, 집회와 시위를 통한 농민들의 의사표현에 대한 대응에서도, 경찰폭력에 의해 농민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사후수습에서도 진정성 없는 피상적인 임기응변으로만 시종한다면 농민들의 저항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체댓글 0